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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4화 (74/227)

#074화

마지막 도적이 발커스의 폼멜에 맞아 기절했다.

도적단은 애초에 기사들과 위병의 상대가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위병들에게 위태로운 순간이 많았다.

‘하긴, 성안에서 위병들은 장검을 차고 있지 못하니까. 기본적인 소양으로 배우긴 하겠지만, 매일 다루는 창보다는 못하겠지.’

거기에 모두 포획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도 더욱 대처를 어렵게 했다.

만약 도적들을 단칼에 베어넘겼다면, 어떤 경우라도 고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제압하지 않은 적이 있는지 주위를 확인한 후, 타린은 아렌에게 다가왔다.

“…아렌 공, 검을 깨나 잘 쓴다는 말이 정말이었군요.”

“뭘요. 그냥 잡기술 정도죠. 황궁이 워낙 흉흉한 곳이잖아요? 교양 삼아 배웠을 뿐이에요.”

“제가 본 건 절대 단순한 교양의 영역이 아니었는데요.”

“그렇게 칭찬해주시면 감사하긴 하지만요.”

“…….”

어느새 주변은 일단락되었다.

바닥에는 검 손잡이와 칼집에 맞아 정신을 잃은 도적들이 돌처럼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들의 무기는 모두 수거한 채 한쪽에 쌓아둔 뒤였다.

무기라 할지, 농기구라고 할지 짐작도 안 가는 조잡한 도구들이긴 했지만.

“저런 덜떨어진 놈들은 어디서 나온 거지?”

발커스가 툴툴했다. 저런 도적단은 숱하게 잡아봤겠지만, 저런 허술한 놈들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흉작과 생활고에 못 버틴 양민들이 도적이 되는 경우는 이따금 있지만, 그 경우 자신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자괴감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칭 ‘얼어붙은 태양단’에게선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렌은 말했다.

“…선페일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놈들이 특별히 또라이가 아니라면요.”

“그거야 물어보면 알겠죠. 이봐, 일어나 봐.”

발커스는 정신을 잃은 두목의 뺨을 툭툭 쳤다.

도적단은 모두 검의 옆날과 폼멜, 혹은 검집에 맞고 정신을 잃었다. 한두 군데 부러진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베여서 피를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으, 으으….”

대충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해 양민들 사이에선 충분히 두목을 할 법한 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깨어난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과 부하들을 어린애 다루듯이 고이 땅에 눕힌 기사단장.

“괴, 괴물!”

“괴물이 아니라 황궁의 무사들이시다. 너희는 운이 좋아. 상대가 어줍잖은 실력이었다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 했을테니까.”

“…무, 물론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첫 손님인 것도 행운이지. 한 번이라도 손에 피를 묻혔으면 되돌릴 수 없었겠지만, 첫 장사는 불발로 끝난 모양이니까.”

이미 자신들의 무기는 수거되어 한편에 쌓여 있다. 두목은 저항할 시도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황궁의 귀인들께서 이런 시골께는 어떻게….”

“그건 네놈이 알 필요 없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네, 넵!”

“별로 적성에도 안 맞는 거 같은데, 도적질은 왜 시작하게 된 거지? 얼어붙은 태양단?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왜 지은 거고.”

그 말에, 두목의 시선은 자연히 등 뒤 북쪽으로 향했다.

눈빛에는 부러움과 증오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저흰 태양교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선페일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몸이죠.”

“…선페일에서 살아갈 수 없어? 그건 말이 안 된다.”

두목의 말에 반응한 건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듣고 있던 조사관 타린이었다.

“대체 어느 지역에서 한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쫓아낼 수 있단 말이냐.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선페일 지역에도 영주가 있을 텐데?”

“영주도 한통속입니다. 교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번 몸 담았다 배교하는 건 용서치 않고 추살대를 보내옵니다. 살기 위해선 다른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렌 공.”

타린은 생각의 공을 아렌에게로 돌렸다.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이긴 해요. 무작정 믿기는 힘들겠지만.”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 붙잡혔다면, 동정을 사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렌이 보기에 두목은 분명,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

아렌은 다른 도적들은 몰라도 두목만큼은 데리고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목은 결단코 다시 선페일 영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억지로 데리고 들어가면, 혀라도 깨물 만큼 완강했다.

하는 수 없이, 발커스는 다른 도적들과 마찬가지로 두목을 남쪽으로 풀어줬다.

“아렌 공. 그 놈들, 그냥 풀어줘도 괜찮았겠죠? 역시 힘줄이라도 잘라놓을 걸 그랬을까요?”

“그랬다간 지혈도 못 하고 그대로 죽었겠죠. 아마, 괜찮을 거예요. 도적질은 이제 진절머리 나는 모양이니까.”

잘 관리된 돌길 양옆으론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지나며 아렌이 말했다.

아직 겨울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선페일 지방에는 간밤에 내린 눈이 곳곳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곳에 선페일. 그리고 얼어붙은 산맥이군요.”

아렌의 시선에 북쪽 너머 높게 솟아오른 산맥이 보였다.

구름 위로 숨은 봉우리가 수도 없이 많았고, 산능성이는 바위를 칼로 깎아 만든 듯 각이 져 있었다.

푸른 빛이 감도는 암석과 그 위에 쌓인 눈이 제국 최북단의 경계, 얼어붙은 산맥이었다.

대륙을 동에서 서로 길게 가로지른 얼어붙은 산맥이 사실상 대륙의 끝자락이었다.

산맥 너머는 ‘밟을 수 없는 땅’이라 불리는 극한의 황무지뿐. 농사는 꿈도 꿀 수 없고 사냥조차 변변히 못하는 곳이라, 어느 국가도 굳이 산맥 너머까지 국경을 넓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신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듯한 땅이군.’

북부에는 마치 그늘이라도 드리울 듯한 거대한 산맥. 주변엔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을 듯한 거친 땅에 우중충한 하늘.

그게 선페일 지역을 본 아렌의 첫소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은광산이 생겼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선페일 지역의 최북단, 영지의 거점도시 다운힐은 얼어붙은 산맥과 꼭 맞닿아있는 도시였다.

침엽수 특유의 곧게 뻗은 나무 기둥을 성벽처럼 두른 도시였다.

나무로 된 장벽은 전쟁에선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지만, 제국 깊숙한 곳이고 전략적 가치는 없다시피 한 곳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한 영지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박하다.

‘성문을 지나는데 위병도 없었고. 도적단이 말한 삼엄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남쪽에서 온 열한 명의 이방인이 신기한 듯 사람들은 앞다퉈. 아렌 일행을 구경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털가죽을 두른 병사가 달려왔다.

“저, 혹시 황도에서 오셨습니까?”

‘…어쭈, 이것 봐라?’

영주가 보낸 병사는 아렌 일행을 단번에 알아채고 있었다.

마치, 다운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일행을 감시하고 있던 것처럼.

조사관 타린은 정체를 숨기지 안않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파견 조사관 타린 알레시오라 합니다. 뒤에 이들은 내 수행원들이죠.”

타린은 일부러 아렌과 발커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선페일의 영주 카리나 윈더포드께서 경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부디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타린과 일행은 병사의 소개를 받아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

잠시 뒤.

붉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중년 여성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 다운힐과 선페일 지역의 관리인 카로나 윈더포드입니다.”

“파견 조사관 타린 알레시오입니다.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비록 이곳이 척박한 변방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억척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의 자랑이지요. 부디 편히 있다 가시기 바랍니다.”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황제 폐하께 받은 임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런 변방에 직접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임무라니. 호기심이 돋는군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겠군요. 임무가 임무인지라.”

영주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타린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오던 중 이상한 자들을 봤었습니다.”

“이상한 자들이라니요?”

“떠밀리듯 도적이 된 듯한 무리였는데, 선페일 지역에 악담을 늘어놓더군요. 특히, 태양교를 믿지 않으면 선페일에서 살 수 없다나 뭐라나.”

“본디 자신의 인생이 망한 자는 세상 모든 것에 그 이유를 찾는 법이죠. 그따위 허황한 악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영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찻잔 들어올렸다 다시 내려놨다.

그걸 본 아렌의 눈이 빛났다.

‘…이것 봐라?’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건 부인하고 싶은 말을 들었을 때 나오는 행동.

마시지도 않을 차를 들었다 놓는 행동은 몸에 움직임을 줘 자신에게 섞인 어색한 행동을 풀기 위해 나온 행동이다.

아렌의 안에서, 영주에 대한 심증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래서, 그 도적들은 제대로 처리하셨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희가 첫 손님이었던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나름대로 죗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거짓말이다. 선페일까지의 동행은 그야말로 혀를 깨물 정도로 거부했고, 다른 지방 도시로 인도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그들은 전부 풀어주었다.

나름대로 죗값을 치렀다는 거짓말로 에둘러 말했지만, 영주의 성에는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단 말씀이십니까?”

“비록 도적이라 하나 아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도적입니다. 극형 말고도 다른 처벌도 있습니다.”

인대를 끊거나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기는 방법 등등.

하지만 영주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 모양이었다.

“타린 조사관께서는 인정이 많으시군요. 일생을 선페일에서 자란 제가 보기에 낯설게 느껴질 만큼 말입니다.”

“…저도 그들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닙니다만. 이곳에서 태양교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그들의 신앙생활은 영지에서 관여할 부분이 아니지요. 종교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순순히 말한 타린. 하지만 그도 수사관인 만큼 영주를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의 속내를 조금 떠보기 위해 타린이 말했다.

“그들의 신앙을 존중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세상에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믿음 또한 자유지요.”

“만약 잘못된 믿음을 무분별하게 퍼트린다면 광신이고, 잘못된 믿음인 걸 알면서도 퍼트린다면 사기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그러시군요.”

태연한 척하고 있는 영주였지만, 아렌은 그녀가 속에서는 조용히 끓고 있는 것을 느꼈다.

‘타린, 제법인데? 영주의 안방에서 그렇게 대놓고 속을 긁다니. 제법 배짱이 있어.’

물론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도외시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설령 영주의 눈이 뒤집혀 자신이 죽더라도, 그간 타린이 지나온 행적들은 묵었던 숙소 곳곳에 남아있다.

마지막 행선지인 선페일에서 그의 족적이 끊겼을 때, 영주는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평정심을 잃은 영주가 뭔가 실언을 내뱉는 걸 기다리는 것뿐.

그때였다.

“먼 길 오느라 피로가 많이 쌓인 분들입니다, 영주님. 환영은 그쯤 해두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아, 그, 그러는 게 좋겠군요.”

영주의 응접실에 들어온 금발의 남자.

선페일 전역에 영주보다 지위 높은 자가 없을 텐데, 그녀는 곧바로 앉은 채 허리를 세우며 긴장했다.

금발의 남자는 타린 일행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타린 조사관님. 그리고, 오랜만이군요. 아렌 공.”

“…이 자, 아는 사람입니까?”

영주가 아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타린은 스스로를 소개했고, 아렌과 발커스는 자신의 부하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저기 저 분이 제국의 제 12황자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입니다 저와도 구면이지요.”

“…조만간 만나 뵐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아렌은 금발의 남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고드프리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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