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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70화 (70/227)

#070화

교국의 사절단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태양교와 달리 교국의 사절단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황궁 안에 묘한 기류를 만들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황궁은 평소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가웨인이 날 불렀단 말이야.’

가웨인의 호출.

레온나토스가 맡긴 업무를 핑계삼아 미룰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아렌이 보여준 모습들이 너무 많았다.

레온나토스 없이 이곳저곳 다닌 행적이 있는데, 갑자기 바쁘다는 핑계를 대봤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왠지 불안하단 말이지.’

그래서, 아렌은 황자의 근위기사 더글라스를 대동했다.

“오, 아렌. 요즘 오랜만이었다, 그렇지? 밖을 엄청 쏘다녔다면서?”

“…확실히 눈치 안 보고 다니긴 했지.”

태양교와 교국까지 들어오고, 몰디나에 호전광까지.

엮인 것이 많은 만큼 아렌은 이리저리 다니며 할 것이 많았다.

‘그 벌을 받는 건가?’

덕분에 가웨인의 호출을 거절도 못 한 채 불려갔다.

공교롭게도 가웨인이 지정한 장소는, 전에 아렌이 회담 장소로 삼은 수국 정원.

그리고, 태양교의 수신관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정원 중앙에는 이미 가웨인과 그의 비서관 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가웨인 전하.”

“왔군, 아렌. 그리고 더글라스 경. 간만이군.”

가웨인은 각설하고 말했다.

“어젯밤, 몰디나가 궁을 떠나겠다더군. 몰디나는 한참 전에 벌써 이야기했다던데, 난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

‘아, 그거였구나.’

둘 사이에 뭔가 엇나간다는 건 아렌도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것이었을 줄은 몰랐지만.

가웨인에 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하니만큼, 그녀로선 고용을 파기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별일은 없었겠지만.’

아렌은 가웨인을 둘러싼 소문이 의도적으로 과장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몰디나는, 앞으로의 거취는 이제부터 생각해 본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이미 한참 전에 알고 있었던 일이다. 부추긴 당사자가 다름 아닌 아렌이기에, 그런 애매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렌을 바라보는 가웨인의 눈이 빛났다.

“아렌, 너도 알고 있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가웨인이 본능적으로 가졌던 의구심을 아렌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놨었다.

하지만 그 한 축이었던 몰디나가 없어지자, 나시 가웨인의 감은 아렌을 향한 듯했다.

“최근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서, 누군가 계속 수를 쓰고 있었다 치자고. 그럼 누가 가장 이득을 봤을까.”

“…….”

“태양교와 아트마 교, 두 교단이 황궁에 들렀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갔지. 전쟁을 조장한 범인이 잡힌 것도 아니고, 두 나라 간 화친의 확답을 받아낸 것도 아니야. 그리고, 몰디나로 네놈의 점술을 대체할 수도 없었지.”

가웨인으로서는 무언가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 기분일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나와 테오드릭 녀석이 범인으로 몰렸고, 그 사이에서 가장 이득을 본 건 레온나토스, 그 녀석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곳의 회담도 정말 점괘 때문에 이뤄졌는지 알 수 없지.”

‘가웨인도 알아차렸군. 이미 늦었지만.’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무언가가 의심가신다면, 저보다는 레온나토스 전하를 부르시는게 이치에 맞지 않은가 합니다.”

“…흥, 글쎄?”

가웨인은 마치 늑대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전까지만 해도 난 테오드릭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네놈이 범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레온나토스 전하가 아니라, 저 말씀이십니까?”

“레온나토스는 이런 음습한 류의 짓거리를 하진 않겠지. 네놈의 손이 탔다면, 분명 자세한 내용은 모를 거다.”

“그거, 그럴듯한 가설이군요.”

아렌이 흑막이라는 가웨인의 말 자체는 완벽한 정답이었지만, 가웨인도 설마 그렇게 확신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의심하고 있을 뿐, 아렌의반응을 반응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일 뿐이다.

‘가웨인은 여러모로 수세에 몰렸어.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런 위협 정도겠지.’

대부분 가웨인의 분노를 날것으로 맞닥뜨린다면, 위축될 것이다.

하지만 아렌에게는 오히려 호재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작 날 불러 윽박지를 뿐이라. 당분간 가웨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앞으로 정기적으로 낙일관을 개방한다는 말을 들었다. 뜻대로 되나 지켜보도록 하지.”

“전하께서 염려해주시니 망극합니다. 전하께서도 꼭 방문해 주시지요.”

“…….”

가웨인의 은근한 압박에, 아렌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

일주일에 한 번, 낙일관을 개방하는 날이 밝았다.

비록 이제 기다리는 사람은 적다지만, 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루는 꼬박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낙일관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상황. 그러고도 번호표는 금방 동이 나, 순번이 한 달 이후까지 밀린 사람도 흔했다.

‘역시 약간이라도 복채를 받는 편이 나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붐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성안의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고 비쳐서는 안되니까.’

20분에 한 명씩, 황궁 안 갖은 곳의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의 고민을 말했다.

황궁 도서관의 말단 사서.

온갖 귀족들의 말을 다루는 마부장.

더글라스의 상관이었던 황궁 경비대장.

그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 아렌은 황궁 안의 일에 조금 더 훤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오고 간 후, 한 명의 시동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 주방의 허드렛일을 돕는 시동이었다.

“이것, 받으시지요.”

그는 아렌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오직 눈을 숨긴 채로 그대로 있었다.

[연락책. -팔찌의 주인-]

‘…흥. 아르테로군.’

아렌은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가 교국에서 심어둔 밀정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아렌은 내용을 읽어 필요 없어진 서신을 촛불 위에 올렸다.

쪽지는 서서히 타올라, 고운 재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낙일관을 방문했다.

아라흐네나 세리엔, 테오드릭 같이 밖에서 따로 이야기 나누면 구설에 휘말릴만한 자들이라도, 아렌의 점술관이 성행인 동안만큼은 큰 의심 사지 않고 방문할 수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유용한 듯해, 아렌은 퍽 만족스러웠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때 낙일관 밖에서 물시계에 연결된 종이 울렸고, 다음번 손님이 들어왔다.

아렌이 본 적 없는,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남자.

일반적인 하인이나 위병이라면 나름의 제복이 있겠지만, 짙은 청색의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는 것 말고는 지위를 짐작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아렌이 얼굴을 모르는 만큼 자신보다는 지위가 낮은 자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점술가와 손님의 입장이다.

아렌은 존대를 유지했다.

‘어느 귀족이나, 황족의 하인쯤 되나? 잘하면 은밀한 속사정을 들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남자는 점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온 것은, 제 점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응?’

남자는 품 안에서 서신이 밀봉된 봉투를 한 장 꺼냈다.

“이것을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

반신반의하며 편지를 받아든 아렌.

그리고, 아렌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접촉하고 싶은 사람들은, 나와 연이 닿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설령 초면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낙일관을 통하면 쉽게 접촉할 수 있다.

아렌은 쪽지를 받아들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쪽지인데.’

그리고 서신이 든 봉투에는, 황제의 문양이 인장으로 찍혀 있었다.

“-이건.”

“전 전달을 맡았을 뿐, 아무런 사실도 모릅니다.”

아렌은 밀봉을 뜯고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이건, 거절하기 힘들겠는데.’

황제의 칙서는 말하자면 제안이었다.

곧 자신의 조사관을 선페일 지역에 보낼 텐데, 거기에 동행해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아렌에게 별로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황궁을 떠나있는 기간이 꽤 될뿐더러, 선페일 지방은 아렌에게 적대적인 태양교와 고드프리의 본거지다.

하지만 뒷부분을 읽고나니 아렌은 차마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사관과 협의해 태양교의 비리를 조사한 후 논의할 것. 승낙한다면 교로부터 양도받을 세 개의 은광산 중 하나를 레온나토스에게 10년간 대여한다.]

이미, 황제는 태양교를 유죄로 결정지은 후 그들의 은광산까지 가져오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사실상 약한 죄는 부풀리고, 없는 죄는 만들라는 말과 마찬가지.

‘수고는 덜겠군. 태양교의 비리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의 보상.

가웨인이 테오드릭과 엮이며 잠시 주춤한 동안 한층 더 입지가 올라간 레온나토스에게, 은광산의 수입까지 흘러들어간다면.

황자가 연립하지 않고서는 대응할 수 없는 초거대 계파가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아렌은 황제의 서신을 망설임없이 촛불에 태웠다.

황제의 친필이 적힌 쪽지를 서슴없이 태우는 아렌을 보고 서신을 가져온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불태우는 것입니까?”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 종이가 다른 이의 눈에 띄는 것이 더 문제지요.”

다른 이들에겐 평생 간직해야 할 가보가 될지도 모르지만, 아렌에겐 괜히 꼬리를 밟힐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가 이런 허례허식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렌의 행동이 남자에게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과연, 왜 폐하께서 황자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여기로 보내셨는지 알 것 같군요.”

“…실례지만, 혹시 성함이나 직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하는 말로 보아, 그저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는 역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는 앉은 채 예를 갖추며 말했다.

“타린 알레시오라 합니다. 이번에 새로이 황궁 수석 수사관을 맡게 되었지요.”

‘…그렇군.’

“잘 부탁드립니다, 타린 공.”

아렌은 아직 어린 손을 내밀었고, 타린은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장갑을 벗었다.

상대의 악수에 장갑을 끼고 응하는 건 실례되는 일이었으니까.

‘꽤나 꺼림칙해 하는군. 맨손끼리 접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나? 간혹 이런 사람이 있긴 하지만.’

타린은 결벽증이 있으면서도 아렌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잘 부탁드린다니요.”

“그저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동행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호오, 그건 점술가로서의 의견입니까.”

“…그럴지도요.”

타린의 앞에서 카드 한장도 들춰보지 않았지만, 아렌은 그와 같이 선페일로 가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렌의 기억이 맞다면, 타린 알레시오는 첫 번째 삶에서 선페일 지역으로 파견되는 수사관이었다.

아렌이 자신과 별 접점도 없던 일개 수사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타린 알레시오는, 파견된 선페일 영지에서 죽어. 그것이 더욱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되지. 이번 생에서도 그럴까?’

아렌과 악수한 후 허겁지겁 장갑을 끼는 타린을 보면서 아렌의 생각은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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