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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5화 (75/227)

#075화

‘고드프리가, 여기 있다고?’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 도적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태양교와 영주 사이에도 강한 유착관계가 형성되어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태양교의 신전 깊숙한 곳에 홀로 있다고 생각한 고드프리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만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렌과 강한 악연이 있는 고드프리이니 더더욱.

“고드프리 전하께선, 이 아이와 구면이십니까? 게다가 황자 전하의 비서관?”

영주는 갑자기 흘러들어온 정보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영주님이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죠. 하지만 얕보시면 곤란합니다. 저 어린 나이에 이미 황궁의 권력 싸움 한복판에 있는 자니까요. 게다가, 다른 능력도 출중하지요.”

고드프리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심지 깊은 곳에 뼈가 느껴졌다.

“이곳에 왜 고드프리 전하가…?”

타린의 물음에 선페일 영주 카로나가 답했다.

“아, 고드프리 전하께선 몇 년 전부터 이곳의 행정에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행정에, 도움이라고요?”

“네. 비록 어떤 직함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정치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황궁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 변방으로 도망쳐 온 신세지.’

사실상의 유배나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이런 변방에 직접 행차한 황자다. 영주만 허락한다면, 고드프리가 선페일 영지의 운영 전반에 관여해도 별문제는 없다.

영주의 대답에 고드프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님이 잘 말씀해주셨군요. 의문에 해답이 되셨습니까?”

“…실례했습니다. 문제 삼으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너무 놀랐을 뿐입니다.”

“이곳보다 더 북쪽은 없습니다. 사실상 대륙의 끝자락인 곳에서, 과거의 해묵은 이야기를 다시 들춰낼 필요는 없겠죠. 과거의 일은 이미 다 잊었습니다. 아렌 공은 어떻습니까?”

“전하의 말씀을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렌은 고개를 숙였다.

물론 속마음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글쎄. 목숨이 왔다 갔다 한 악연이 잊히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지 않을까?’

고드프리는 응접실에 들어온 직후부터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다행이군요. 혹시 오늘 묵으실 곳은 있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몸 담고 있는 태양교의 대신전은 어떻습니까. 친히 소개도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아렌 공.”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타린 공이 인솔자니까요. 충분히 논의한 후 오늘이나 내일쯤 대답을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자가 정중히 한 제안을 간단히 거절한 아렌. 고드프리는 옛 기억이 나는 듯 쓰게 웃었다.

“물론이지요. 아렌 공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군요. 그리울 따름입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제게 말씀을 높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고드프리 전하.”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 제안대로 하지.”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말을 놓는 고드프리.

‘…한숨 돌릴 틈도 없군.’

하룻밤 숙식을 제공한다는 영주의 강권을 만류하고, 아렌은 시내 안에 있는 여관을 잡았다.

시내 안의 여관은 총 다섯이었고, 아렌이 선택한 곳은 그중 가장 허름한 여관이었다.

번듯하고 제대로 된 여관일수록 뒤로 태양교나 영주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좁은 방에 아렌과 발커스, 타린이 모였다.

“초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타린 공?”

“글쎄요. 사실 그 자리에서 아렌 공이 바로 결정했어도 됐을 텐데요. 굳이 저한테 돌리지 않으셔도요.”

“아뇨. 전 이번 여정의 고삐를 타린 공에게 맡겼으니까요.”

아렌의 공치사에도 타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그간의 여정을 통해, 실질적인 주도권은 아렌이 쥐고 있다는 걸, 그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임무가 아렌에 대해 조금 더 잘 아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다면, 전 태양교의 대신전으로 들어가 보고 싶군요. 태양교가 정말 비리를 저질렀다면, 외곽보다 중심부에서 더 많은 증거들을 얻어낼 테니까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오하고 있습니다. 황궁의 파견 조사관이 환영받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전에 제가 해드린 점괘, 기억하고 계시죠?”

“…네.”

필요할 때 필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점괘.

“하지만 전 목숨을 아끼기 위해 필요한 수사를 마다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렌의 눈에도 타린의 말은 진실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태양교에게 살해당하는 미래도 머지않은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타린을 죽게 내버려두느냐, 마느냐는 오직 아렌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아렌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날이 밝는대로 곧바로 대신전으로 향하죠.”

“…곧바로요? 고드프리 전하에게 말씀드리지도 않고요?”

“기왕 갈 거면 곧바로인 게 낫죠. 타린 공은 아닌가요?”

어차피 방문할 거라면, 괜히 기별을 줘 준비할 시간을 줄 필요 없다.

아렌의 말에 타린도 슬그머니 웃었다.

“역시, 아렌 공과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았습니다.”

*****

날이 밝자마자 아렌 일행은 태양교의 총본산, 대신전으로 향했다.

거점도시 다운힐은 선페일 지방의 북쪽 끝에 있었지만, 대신전은 그보다도 더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를 나와 길도 변변치 않은 평야를 걸었다.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이던 얼어붙은 산맥은 이제 벽처럼 다가왔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산의 아랫부분은 산의 그림자로 인해 영영 어두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완만하게 높아지는 산의 초입부에 들어섰을 때.

“…과연. 명성 값은 하는군요.”

타린이 중얼거렸다.

암석으로 이뤄진 산의 비탈면 옆으로, 검은 돌을 잘라 만든 벽돌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산의 비탈면을 따라 지그재그 모양으로 올라간 건축물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고, 신전의 최상층부는 산의 중턱쯤으로 보일 만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색 벽돌이라니. 태양교의 신전이니, 전 좀 더 밝은색을 생각했었습니다.”

발커스의 사소한 불만이 무색할 만큼 그 규모는 제법 장대했다.

‘이 정도라면, 아트마 교의 총본산인 비원궁만큼이나 유명해도 될 것 같은데. 역시 교세가 먼저인가?’

언제까지고 밖에서 구경할 수는 없다.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 찰나.

끼이익.

밖에서 따로 기별하기도 전에, 문은 알아서 열렸다.

마치 아렌 일행이 올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건, 들어오라는 거겠죠?”

“…….”

아렌의 말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벽처럼 높은 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익숙한 보라색 옷을 입은 사제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고드프리.

“대륙의 최북단에서 황제 폐하의 조사관을 뵙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동안은 제가 안내해드리죠.”

“감사드립니다.”

타린은 어째서 고드프리가 이곳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가장 허름한 여관을 고르는 등 주의는 했지만, 다운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밀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울러, 대주교께서 심심한 사의도 표명하셨습니다. 제국의 초대를 받아 보낸 사제들이 그 안에서 말썽을 일으킨 건 어떤 식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법이지요.”

물론 황궁 안에서 일어난 살인미수를 단순한 ‘말썽’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고드프리는 직접 안내하면서 오직 아렌이 아닌 타린에게만 말을 붙였다.

“타린 공께선 이곳 사원의 외양을 보고 많이 놀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놀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장엄하더군요.”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건물을 증축하고 개장하며 점점 규모가 커졌죠. 그러니, 혹 이 안에서 길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가령-”

고드프리는 아렌 일행을 사원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닥이며 천장이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단단한 암반을 반듯하게 파내려간 것 뿐인 구조물이 나타났다.

창문이라곤 없고 걸려있는 촛대도 없어서, 일행의 앞으로도 이어져있는 복도는 완연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원은 비탈길에 걸쳐있는 건물보다도 산 쪽을 향해 파 내려간 공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채광도 어려워, 이제는 본 교단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지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건축물.

그 곳을 사용하고 있는 자들조차도 정확한 규모를 모른다는 말은 꽤나 오싹했다.

“혹시나 이 안에서 길을 잃더라도, 부디 어두운 곳으로는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도 일 년에 몇 번은 신입 수도사들이 사원 안에서 실종되곤 하니까요.”

“그렇게 위험하다면, 쓰지 않는 공간은 막아두면 되지 않습니까? 벽돌이든 회반죽이든, 뭐든 간에요.”

“하지만 어둠은 태양에 대한 감사함을 상기시키죠.”

고드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태양은 항상 일정한 시각에 뜨고 집니다. 설령 빛이 없는 밤중이라도 내일 태양이 뜰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리 절망적이지 않죠. 그렇기에 사람들은 태양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겁니다. 태양의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죽은 수도사라도 그 최후는, 태양에 대한 경애와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요.”

“…….”

“…….”

무언가에 홀린듯 말을 내뱉는 고드프리에 타린도, 발커스도 대꾸하지 못했다.

‘…음.’

그리고 고드프리의 말을 들은 아렌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상은 아니군.’

*****

일행이 배정받은 방은 사원 중간부, 성벽에 위치한 방이었다.

몇백 개인지도 모를 계단을 올라왔기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꽤나 절경이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방은 혼자 쓰는 건가요?”

방은 충분히 넓었지만, 열한 명의 인원에게 열한 개의 방이 돌아간다.

극진한 대접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호랑이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에서의 1인실은 불안 요소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타린 공. 비록 사원이 오래되었다지만, 손님에게 내드릴 방은 아주 많죠. 불편함 없이 지내실만할 겁니다.”

“개인실도 물론 좋습니다만, 저희에겐 여럿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방이 좋을 듯합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대여섯이 묵을 수 있는 방을 두 개 준비해드리지요.”

타린의 말은 사실상 이곳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건 어차피 저쪽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타린은 굳이 에두르는 것보다 확실히 말함을 택했다.

“그럼, 다른 방을 준비하는 동안 사원을 조금 더 안내해드리죠.”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다시 고드프리를 따라 걸었다.

곳곳에서 지나치는 사제들의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의 사절단이 황궁에서 겪은 일을 모르지 않을 텐데.

“타린 공은, 믿음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느닷없이 고드프리가 말했다.

“…믿음, 말입니까? 글쎄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만, 무언가를 확실히 알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 를 이르는 말입니까?”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겠지요. 타린 공의 정의는 꽤나 구체적이시군요.”

고드프리의 눈은 다음엔 아렌에게로 향했다.

“그럼 아렌, 네 생각은 어떻지?”

이런 관념적인 이야기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타린의 말도 틀린 건 아니라 생각하지만.’

아렌의 점괘를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확실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다.

“그냥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닐까요? 믿는 이유따위는 실은 믿겠다 결심한 이후에야 덧붙이는 것 뿐이고요. 잘 알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요.”

“그거 너 다운 말이군. 하지만.”

일행을 점점 깊은 곳으로 안내하던 고드프리는 돌연 정색하고 말했다.

“그 말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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