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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1화 (71/227)

#071화

레온나토스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렸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니,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북부로 간다고?”

“네. 수사관과 함께 선페일 지역으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아마 수사관이 알려주겠지요.”

황제의 서신이 남아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서신은 이미 아렌이 불태운 상태.

물론 아렌은 레온나토스에게만 서신을 전달했고, 레온이 그 진위를 확인하는 것도 쉬운 일이니 그리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제가 선페일 지역으로 향한다는 건 밖에는 비밀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굳이 낙일관 안까지 들어와 서신으로 내용을 전달한 건, 밖에다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요.”

물론 아렌이 동네방네 소리치며 떠들어대도 황제는 별말을 못 할 것이다.

함구하는 것이 필수라면 분명 서신에도 그리 적었을 테니까.

말하자면, 이건 아렌이 어떻게 하느냐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굳이 몰래 보낸 서신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다면 그 의도대로 따르는지 아닌지 가늠해 보겠다는 건가?’

“하지만 아렌, 그 내용을 함구하는 게 의미 있을까? 황궁의 조사관이 선페일로 향하고, 같은 시기에 너도 황궁을 떠난다면 누구든 눈치챌 텐데.”

“그래봤자 확답이 없는 이상 추측일 뿐이고. 추측은 얼버무릴 수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선페일 지역의 은광산을 얻습니다. 모험할 가치는 충분하지요.”

“은광산이라. 확실히 거절하기는 너무 큰 유혹이지. 사못 지나칠 정도로.”

수사관의 여정에 동행해 수사에 협조하고, 그 활약이 뛰어나면 은광산 하나를 10년간 대여한다는 건, 확실히 대가치고는 지나치다.

‘아마도, 내 역량을 파악해두고 싶은 거겠지.’

아무리 황제라도 지금 아렌이 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렌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음은 알고 있을 터.

누군가를 대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아렌. 차라리 나도 함께 선페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나도 고드프리 형님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그건, 안됩니다.”

“…어째서지?”

“저 혼자 선페일 지역으로 향하는 건, 설령 들킨다고 하더라도 황제 폐하가 저를 ‘빌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향한다면 여정을 숨길 수 없을뿐더러, 황제의 총애로 비쳐 괜한 견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레온나토스에게 은광산 하나를 대여해준다는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렌, 네가 그리 말한다면 하는 수 없겠지. 고드프리 형님에겐 잘 말해주게. 혹시 가신 중 데려가고픈 자들이 있나?”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수많은 가신 중에서도 최측근이었다. 아렌이 요청한다면, 설령 근위 기사라도 붙여줄 생각이 있었다.

음, 아렌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다 말했다.

“-없는데요?”

*****

멜로익은 5년 전 아티스 원정을 떠올렸는지 이번에야말로 따라가려 했지만, 아렌이 뜯어말렸다.

“단념해, 멜로익. 선페일까지는 먼 거리야. 이번엔 마차도 없이 말을 타고 갈 거거든?”

“나도 말 탈 수 있는데?”

“그렇겠지. 그런데, 말을 탈 줄 아는 시녀라고? 그거참 눈에 안 띄겠네.”

“…….”

자신이 없는 곳에서 아렌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게 못내 못마땅한 멜로익이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는 쉽게 단념했다.

신뢰할만한 인물이 아렌의 여행에 자진해서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발커스?”

아직 동도 트기 전의 이른 새벽.

황궁 외곽의 궁문 앞.

네 명의 낮 안개 기사단과 함께 기사단장 발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타지에 나가면, 아렌 공 혼자 심심해서 어떡해요? 나라도 말동무가 되어줘야지.”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요?”

“아, 그러니 내가 따라 나왔잖아요. 그동안 크고 작은 임무들을 해치웠으니 궁 바깥의 사정은 아렌 공보다 빠삭할걸?”

“그럼 전하의 호위는요?”

“기사단이야 부단장이 있고, 더글라스 경까지 있으니 걱정할 건 없죠.”

하지만 여전히 발커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정 걱정된다 해도 기사들 몇 명을 붙여주면 그만.

“계속 궁에 있어서 답답했는데, 이참에 바람도 쐬고 좋지 뭐. 안 그래요?”

그렇게 너스레를 떤 발커스였지만, 아렌은 그 내면에 가라앉아있는 죄책감을 읽었다.

‘…설마 아직도 그때 일을 신경 쓰는 건가?’

아티스의 오래된 왕궁에서, 아렌을 미끼삼아 혼자 떠나보냈던 기억.

레온나토스에게는 호위해야 할 대상에게 호위 당했다며 질책당했고, 스스로도 굉장히 자책했었다.

그 후 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발커스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흠. 그때의 죄책감으로 경호를 더 잘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아렌과 발커스, 기사들은 황궁의 성문을 나왔다.

아렌으로선 실로 오랜만에 보는 황궁 밖의 풍경.

황도의 거리는 이른 아침인데도 분주했다.

거리를 조금 걸었을 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렌 공.”

궁문 조금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사관 타린이었다.

그도 네 명의 동행과 함께였는데,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묘하게 절도있는 동작으로 보아 황궁 위병들인 듯했다.

“다행이군요. 혹시 말을 잘 못 타시면 어쩌나 했는데.”

“5년 전 동부 국경에 갔다 왔었죠.”

듣기에 따라 그때 그곳에서 배웠다고도, 그곳에 다녀온 뒤 필요성을 느껴 나중에 배웠다고도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때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 없겠지.’

하지만 거기서, 발커스는 한마디 더 거들었다.

“그뿐 아니죠. 아렌 공은 유랑족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말을 아주 잘 타셨죠.”

“호오, 유랑족 출신이라. 그때는 열 살이셨을 텐데.”

타린의 눈이 반짝였고, 아렌은 서둘러 말 고삐를 고쳐잡았다.

“아, 이만 가 볼까요?”

곧게 뻗은 도로를 잰걸음으로 달려가며 아렌은 생각했다.

방금 발커스의 말은 불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타린의 반응이 시사하는 것이 있었다.

‘난 타린에게 그저 동행일 뿐인데, 꽤나 관심이 많단 말이지.’

태양교의 본거지, 선페일 지역에 조사관을 파견하는 건 태양교를 완전히 파헤치겠다는 말.

사자의 입안으로 들어가 생니를 뽑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고작 호위가 위병 넷이 전부인 이유는 간단했다.

‘조사관이 죽기라도 하면, 그 명분으로 군을 보내겠다?’

그리고 그런 곳에 황자의 비서관을 동행시킨다.

‘…시험하는 건, 내 역량만이 아니군.’

시험하는 건, 아렌의 의중이기도 한 듯했다.

황제의 부탁에 따라 먼 곳으로의 출장도 기꺼이 하는가.

그곳에서의 위험에도 돌아오지 않고 임무에 책임감 있게 대하는가.

황실과 멀리 떨어져 있고 권위에 도전한 자들의 앞마당에서, 다른 속셈이 있지는 않은가.

‘황궁 밖, 내 본거지가 아닌 곳으로 떨어뜨려 놓은 뒤 심중을 가늠하려는 건가?’

수사관 타린의 목적은 둘로 가늠하면 될 것 같았다.

첫 번째, 태양교의 총본산에서 어떤 비리가 있었는가.

두 번째, 황자의 비서관 아렌의 능력은 어디까지이며, 그 의도는 무엇인가.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하지만 아렌은 황제의 의도에 기꺼이 걸려들었다.

속으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건, 황제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번 여정에서 타린은 죽어. 그걸 빌미로 태양교는 멸망하다시피 하지.’

아렌의 음모로 인해 1년 정도 예정이 앞당겨졌지만, 아렌은 태양교가 타린을 죽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아렌의 부채질이 있었다지만 지엄한 황궁 안에서 살인을 결심한 자들이었다.

그전에 설계한 음모들까지 생각하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모한 짓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자들.

‘…타린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까, 살리는 게 나을까.’

동행하는 타린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곧, 자신의 목숨 역시 노려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아렌은 그것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

위병 넷과 조사관 타린, 기사들 다섯과 아렌까지 모두 열한 명의 말을 탄 남자들은 금방 황도를 벗어나 북쪽을 향해 곧게 뻗은 관도 위에 올라탔다.

바닥에 넓고 평평한 돌을 깔아 꾸준히 관리되고 있는 관도는, 대륙을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한 번씩 가로지르는 동맥과도 같았다.

지속적으로 관리되는 길이기에 도로 상태가 좋은 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자, 여기서부터면 조금 긴장 풀고 다녀도 될 겁니다. 감히 제국의 관도위에서 도적질을 할 만큼 간 큰 자들은 없을 테니까요.”

지난 5년간 레온나토스의 이름으로 외부 임무를 많이 다녀온 발커스가 익숙한 티를 냈다.

“역시 발커스 경은 외부 임무에 익숙하신 듯하군요. 물론 고명하신 발커스 경께서 동행해주시니, 도적놈들 걱정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긴 해도, 그렇게 직접 말하시면 제 낯이 뜨겁습니다. 하하핫!”

타린의 치하에 발커스의 입은 귀에 찢어질 듯 걸렸다.

‘…발커스에게 타린을 멀리하라는 점괘라도 줘야겠군. 나중에.’

타린의 임무에는 아렌을 조사하고 감시하는 것도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아렌이 조심해도, 타린이 발커스를 통해 정보를 빼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

“사실은 아렌 공께서 오시면서 조금 걱정을 했거든요. 위병들이 있고, 저도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됩니다만 아렌 공까지 지킬 만큼인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 말이죠.”

“조사관께서도 참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저래 보여도 아렌 공은 어릴 적부터 더글라스 경에게 제대로 검을 배웠거든요. 성 밖의 산적들 정도는 아렌 공의 상대가 안 되지요.”

“허어, 그렇습니까? 아렌 공이 검도 잘 쓰신다고요?”

타린의 시선이 아렌의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에 머물렀다.

먼 곳을 여행하니 장검 한 자루쯤 위협이나 장식의 용도로 차는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전혀 검을 잘 쓰지 못할 것 같은 자가 검을 쓸 수 있다고 하니, 조금 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

‘…나중이란 말은 취소. 오늘이라도 당장.’

저 입에서 터진 둑처럼 온갖 정보들을 줄줄 읊어대기 전에, 아렌은 다짐했다.

*****

“…후, 아렌 녀석이 떠났군.”

레온나토스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렌을 가신으로 들인 이후, 아렌이 자신의 곁을 오래 떠나있던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렌을 꽤나 많이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렌이 없다고 그저 황궁에서 멍하니 있을 수는 없다. 당장, 제국과 교국 사이의 전쟁을 의도한 자도 찾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태양교와 교국이 물러나자마자 범인을 찾는 움직임도 뜸해졌단 말이야.’

마치, 범인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이.

“설마… 태양교의 죽은 사제. 그자가 범인이었나? 그렇다면 아렌이 그곳에 가는 이유는-”

혼자 남은 레온나토스는 자기 혼자 착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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