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2화 (72/227)

#072화

수도를 중심으로. 제국을 남쪽과 북쪽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관도.

이 길을 사람들은 ‘왕의 길’이라 불렀다.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는 도로들은 그 외에도 더 있지만, 그중 수도를 중심으로 가로와 세로, 십자 모양으로 가로지르는 두 길은 더욱 특별했다.

길을 도로라 비유하면, 제국을 관통하는 동맥이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런데 아렌 공. 왜 남북으로 뚫린 관도는 ‘왕의 길’이라 부른답니까? 동서로 뻗은 길은 ‘황제의 길’이라 부르잖아요?”

말 위에서 꽤나 한적하게 걷고 있던 발커스가 문득 물었다.

“그걸 지금 묻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 길을 많이 다녔잖아요. 맨날 다니면서도 몰랐어요?”

“부하들 앞에서는 폼 잡아야 하니 어디 물을 데가 있어야 말이죠. 어차피 부하들에게 물어봐도 모를 건 마찬가지고.”

발커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설령 그 말대로라 해도, 임무가 끝나고 황궁에 복귀한 후 레밍을 찾아가면 됐을 텐데. 궁색한 변명이다.

‘…하긴, 기사에게 그런 사소한 궁금증 따위 복귀하면 금방 잊어버려도 상관없었겠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왜 이 길에 ‘왕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냐면, 지금 이 길이 건국왕 브륀할트 1세의 진군로였기 때문이죠. 선페일 지역까지 왕국의 영역으로 놓은 후, 진군로를 따라 도로가 닦인 거고요.”

“…아, 그래서, 동에서 서로 뻗은 길은 ‘황제의 길’인가? 제국이 된 후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도로라서?”

아렌에게 사정을 들은 후 혼자서 납득하는 발커스.

건국왕 브륀할트 1세는 북쪽 끝, 얼어붙은 산맥까지 진군했다.

정착민도 거의 없이, 춥고 척박한 황무지나 다름없던 곳까지 영토로 삼아놓아 당시의 세오덴 왕국은 세로로 길쭉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왜 그 당시 비옥한 동과 서, 남쪽이 아닌 척박한 북쪽으로 넓혀갔는지는 불명이다.

확실한 건 그가 선페일 지역을 점령한 후부터 그의 참모, 현자 솔티르가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현자 솔티르의 유례없는 선견지명에 의해 대륙 중앙의 신생 소국에 불과했던 셰오덴 제국은, 탄생 초기부터 이미 제국으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 갈고닦았다.

“…아무튼, 매번 지날 때마다 참 을씨년스러운 길이에요.”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썰렁한 광경에 발커스가 한 소리 했다.

그야말로 대군도 지날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잘 관리된 길이었지만,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작은 마차를 이끈 행상인 한둘만이 있을 뿐. 그것조차도 훨씬 부유하고 장사가 잘되는 동부와 서부, 남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만큼 북부에서의 은광산 발견은 호재지. 그걸 계기로 북부의 상공업이 발달할지도 모르니까.’

발커스의 말은 단지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아렌 역시도 묘하게 그 부분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제국은 왜 북쪽으로 진출한 거지?’

도서관의 거의 모든 책을 읽은 레밍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북쪽으로 진출한 이유를 물어봐야겠다고, 아렌은 다짐했다.

“자, 슬슬 속도를 올리죠. 오늘 묵어가려 한 마을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타린은 속력을 올렸고, 그 뒤를 따라 열 명의 말을 탄 남자들이 단단한 관도 위를 질주했다.

북으로 곧게 뻗은 왕의 길에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얼마나 달렸을까. 말 위에 탄 아렌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드리웠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낮게 깔린 석양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지만, 앞으로 한시간만 지나면 주변은 완연한 어둠에 휩싸일 것이다.

“서두른 보람이 있군요. 묵어가려던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하룻밤은 이곳에서 보내도록 하지요.”

타린은 왕의 길에서 왼쪽으로 뻗은 샛길로 이동했다.

마차 세 대도 너끈히 지날 수 있을 만한 넓은 길은, 곳곳에서 연결된 작은 샛길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샛길 중 하나에 아렌 일행이 오늘 묵어갈 마을이 있었다.

혈관으로 치면 왕의 길 동맥, 여타 다른 마을들과 연결된 곳은 실핏줄이라 불릴 만하다.

다행히 수도에서 북부로 향하는 길은 왕래가 그다지 활발하지도 않아서, 여관의 남은 방은 충분했다. 예약도 없이 열한 명의 남자와 말들을 수용할 만큼.

타린은 3명이 한 방을 쓰도록 총 4개의 방을 잡았고, 배려 차원에서 아렌과 발커스에게 한 방을 쓰게 했다.

‘지금이군.’

여행 중 발커스에게 타린을 멀리하게 하기에는 지금이 최적기였다.

“후, 오늘이 아렌 공에겐 조금 버거웠을지도 모르군요. 저만한 속보로 계속 달려오기만 했으니.”

“아뇨,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그보다 발커스가 보기에 타린 공은 어때요?”

“…어떠냐니, 글쎄요? 조금 깔끔떨긴 하던데, 그것 말고는 관리치고 괜찮지 않나요? 조금 소름끼쳐하긴 했지만, 위병 둘과 한 방에 묵는 것도 순순히 허락한 걸 보면 말이죠.”

확실히 황제의 임무로 시작된 여정이라 여비는 충분할 것이다.

자신만의 개인방을 따로 잡는 것도 그리 낭비는 아닐 텐데, 타린은 비용을 아끼는 길을 택했다.

‘관도 위를 달려서 별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밖에서 한 시간은 물을 끼얹고 있긴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발커스에게 이야기할 타이밍이었다.

“사실 이건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인데, 타린과 너무 붙어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죠? 딱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는데요.”

“물론 타린 공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단지 둘의 궁합이 너무 좋지 않을 뿐이죠. 둘이 같이 다니면, 언제고 둘 중 하나는 피해를 입을 거에요.”

“피해라면, 어떤 피해죠?”

“글쎄요? 정신적인 피해일 수도, 조금 더 직접적인 피해일 수도 있어요. 뭐가 됐건 방지하는 방법은 되도록 멀리하라는 것밖에는 저도 몰라요.”

“…흠.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렌 공의 말이라면 아마 맞겠죠.”

아렌은 그간 발커스에게도 단말들 만큼이나 자주 점괘를 제공하면서, 완전히 아렌을 믿도록 했다.

그간 아렌의 점괘가 용하다는 ‘착각’을 여러 겹 쌓아 올린 발커스에게 아렌의 말은 곧 진리나 마찬가지.

타린에게 이번 임무가 이중 임무이듯이, 아렌 역시 신경써야 할 곳은 두 곳이었다.

태양교의 본거지로 가 놈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 하나와 자기 자신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타린의 눈을 속여넘길 것.

똑똑.

마침 방 밖에 있던 위병 하나가 문을 두드리곤 방 밖에서 말했다.

“조사관 타린 공이 발커스 경과 아렌 공을 부르십니다.”

“…타린 공이?”

“이제야 다 씻은 모양이군. 그럼 가볼까요, 발커스 경?”

손님이라곤 없는 여관의 홀 안을 독차지하듯 앉아있는 타린.

입은 옷도 여행 중의 옷이 아니라 숙소에서만 입을 새 옷인 듯했다.

발커스는 타린이 왜 불렀는지 짐작도 안가는 모양이었지만, 아렌은 대강 알 것 같았다.

“두 분이 오셨군요. 오늘 하루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마 내일도 오늘만큼은 달려야 할 테지만요.”

그리고 타린은 본론을 꺼냈다.

“실은, 앞으로 하루 이틀 여행할 것도 아닌 만큼 일행 중 누군가가 여행을 인솔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이 일행에는 지위가 엇비슷한 사람이 세 사람은 있다.

황제에게 직접 명 받은 조사관이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그리 높지 않은 조사관 타린.

황자 직속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발커스.

그리고 황자의 비서관이면서 다른 명성도 겸비한 아렌까지.

타린은 발커스에게 더욱 신경쓰며 말했다.

“발커스 경은 여행 경험이 많으시죠. 어떻습니까, 발커스 경.”

“…글쎄요. 전 아렌 공이 정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네?”

“그게 제 대답입니다. 나머지는 아렌 공에게 물으십시오.”

‘…뭐지?’

발커스의 태도에서, 타린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발커스 경과 아렌 공의 지위가 엇비슷한 만큼, 경력도 있고 밖에서의 경험도 많은 발커스 경이 더 우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뿐만 아니라, 타린은 발커스가 자신과의 대화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는 기색마저도 느꼈다.

여정 초기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조금 흥미를 느끼며, 타린은 아렌에게 물었다.

“그럼, 발커스 경이 전권을 위임한 아렌 공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물론, 이번 여정에서 전 타린 공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를 겁니다.”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린이 바라고, 의도한 대답이었지만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시원하게 떨어졌다.

외부 경험이 많고 기사단장이기까지 한 발커스와 분명 지난한 기싸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아렌은 지금 굳이 타린과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제가 이번 여정에서 맡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타린 공의 임무를 보조하는 것이죠. 제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타린 공을 돕겠습니다.”

“그거, 정말 든든하군요.”

“아뇨. 전 아직 어린데다 능력도 변변찮아서, 실은 별 도움 안될 겁니다. 능력이 있다면 보잘 것 없는 점술뿐이죠. -아.”

아렌은 방금 막 생각난 것처럼 타린에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점을 봐드려도 될까요? 이번 임무가 잘 진행될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점괘라. 그럴까요?”

타린은 곧바로 수긍하는 듯했지만, 바로 직전의 일말의 망설임을 아렌은 놓치지 않았다.

‘경험상 과하게 꼼꼼하고 강박적인 사람일수록 점괘를 덜 믿었지. 타린도 같은 부류일지도.’

그런 유형을 믿게 하려면 우선 과거사나 버릇 등을 족집게처럼 맞춰가며 실력을 확신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아렌은 장소를 바꿔 발커스와 함께 쓰는 방으로 타린을 불러들였다.

타린은 점괘 따위 믿지 않지만, 앞으로 오랫동안 동행해야 할 아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 타린이라는 조사관이 죽었다는 사실이나 겨우 알았을 뿐, 생판 모르는 타인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황제의 조사관을 맡을 정도의 사람이야. 추리로 쉽게 알 만한 내용을 점괘로 내놔봤자 빈축을 살 뿐이겠지.’

아렌은 카드를 이리저리 섞고 세 장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타린은 소문대로의 점괘가 어떤 것인지 마치 두고 보자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카드는 각각 부러진 붓, 땅에 흩어진 깃털, 무너지는 탑이었다.

“이건, ‘붓을 꺾은 도화가’ 카드입니다. 예외없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정망에 의한 포기를 의미하기도 하죠.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는 두세 번째 카드에 따라 달렸습니다.”

“그렇군요.”

“전체적으로 해석했을 때, 어떤 강박을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남들보다 유난한 무언가 말입니다.”

“…네.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외람된 말일 수도 있지만, 아렌 공께서도 점을 보기 전에 미리 알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아렌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던 타린.

그 생각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보기에 그릇된 말과 행동을 정정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성정일 뿐.

이대로 오래 대화하며 타린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헤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이라면 오히려 꼬치꼬치 캐묻는 아렌에게 반감을 가질 것이고, 아렌에 대한 의심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

‘타린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이렇게 다가오는군. …참, 아니지.’

그러고 보면 아렌은 타린에 대해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건 조금 걸러 들으셔야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 무슨 말을 들어도 크게 영향 안 받으니까요.”

‘원래 점괘를 안 믿는다’라는 말을 돌려서 말한 타린.

하지만, 이어진 아렌의 말에는 역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군요. 점괘에 따르면 타린 공은 이번 여정 도중에 죽을 수도 있거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