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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6화 (76/227)

#076화

“제가, 틀렸다고요?”

“…실례했군. 잠시 말이 격해진 모양이다. 따라와라.”

양해를 구한 고드프리는, 아렌 일행을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안내했다.

방금 전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지 말라고 한 직후이기에, 일행 모두가 긴장했다.

비록 지금은 곳곳에 등잔이 걸려 있어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모퉁이를 몇 개만 지나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떨어질 만큼 깊고 어두운 복도였다.

“저, 레온나토스 전하? 어디까지 내려가야 합니까?”

너무 깊이까지 들어간다 생각한 타린이 물어볼 즈음이 되어서야 고드프리는 발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봐라, 아렌 네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산비탈 사면에 지어진 신전에서 암반을 파들어가 만들어진 공간 깊은 곳에는, 수직으로 뚫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은 그 지름이 10m는 족히 될 만큼 커다랬고, 아래로도 위로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깊었다. 신이 위에서 아래로 불에 달군 송곳이라도 찔러넣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구멍의 벽면에 어둠 속에서 조각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떠냐. 이것이 산맥 안쪽으로 향한 통로를 막아두지 않은 이유다.”

“…이 구덩이가요?”

“이 흔적은 태양께서 잠시 지상에 머물렀다 다시 올라가셔서 생긴 자국이지. 신께서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닌가?”

‘그런가? 내가 보기엔 조금 신기하게 생긴 구멍일 뿐인데.’

확실히 구멍의 벽면은 돌을 녹여서 자른 듯 매끈했다.

암석이라기보다 유리에 더 가까운 단면이지만, 고작 그것으로 태양신에 대한 신앙심이 생기진 않는다.

꽤나 장엄하고 볼만한 구경거리인 건 확실하지만,

그보다, 아렌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따로 있었다.

“고드프리 전하. 저 벽면에 있는 조각상은 무엇입니까?”

“교단이 이 성지를 발견한 이후, 한 독실하고 용감한 사제가 만들었다더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구멍의 맞은편 벽, 그곳에 희미한 검은 색 태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매끈하고 검은색의 둥근 구에, 불길하게 일렁이는 왕관 모양의 가시들.

태양 조각상의 색깔이 검은색인 것 자체는 이제 놀랍지 않았다. 아렌의 주의를 끈 건, 태양 조각상의 재질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둔중한 윤기를 띠며, 위에서부터 내려혼 희미한 빛조차 반사하는 돌.

그건, 아렌의 왼손에 있는 반지의 재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

“갑자기 방문하시고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힘드셨을 겁니다. 새로 준비한 방에서 조금 쉬시지요. 대주교께서 준비가 되셨다면 금방 기별 올리겠습니다.”

고드프리는 태양교의 성지를 보여준 다음 이전까지의 질척거림 없이 시원할 만큼 곧바로 물러났다.

“…후, 이제 좀 한숨 돌리겠군요.”

지나치게 어두운 곳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발커스는 벽을 따라 늘어선 침대 하나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분위기만 보면 어둠 속에서 일행을 습격해와도 어색하지 않은 그림. 특히 아렌의 호위를 책임진 발커스의 심력 소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사관 타린은 다른 쪽으로 머리를 쓰고 있었다.

“고드프리는 굳이 우리에게 태양교의 성지를 보여줬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타린의 물음에, 아렌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글쎄요. 신앙에 눈이 먼 사람을 논리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제국의 황태자 후보였던 자입니다. 그의 행동에 별다른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의미가 있다면,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유세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죠. 고드프리 전하와 전 악연이 있으니까.”

“하긴, 아렌 공도 그렇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아, 그렇군.’

타린은 조사관이다. 그리고 고드프리가 변방 중의 변방, 제국의 최북단으로 오게 된 건 황궁에서의 여러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궁의 조사관이라면, 분명 고드프리의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했을 것이다.

‘고드프리 입장에선 타린이나 나나 눈엣가시라 이건가?’

아렌은 타린에게 말했다.

“타린. 대주교를 만나게 될 때, 저도 동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네? 따로 행동하신다고요? 태양교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짜고짜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볼 건 아니잖아요?”

파견 조사관이 들렀다는 사실만으로 왜 이곳에 들렀는지 대강은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조사하는지까지는 알려줄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태양교는 뒤가 구린 모든 것들을 숨기려 할 테고,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기에 그 행동은 더 부산스러울 테니까.

‘만약 대주교에게 다짜고짜 말을 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겠지만.’

“대주교를 알현하는 자리라면 분명 고드프리나 다른 책임자들도 동석하겠죠. 그렇다면 사원의 다른 곳에는 그들의 눈길이 덜 닿는다는 뜻이에요. 명목상 전 타린 공의 수행원일 뿐이니, 그리 큰 결례도 아닐 테고요.”

“제가 대주교를 만나는 동안 아렌 공은 다른 곳을 파헤쳐 보겠다는 말입니까?”

“네, 양동작전이라기엔 거창하지만요.”

타린에게 말한 이유 외에도 아렌이 단독행동을 하려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절벽에서 본 그 조각상이, 정말 운명석인가?’

적어도 재질만은 아렌의 것처럼 빛났지만, 흑옥같다고 모두 운명석이라는 법은 없다. 대부분은 그저 조금 희귀할 뿐인, 평범한 흑옥일 테니까.

‘…하지만.’

아티스의 수도에서 본 흑옥 피리와, 교국의 주교가 가진 흑옥 팔찌 모두 사용자에게 힘을 주는, ‘운명석’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보통은 일평생 만날 일 없는 물건을 몇 년 사이 두 번이나 보게 되자, 이번 검은 태양 조각상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똑똑.

밖에서 기별이 들려왔다.

“아, 지금 가면 되는군요, 아렌 공.”

“네. 혹시 모르니 위병들과는 떨어지지 마세요. 낮안개 기사단 두명도 함께 대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렌 공은-”

“전 발커스 경까지 세 명으로 충분해요.”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태양교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모여있든 상관없어요. 타린 공도 알고 있잖아요?”

“…그렇죠.”

지금 아렌 일행은 사자의 입속이 아니라, 이미 위장 안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만 방심해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소화되고 말 것이다.

아렌은 말했다.

“그러니, 피차 살아서 만나자고요.”

*****

아렌은 발커스와 기사 둘과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방은 됐으니, 복도라도 좀 더 밝혀둘 수는 없나?”

발커스가 두리번거리며 툴툴댔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지만, 사원은 산비탈 쪽 한 방향으로만 창이 나 있어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아렌 공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렇게 안내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난감할 것 같은데요.”

“타린 공은 이 교단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니 저는 반대로, 교의 대다수를 이루는 평신도들을 만나야겠죠.”

“그러시죠. 그러면 아무나 붙들고-”

“아뇨. 누굴 고를진 제가 정해요.”

아렌의 평범한 여행용 복장은, 온통 사제 투성이인 수도원 안에서 유독 도드라졌다.

신도들은 아렌과 발커스, 기사들을 보고 대부분 경계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간혹가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자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저, 혼자시면 제가 안내라도 해드릴까요?”

‘…음. 아니군.’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더 돌아볼게요. 자유롭게 다녀도 된다는 허락은 받았거든요.”

실은 그런 허락 따위 받지 않았지만.

‘감시역이 붙어있지 않으니, 암묵적인 승인이라 말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리고, 다른 신도들을 스무 명쯤 지나 보냈을 때쯤,

아렌은 원하던 사람을 찾았다.

“저기,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네, 네?!”

화들짝 놀라는 사제.

아렌보다 한두 살쯤 많은 나이에, 곱슬머리가 짙은 사제였다.

“전 아렌이라 합니다.”

“네? 네, 안녕하세요? 전 콜론인데요. 그런데, 누구시죠?”

“저흰 황궁에서 왔고, 어떤 이유로 인해 잠시 이곳에 묵고 있죠. 괜찮으시다면 평신도들의 일과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아렌의 부탁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그간 지나 보낸 사람들 중 누구라도 아렌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왜 저한테 부탁하시죠?”

“감입니다. 콜론이 가장 잘 해 줄 것 같았거든요?”

“…?”

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렌은 확신했다.

‘역시.’

아렌은 다시금 확신했다.

처음에는 머뭇대던 콜론은, 이내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저라도 괜찮다면요.”

*****

“이곳은 식당입니다. 평소엔 야외에 있지만, 비가 오면 각자 식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죠. 하지만 이곳 산기슭에는 일 년에 몇 번 비가 내리지 않아요.”

“아, 그렇군요!”

사원의 안내는 이곳에 들르자마자 고드프리에게 대강 받았었지만, 아렌은 마치 처음 듣는 내용처럼 콜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따라가던 발커스는 아렌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지나갔잖아요. 굳이 왜 저 사람이에요?”

“…기대감이요.”

“네?”

“날 보고 기대를 했어요. 경계심이나 억지로 짜낸 무관심이 아니라.”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요?”

“적어도 이곳 주류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이란 뜻이죠.”

“…?”

아렌은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던 콜론에게 재빨리 말했다.

“저, 이 안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던데요. 한 번 더 가볼 수 있나요?”

“아, 태양흔 말씀인가요? 보통은 혼자 가면 위험해서 아침 예배에 다 같이 들르지만…”

“제 안내로 들르는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콜론은 점점 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아렌을 이끌었다.

아렌은 품속에서 방에서 가져온 등잔을 꺼내 불을 붙였다.

등불의 어슴푸레한 불빛에 의지한 채, 아렌은 다시금 거대한 구멍인 ‘태양흔’과 그 벽에 붙은 조각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긴 하지만, 모양만 보면 확실히 흑옥이 맞긴 해.’

그것이 운명석인지 확실시하려면, 이곳에 운명석과 계약한 신비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저기 태양의 조각상, 저건 무슨 의미인가요?”

“저거요? 글쎄요? 오래전 어느 신도분이 만들었다는 것만 들었고,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렇군요.”

고드프리가 한 말과 같았다. 어둠 속에서 등불에 비춰본 콜론의 표정을 봤을 때,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한참을 조각상을 응시하던 아렌이 문득 물었다.

“콜론, 당신은 지금의 교단에 만족해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인기척이라곤 없는 어둠 속에서, 아렌은 본색을 드러냈다.

“저흰 황궁에서 파견되었습니다. 태양교에 문제가 있다면, 그걸 뿌리 뽑으라는 명을 받았죠.”

“아, 아니. 아렌 공은 그걸 그대로 말하면-”

뒤에 선 발커스가 경악했지만, 아렌은 확신했다.

‘괜찮아. 이 자는 밖에다 말하지 않아.’

등불의 희미한 빛은 한 점도 없는 공간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얼굴의 음영은, 그 사람의 아주 작은 심경 변화까지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었다.

“말씀하기 곤란하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곳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내부에서의 변화도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

콜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비록 그 행동에는 망설임이 깃든 듯했지만, 표정을 본 아렌은 확신했다.

‘넘어왔군.’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우리 교를 구해 주십시오.”

아렌은 고개를 숙인 채 슬그머니 웃었다.

“물론입니다, 콜론. 전 그러기 위해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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