#077화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 괴멸적인 탄압을 받은 태양교는 교세가 완전히 기울어버린다.
‘황제의 분노를 산 교단’이라는 수식어만으로도 이 대륙 안에서 발붙일 곳은 없었고, 새로운 신자 유입은커녕 있던 신도들마저 슬그머니 이탈할 정도였으니까.
이후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던 태양교는 두 개의 교파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원래 태양교의 속성인 적극적인 확장을 중시하는 정통파.
다른 하나가 기존의 태양교 교리에 의문을 제시한 개혁파였다.
지금 교단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며, 공격적인 포교와 확장정책이 아니라 수도사들의 신앙심 함양과 교리 탐구가 우선이라는 자들이었다.
‘태양교 개혁파. 그들이 갑자기 생겨났을 리 없으니, 주류만 아닐 뿐 태양교 내부에 이미 조용히 자생하고 있었겠지.’
주류가 아니기에 숨죽이고 있을 뿐, 지금의 태양교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아렌은 확신했다.
‘태양교 외부, 그것도 황궁에서 온 자들이라면 도움을 구하고 싶었겠지. 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바꿔놓기 불가능하다면 더더욱.’
그리고 아렌의 확신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렌은 눈앞의 개혁파 신도 콜론에게 말했다.
“물론 저야 있는 힘껏 도와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다만, 도와드리기 위해선 자세한 내용을 들어야만 하지요.”
“그, 그야 물론입니다. 실은 이미 저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동료 말입니까?”
“네. 모두 지금 교단의 행보에 의문을 가진 동지들입니다. 다들 의지가 강하고 행동력이 넘치며, 입이 무겁죠.”
‘…지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전부 다 까발리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교단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포교가 더욱 강압적이라거나, 중앙 진출에 지나치게 열을 올린다던지 말입니다. 10년쯤 전부터 그런 낌새는 있었지만, 더욱 심해진 건 5년 전부터였죠.”
‘고드프리 때문인가?’
고드프리가 태양교에 귀의하게 된 게 대략 10년 전. 그리고 황궁에서 실각한 후 이곳 수도원에 몸담은 게 5년 전이었다.
“그리고 반년 전, 근처 광맥에서 은광이 발견된 후 교의 패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땅에서 은이 나온 걸 숨긴 채 헐값에 사들이거나, 원래 토주가 땅을 팔지 않으면 간밤에 복면을 쓴 자들에게 호되게 당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죠.”
“당연히 영주도 한패였겠죠?”
“물론입니다. 적어도 이곳 선페일 영지 안에선, 우리 태양교를 견제할 자들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패악을 못 견디고 믿음을 저버린 자들을 배교자라며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그럴수록, 이탈자는 점점 늘고 있고요. 민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종교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콜론이 목소리를 높였고, 그걸 들은 아렌은.
‘제법 순진한 말을 하는군.’
속으로 웃어넘겼다.
야망 넘치던 태양교가 망하게 된 건, 그 오만한 태도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다.
단지 스스로도 소화시키지 못할 야망을 지녔다가 황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 그뿐이었다.
아무리 속세로부터 초연한 종교라 하더라도 포교하는 데는 돈이 든다.
태양교가 은광산을 통한 막대한 부로 지역에서부터 서서히 교세를 넓혀나갔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어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태양교는 징검다리를 몇 개 건너뛰어 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는 급류 아래로의 추락이었다.
“과연, 콜론 사제님의 고견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아렌은 본능적으로 말을 끊었다.
뒤쪽 복도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훅!
아렌은 주변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던 등잔의 불을 얼른 불어 껐다.
“아, 여기 있었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높이 들어 올린 건, 황국의 제5황자 고드프리였다.
“당연히 아렌 너도 타린 공과 함께 올 줄 알았는데. 따로 행동한다길래 호기심이 동해서 와 봤다.”
“아, 그러시군요.”
아렌은 눈앞의 거대한 수직 동공(洞空)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드프리 전하가 보여주신 게 기억에 남아, 지나가던 신도분께 다시 안내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친절한 교우님을 만나서 다행이로군.”
고드프리는 어둠 속에서 꾸벅 머리를 숙이는 콜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콜론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이쪽의 등잔은 이미 꺼트린 후.
작은 표정의 변화 정도는 완연한 어둠 속에 파묻히고 없다.
아렌이 등불을 꺼트린 이유였다.
“그럼 타린 공은 아직 대주교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아마도. 타린 공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밝히지 않았지. 하지만 이미 다 알고 하는 수작이지 않나?”
“…….”
“황궁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 삼아, 어떻게든 이곳의 비리를 밝혀내 그것을 빌미로 은광산 경영권을 가져가려는 속셈 아닌가?”
확실히 고드프리가 한 말은 대단한 통찰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글쎄요. 전 타린 공을 수행하러 온 몸일 뿐이라서요. 어떤 임무인지는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아렌은 한 발짝 물러섰고, 고드프리도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그건, 곧 알게 되겠지. 하지만 아렌. 아까 말했듯 난 5년 전의 일은 지나간 것으로 내버려 둘 생각이다. 하지만 다시금 내 보금자리를 들쑤셔 놓는다면, 그 자리에서 난 새로운 악연을 만들게 되겠지.”
아까 타린이 있을 때 한 말과 내용은 같았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고드프리에게는 아직 아렌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던 것이다.
‘조명이 없는 게 아쉽군.’
불빛이 없어 고드프리의 표정이 훤히 보이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럼, 조만간 또 보도록 하지. 아렌 너도 죄 없는 교우님은 그만 괴롭히고 숙소로 돌아가도록.”
일종의 경고를 마친 뒤 고드프리가 물러나려고 했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아렌이 물었다.
“이곳에 그렇게까지 애착이 있었다면, 왜 황제가 되려고 했던 겁니까. 사제 생활이 훨씬 잘 어울렸을 텐데.”
“…….”
대답하지 않은 채, 고드프리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 식겁했네.”
아렌의 뒤에서 언제든 뛰쳐나갈 태세를 갖추던 발커스는, 긴장 풀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렌. 이만큼 들었으면, 증거고 뭐고 필요 없지 않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고드프리 전하보다는 우리 말을 더 믿으실 텐데. 곧바로 황궁에 고발하고 증거는 후발대더러 찾으라 하죠?”
“아니, 그러면 안 돼요.”
“왜죠? 혹시나 증거가 안 나올까 봐?”
제국군이 출동해 사원 전체를 뒤집어놓으면 반드시 증거는 나온다.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 그랬으니까 아렌도 잘 안다.
“아뇨. 그러면, 태양교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아렌 나으리.”
“나으리라뇨. 그냥 아렌이라 부르세요.”
콜론이 원하는 건 달라진 태양교지, 쑥대밭이 된 태양교가 아니다.
아렌을 향해 선망의 눈을 반짝이는 콜론.
반면 아렌을 잘 아는 발커스는 대번에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아렌 저 양반,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네.’
이제 아렌의 완전한 심복이 된 발커스는 척하면 척, 아렌의 속내를 읽었다.
물론, 아렌에게 어떤 속셈이 있어도 발커스는 끝까지 쫓아 올 테지만.
“자, 그럼 돌아가죠. 타린 공이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별 진전은 없었지만요.”
물론 타린은 아직 살아있었다.
“대주교와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주고받았습니다. 끝까지 이야기는 빙 에둘러 가나 싶었는데,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속내를 보이더군요.”
[황궁에서 일어난 일은 저희의 본의가 아닙니다. 죽은 사제 개인의 일탈인지, 또 다른 자의 음모였는지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꼭 공정한 수사를 부탁드립니다.]
“-대주교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네. 아무래도 황궁에서의 일 때문에 온 건가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 외에도, 아렌의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타린이 당연히 황궁으로 간다는 듯 말하고 있군. 지금 당장은 죽일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타린이 뭔가를 찾을 것 같으면 그때 죽일 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밝히지 않았죠?”
“네. 대주교도 아마 황궁에서의 일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쪽으로 생각하게 할 거고요.”
비록 적대적인 분위기는 없었다고 하나, 자신이 낱낱이 비리를 파해칠 곳의 최고 권력자를 만나고 온 뒤라 타린은 벌써 지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렌은 좀 성과가 있었습니까?”
“음, 아니요?”
아렌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
놀란 발커스의 눈이 크게 떠졌고, 아렌은 타린의 시선을 발커스로부터 돌리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곳저곳 안내해줄 사제 한 명을 포섭하긴 했어요. 내일은 태양교가 관리한다는 은광산에 가보려고요.”
“아, 그거 좋군요. 그곳이 이곳 비리의 핵심일 테니 저도 조만간 들를 생각이었는데. 같이 가시죠.”
“어? 광산에 가시려고요?”
아렌은 일부러 더 놀란 척하며 물었다.
“광산이면 온갖 분진과 검댕이 가득 차 있을 텐데요. 타린 공에겐 괴로운 장소일 거예요.”
“으음…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청결에 유난한 편인 타린이라면 절대 가고 싶지 않을 테지만, 그의 직업윤리가 본능을 눌렀다.
“임무 앞에서 약한 소리할 순 없죠. 까짓거 목욕하면 그만이니까요.”
‘쳇. 혼자 가는 편이 좋은데.’
개혁파 사제 콜론이 안내해주기로 했는데, 아렌은 콜론의 이야기는 타린에게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황제에게 모두 보고해야겠지만, 가능만 하다면 이곳의 모든 비리를 덮는 대신 개혁파 중심의 새로운 교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태양교 개혁파가 아렌과 손을 잡는다면, 굳이 무리한 방법을 써가며 은광 채굴권을 가져올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기 위해선, 내부의 개혁파 협력자들에 대해선 최대한 숨기는 게 좋았다.
*****
굳이 지체할 것 없었다. 아렌은 곧바로 광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 이분이 안내해주신다는 사제입니까?”
타린이 손을 뻗었다. 콜론은 악수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분과도 말씀이 되었나요, 아렌?”
“시간이 없어요. 얼마나 가야 하죠?”
벌써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 선페일의 해는 빨리 진다고 하니, 남은 시간이 없었다.
콜론을 말 뒤에 태우고 산을 따라 달렸다.
20분쯤 달리자, 산의 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들어간 거대한 동공이 보였다.
“…저건. 사원에 있던 수직 동공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네. 태초시대, 아직 태양이 높게 날지 못하던 시절 땅에 내려와 잠깐 쉬던 흔적들이라고 하죠. 대사원 안의 성지처럼 거대하고 매끄럽지는 않지만, 이 산맥에는 저런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광산은 저 흔적을 비스듬히 파고 내려간 거고요.”
확실히 거대한 광산이었다.
한두 사람이 간신히 내려갈 법한 좁은 구멍이 아니라, 집 한두 채는 족히 들어갈 구멍.
마침 그 안에서 풍채 좋은 광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 저 광부님이 안쪽을 안내해주실 겁니다.”
타린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오, 당신들이 황궁에서 오신 분들인가? 아침부터 광부들이 시끌시끌하긴 하더군.”
“반갑습니다. 저는-”
광부에게 다가가던 타린의 말이 멎었다.
이곳이 탄광도 아닌데, 광부의 몸은 온통 새카맸다.
이곳 산맥의 돌이 주로 검었기 때문에 분진 역시도 검어서 그런 모양이지만, 눈만 빼고 온몸이 검은 모습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반갑소. 내가 제2 광산 광부장 터커요!”
덥석!
터커는 말릴 새도 없이 타린의 손을 잡았다.
“…….”
“어라?”
터커가 악수의 의미로 손을 붕붕 흔들기도 전에, 타린의 몸은 이미 힘을 잃었다.
털썩!
흰자를 보이며 쓰러진 타린.
몰래 주먹을 불끈 쥔 아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이분은 깔끔하지 못하면 기절하는 병이 있거든요. 광산 아래로는, 우리만 내려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