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지금 제가 죽는다고,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혹은 죽음에 가까운 큰 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그렇습니다.”
보통은 아주 좋지 않은 점괘가 나왔어도 그걸 곧이곧대로 손님에게 말하지 않는다.
너무 나쁜 점괘를 말하면 복채를 주지 않을 수도 있을뿐더러, 다음에 또 점을 보고 싶어할 생각이 싹 가실 테니까.
‘보통은 기분만 더러워지고, 믿지 않으려 하겠지.’
특히나 조사관 타린처럼 꼼꼼한 타입에게 이런 미신에 대한 불신은 꽤나 뿌리깊은 경우가 많다. 어쭙잖게 설득하면 오히려 역효과일 뿐.
차라리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강렬한 점괘를 던져준 다음, 그것을 슬쩍슬쩍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태양교의 본거지에서 타린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것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니, 점괘 자체는 사실이기도 하다.
“상세한 설명을 드리자면, 첫번째 ‘꺾여진 붓’은 고결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타린 공 자신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흩어진 깃털’과 ‘무너지는 탑’은, 둘 다 추락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같은 두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은 점괘에서 꽤나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꽤나 강렬한 점괘군요. 다행입니다. 제가 그런 것에 쉽게 흔들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물론이지요. 저도 타린 공을 믿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점괘는 어디까지나 삶을 잘 보내기 위한 이정표 같은 것이니까요. 점괘에 휘둘려 삶을 망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죠.”
“네네, 그렇죠. 그렇다면 전 이만 일어나도-”
“점괘는 본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한 것입니다. 나쁜 점괘에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답도 같이 제공하죠.”
“아뇨,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합니다만….”
“이번 여정 중, 필요하다고 느껴진 순간이 있다면, 원래라면 피했을 일도 기꺼이 하셔야만 합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도, 귀찮아도, ‘더러워도’ 말입니다.”
“…방금 해주신 말씀은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요.”
타린이 빠르게 말했다.
물론 방금 한 말은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충 둘러댄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아렌이 한 말은 끈끈한 역청처럼 타린의 마음 깊은 곳에 들러붙을 테고, 이따금씩 생각나 타린의 주의를 끌 테니까.
표면적인 곳의 주도권은 타린에게 순순히 넘겨줬지만.
아렌의 계획은 타린을 무의식에서부터 서서히, 은밀하게 잠식해나가는 것이었다.
*****
그 후로도 일행은 ‘왕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점점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아렌은 명확하게 느꼈다.
제국의 땅은 넓지만, 아직 북쪽으로의 발전은 더딘 게 사실이라고.
북으로 향할수록 큰 도시의 수도 적었고, 땅도 더 척박해졌다.
바람만 겨우 막을 목적으로 얇게 입었던 옷도 이제는 두세 겹 더 껴입어야 할 만큼 칼바람이 옷 틈새로 스며들었다.
아렌은 말 위에서 잔뜩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북부는 춥다더니, 정말이었군요.”
“뭐야, 아렌 공이 약한 말 하는 건 처음 듣는데. 북부로 온 게 설마 처음입니까?”
“그런데요. 그게 이상해요, 발커스?”
“그 왜, 유랑족들은 얼어붙은 산맥 너머에도 소수 떠돌아다닌다지 않습니까. 아렌 공도 유랑족 출신이니 분명 고향이 북부인 줄 알았는데요.”
“제 가족들은 대륙 전역을 떠돌아다니다시피 했어요. 그중 북부로 향했던 기억은 없죠. 적어도 내 기억 안에서는 그렇단 말이지만.”
“흠, 그렇군요.”
‘…잠깐만.’
발커스가 딱히 무슨 뜻을 가지고 물어본 것은 아니겠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내 반지는 어머니에게 받은 거지. 운명석도 대부분 산맥 너머 북부에서 온다고 하고. 그렇다면, 산맥 너머에 있는 유랑족들은 운명석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확실히 하려면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지만.
일행이 달리는 길은 곧고, 산적의 출몰도 없다.
애초에 상인들조차 자주 지나지 않는 길이니, 산적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터는 아닐 것이다.
“…후, 오늘은 계획보다 조금 더 멀리 왔군요. 이만 이 부근에서 야영하도록 할까요?”
타린이 지친 말을 달래주며 말하자, 위병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분주하게 야영 준비를 했다.
수풀을 정돈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간단하게 야영지 영역을 정돈했다.
자신의 말을 묶은 타린이 위병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려는 찰나였다.
“아, 아렌 공! 제가 천막 터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얼른 뛰쳐나가 아렌의 고삐를 받아드는 위병 하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터의 경계는 어디까지 넓히면 되겠습니까?”
“이 부근에선 위험한 일이 없겠죠?”
“천막의 입구는 어느 방향으로 치는 것이 길할까요?”
위병들은, 사소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가감없이 아렌에게 물어왔다.
아렌이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들이 대다수였지만, 위병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간의 여정 동안, 아렌은 틈틈이 위병들에게 점을 봐주며 그들을 단단히 예속시켜놓은 것이다.
명목상 이 일행의 책임자는 타린이지만, 이래서는 아렌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모두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는데.’
실질적인 주도권을 가져온 것과, 타린의 권위에 상처입히는 것은 별개였다.
어디까지나 타린이 도전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행동함이 중요하다.
“글쎄요. 그 답은 인솔자인 타린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렌의 한마디에 위병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타린에게 가 다시 물었다.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타린 공.”
“…….”
순진한 표정으로 묻는 그들에게, 탈니은 화도 내지 못하고 감내해야만 했다.
서서히 야영지가 갖춰졌고. 1인용 천막들은 자연히 아렌의 천막을 중심으로 둥글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아렌의 천막 앞에 놓인 커다란 불.
불의 높이가 사람 키 정도쯤 되는, 야영을 위한 모닥불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불이었다.
숲속의 밤은 길고 어둡다. 어둠은 모닥불 주변에서만 밝혀져 사람들은 자연히 모였다.
“그럼 오늘은, 위병 글레넌 님 차례로군요.”
“넵! 접니다!”
그는 화색이 된 채 불을 가운데 두고 아렌의 맞은쳔에 앉았다.
타린이 슬그머니 와 주의했다.
“…저기, 내일도 강행군이 될 겁니다. 너무 늦은 밤까지 깨어있으면 일정에 지장을 줄 겁니다.”
“물론이죠, 타린 공. 하지만 밤중의 숲은 별다른 여흥이 없어요. 이렇게 모여서 깨어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사기는 올라갈 겁니다. 말씀대로 너무 늦지 않을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네. 저도 억지로 재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지금 자리를 파하게 하면 분명 위병들의 반발을 살 터.
타린조차도 아렌에게 강경하게 나가지는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불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타린에게 아렌이 말했다.
“타렌 공께서도 이리 가까이 와 앉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뇨. 전 이 정도 거리가 좋습니다.”
차마 큰불 앞으로 오지는 않지만, 타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아렌의 점판을 구경했다.
어둠이 낮게 깔린 숲속을 커다랗게 밝혀놓은 모닥불.
아렌의 낙일관과 촛불만큼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결코 아니지만, 그 대신 야외 특유의 장대하고 역동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낙일관과 달리 주변을 에워싼 어둠은 말하자면 무한대에 가까웠고, 주변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 모닥불은 크고 격렬하게 타올랐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서, 아렌의 점괘는 더욱 신비롭고 영험하게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렌의 점괘를 지켜보는 타린.
타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는 서서히 아렌의 점괘에 경도되어가고 있었다.
*****
어느덧 아침이면 새하얀 서리가 당 위에 짙게 내리깔렸고, 말발굽은 땅에 도장을 찍듯 서리를 지그시 밟으며 북상하고 있었다.
왕의 길을 따라 북상한지도 어느덧 2주째.
조금씩 을씨년스러워지는 풍경과 싸늘해지는 공기를 제외하면 왕의 길 위를 달리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왕의 길이 선페일 지역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아서, 샛길로 가는 편이 덜 단조로워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왕의 길은 건국왕의 진군로와 완전히 일치한다지? 그렇다면-’
건국왕은 다른 지역은 쳐다보지도 않고, 확고한 목표를 가진 채 병력을 이끌고 선페일 지역으로 향했다는 뜻이 된다.
‘왜지? 무슨 이유로?’
그때였다.
“아렌 공. 발을 늦추시죠.”
발커스가 아렌의 생각을 막았다.
위병들과 기사들의 긴장이 아렌에까지 전해졌다.
어느덧 길 위는, 기다란 창과 쇠스랑을 든 도적들에 포위되어 있었다.
‘…도적이라고? 왕의 길에서?’
아렌은 적잖이 놀랐다.
아직 어린 아렌은 셈하지 않는다 해도, 칼을 든 건장한 남자가 열이나 되는 무리에 덤벼드는 도적떼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활이라도 가지고 있나? 어디 숨어있을 데도 안 보이는데.’
길 주변은 돌바닥만 늘어 서 있는 평지. 길 양옆이 계곡으로 막혀있다면 습격하기 더욱 용이한 지형이겠지만, 그랬다면 병사들도 더욱 주의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병사들을 둘러싼 도적들은 초짜처럼 보였다.
그 중 조금 더 덩치가 큰 도적이 외쳤다.
“우리는 의적, 얼어붙은 태양단이다. 곧 대륙 전역에 울려퍼질 이름이지!”
둘러싼 인원은 대략 스무 명. 그 중 활을 든 자들은 없었다.
“발커스 공은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뇨. 어이, 너희들 활동한 지 얼마나 된거냐!”
발커스는 타린의 질문에 최대한 무뚝뚝하게 대답한 후 앞의 대장에게 외쳤다.
“이제 일주일쯤 되었다! 너희가 우리 첫 손님이지! 네놈들이 우리 이름을 전역에 알려라!”
“오, 그럼 우리 살려 보내주냐? 주변 전 영지에서 병사들이 몰려올 텐데?”
“그, 그럼 안되지. 너희 모두 여기서 죽어라!”
“우리가 여기서 다 죽으면 누가 너희 소문을 내주는데?”
“…….”
발커스는 어리숙한 도적단 두목을 실컷 골려대고 있었다.
‘…도적단이라더니 멍청이들만 모아놨군.’
스무 명 정도의 인원들이 가진 무기는 급조한 창이나 쇠스랑, 도리깨들 정도.
농사지을 종자조차 부족해 떠밀려온 자들 같았다.
어쭙잖은 자들이었다면 통행료 정도는 쉽게 뜯어낼 수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론 저만한 인원에게 돌아갈 재물이 되지 않는다.
결국 도적질도 사업일 뿐. 자칭 의적단이라는 두목은 사업에 적합한 자는 아닌 듯했다.
“…빌어먹을! 모두 에워싸라!”
“아렌 공. 잘 물러나 계셔야 합니다.”
타린과 위병들이 말에서 내렸다. 기사들도 일찍이 임전 상태.
굳이 위병들이 아니라도, 기사들만으로 저들은 상대하고도 남을 것이다.
‘난 구경이나 하면 되겠지.’
아렌은 일찌감치 싸움에서 떨어졌다.
이런 곳에서 괜히 실력을 거들어줘봤자, 타린에게 또 다른 정보나 줄 뿐이다.
점술가로 이름이 알려진 아렌이 점술로 병사들을 구워삶는 건 자연스럽지만, 검으로 산적들을 베어 넘기는 건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렌의 강건너 불구경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기사들은 빠르게 전진해 도적단 대장을 압박하고 있었고, 위병들은 타린과 함께 말과 아렌을 지키느라 수비적으로 대처했다.
죽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놈들이라 그런지, 기사들이나 위병들은 직접 도적들의 살을 갈라놓지 않는데도 그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하고 있었다.
그때, 도적단의 두 명이 수적 우위를 살려 옆으로 크게 돌아 위병들의 배후를 향해 달려갔다.
아무리 훈련받은 위병이라도, 앞과 뒤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아렌은 칼을 뽑아 들었다.
챙!
“-아렌 공!”
아렌이 한 명의 쇠스랑을 장검으로 막았고, 아렌의 움직임에 주의가 끌린 위병도 금방 뒤쪽에 대처했다.
“…아렌 공, 듣던 대로 검을 잘 쓰시는군요.”
“제 몸 하나 지키는 게 전부인 검이에요. 얼른 남은 놈들을 정리해주시죠?”
아렌은 자신을 끈적하게 훑듯 바라보는 타린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