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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69화 (69/227)

#069화

처음 황궁에 들어올 때 마치 승전한 장군처럼 의기양양했던 태양교는, 패장의 퇴장처럼 쓸쓸하게 황궁을 빠져나갔다.

황궁과 전속으로 맺으려던 은광석 계약도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제국으로선 상관없었다.

제국은 당분간 교국과의 계약을 그대로 이어갈 것이고, 또 태양교의 약점도 손에 쥐었으니까.

“흐음, 그렇단 말이죠.”

아렌의 낙일관에서 설명을 듣던 아트마 교국의 주교, 아르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제께선 얼마 전 우리 인솔관을 데려가 말씀하셨어요. 교국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의 마찰은 피하되, 거래는 그대로 유지했으면 한다고. 물론 저도 찬성이에요. 대주교님께 말씀드려봐야겠지만, 제국과의 마찰은 교국으로서도 피하고 싶을 테죠.”

“그럼,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르테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건 아렌에게 좋은 일이다.

그녀를 곁에 두는 건, 결코 심장에 좋지 않으니까.

설령 아르테가 아렌의 마음속까지는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황궁 안의 온갖 비밀을 파헤치도록 놔두는 건 그리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네. 아마 사나흘 후겠죠. 제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밀정을 통해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지금처럼 이따금 낙일관을 개방하고, 점을 보려는 사람들 사이에 밀정이 끼어 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아, 그래요? 아렌이 좋다면 다행이지만….”

“왜 그래요?”

“…이곳을 개방하고 점을 봐주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 같긴 하지만, 아렌 가까이에 불만인 사람들이 있던데요? 주로 여자들이지만.”

“주로 여자들이? …아.”

“역시 짐작가는 게 있나 봐요?”

아렌이 점술을 미끼로 정보를 얻어내던 말단 시종들에겐, 낙일관의 개방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레온나토스의 비밀호위였으면서 지금은 아렌을 지켜주는 암살시종 멜로익.

‘황제의 눈’ 소속이자 테오드릭 황자의 시녀이기도 한 아라흐네.

황실 깊은 곳의 정보를 의심 없이 빼 올 수 있는 황녀 세리엔.

모두 아렌이 점괘를 통해 회유한 자들이었다.

‘아렌의 점은 아무나 볼 수 없다.’라는 특별함이 있어야 점술로 그녀들을 회유할 수 있다. 요일에 맞춰 아무나 점을 볼 수 있다면, 굳이 위험하게 정보를 맞교환할 이유가 없다.

“그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기적으로 낙일관을 개방할 테니, 밀정이든 뭐든 들여보내세요.”

“뭔가 방법이라도 있나 보죠?”

‘…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는데.’

미끼가 더이상 그녀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면, 다음 취할 행동은 간단하다.

‘더 맛있는 다른 먹이를 제공하면 그만이지.’

*****

소수의 사람들만 간간이 드나들었던 낙일관이, 다시금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은 없었다.

아라흐네는 아렌이 미리 건내준 쪽지를 꼭 쥔채 낙일관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부르니까 오긴 했어요. 그런데, 왜 여기로 부른 거예요?”

아라흐네가 쥐고 있는 쪽지는 번호표였다.

첫 번째 낙일관을 개방했을 때, 줄을 섰음에도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선 입장할 수 있는 번호표를 지급했고, 그중 뒷번호를 아라흐네에게 배정했다.

그리고, 먼젓번처럼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들지 않도록 아렌은 더 손을 썼다.

낙일관 건물 입구 앞에는 거대한 칠판과 물시계가 놓여 있었다.

큰 저울 양쪽에 물 양동이가 놓인 듯한 구조의 물시계는, 물이 차고 기울면서 대략 20분에 한 번 중앙의 종을 치는 구조였다.

그리고 한번 종을 칠 때마다 칠판에는 숫자가 적힌다.

이제는 먼저 번호표를 받아든 다음, 적당한 시간대쯤 미리 기다리다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번호표와 물시계, 어때?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방법 같은데.”

“그거 자랑하러 부른 거예요? 그럼 용건 끝난 것 같은데 그만 가봐도 되나요?”

역시, 아라흐네의 태도가 예전만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예전이라면 아렌의 점을 보기 위해서라도 깍듯이 대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번호표를 받기만 하면 아렌의 점괘를 받아볼 수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 아렌에ᅟᅦᆨ 복채를 주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따로 복채를 주지는 않잖아요?”

“아, 그래? 너한테만 복채를 받아내는 수도 있는데. 복채를 안 주면, 점괘도 봐주지 않을 수도 있지.”

“그건-”

아라흐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물론, 난 그러지 않을 거지만.”

“…놀리지 말라고요, 씨이.”

아렌은 우선 아라흐네의 얼굴에 금칠을 했다.

“아라흐네, 넌 ‘황제의 눈’에 들어갈 정도로 양질의 정보를 얻고, 그걸 판별할 눈을 가지고 있어. 거기에 테오드릭 전하의 전속 시녀이기도 하지.”

“…….”

‘테오드릭’의 이름에 아라흐네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렌과 테오드릭의 동맹은 바로 이곳, 낙일관에서 일어난 일.

그녀조차도 아렌과 테오드릭이 비밀동맹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좋아. 좋은 정보를 얻었군.’

“그러니, 내겐 여전히 네 정보가 필요해. 물론 이제 내 점술로는 네 성에 차지 않겠지.”

“날 아시네요.”

“…그런데 말야. 최근, 주변에서 뭔가 꺼림칙한 일이 일어나곤 하지 않았어?”

“꺼림칙한 일?”

“가령 별일도 아닌데 괜히 불호령을 받았다거나, 어깨가 이상하게 결린다거나, 예전이면 잘 되었을 일도 이상하게 잘 안 풀린다거나-”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라흐네는 화색이 되어 달려들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최근 황궁 안의 기류가 뒤숭숭했고, 특히 테오드릭은 가신들과 함께 자신의 별궁 안에서만 칩거했으니 더더욱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액(厄)이 껴서 그래.”

“…액이요?”

하지만 원인을 모를 때 그럴듯한 말을 곁들이기만 하면, 단순한 불운도 훌륭한 흉조가 된다.

“그래. 액이라는 건 마치 때처럼 자연스레 끼이는 것이지. 내버려 두면 자연스레 씻기는 종류도 있지만, 어떤 건 액땜을 하기 전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어.”

“그, 그런 게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던 거죠?”

“왜냐하면, 더 번거로우니까. 내가 액땜과 액막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그걸 해달라는 사람이 훨씬 늘겠지.”

실은 이미 비슷한 액땜을 발커스에게 해본 적 있는 아렌이었다.

물론 아렌이 하는 액막이에 별다른 효과는 없다. 단지 그리 믿기에 효과가 있다 느끼는, 자기 암시일 뿐.

하지만 아렌은 이미 몇 번의 점술과 이름값으로 신뢰를 쌓아왔다.

아라흐네가 아렌을 믿을수록, 아렌의 ‘액땜’을 받고 아라흐네는 이전과 달라짐을 느낄 것이다.

‘…사실은, 가급적 액막이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액막이와 액땜을, 그저 귀찮기만 해서 지금껏 쓰지 않은 건 아니다.

만약 아렌에 의해 액막이를 했는데도 큰 불운이 닥친다면, 그건 오히려 점술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게 되기 때문이다.

‘기껏 마련한 단말이다. 특히 아라흐네만큼은 계속 곁에 둬야 해.’

황제의 눈 출신에다, 아렌과 비밀 동맹을 맺은 테오드릭의 시녀. 거기에 전생에 아렌과 연까지 맺었던 상대였다.

그야말로 단말로 만들어두기엔 최적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액땜을 해 주고, 액막이도 만들어 주지. 만일 효력이 괜찮으면 다시 찾아와. 참고로 효력은 일주일 정도고.”

“…낙일관을 여는 주기와 같네요?”

“잘 됐잖아? 이젠 번호표가 있으니 시간만 맞추면 기다리지 않아도 돼.”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들르라는 말이었다.

‘아라흐네는 거절하지 못하겠지. 미신이라면 죽고 못 사는 성격이니.’

아렌은 확신했다.

*****

아렌의 낙일관이, 앞으로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소문은 황궁 곳곳으로 퍼졌다.

그동안 흉흉한 소문밖에 없었던 황궁에서 드물게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아쉽네요. 이제 이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서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물시계까지 가져다 놨다고 들었어요. 꼭 보고 싶었는데.”

아르테는 낙일관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내심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뭐에요, 그쪽도 점술에 관심 있었어요?”

“사람 마음은 훤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볼 수 없는 미래가 궁금한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긴.’

운명석과 묶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신비로운 힘을 얻는다.

아렌은 자신의 능력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르테는 아렌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보는 것, 혹은 그에 따르는 능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귀신같은 적중률의 점괘를 쏟아내는 점술가 오히려 다른 경우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전, 교국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리고 언젠가 최고회의에 참가할 거고요.”

“네. 열심히 하세요.”

아렌의 덤덤한 말에 아르테가 더 열을 올렸다.

“이봐요. 교국에서 난, 신의 은총을 받은 신녀에요. 가까운 시일 내에 대주교에 오르는 것도 꿈은 아니라고요. 난 교국을 장악할 테니,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제국의 위에 올라가도록 해요. 지금 당신이 황자와 손을 잡은 것보다 몇십 배는 더 크고 유용한 동맹이 될 테니까.”

아렌에겐 아르테를 찍어내는 선택지가 있지만, 그녀에게도 같은 선택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렌은 그녀의 능력을 알지만, 그녀는 모른다. 아렌이 생각보다도 미래를 상세히 안다면, 그녀로서는 아렌에 대항할 수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쨌든, 조만간 연락이 갈 거에요. 그럼 이만.”

낙일관을 나가려는 아르테를 아렌이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그 운명석이라는 거, 대부분이 북쪽 미답지에서 흘러들어오는 거 맞죠?”

“…운명석이 각성하기 전에는 그저 다른 흑옥과 다르지 않으니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가 찾아본 문헌에서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얼어붙은 산맥 너머, 밟지 못하는 땅에서 흘러들어온다고.”

‘대체, 북쪽에 뭐가 있는 거지? 북쪽 지방이면 운명석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까?’

“그게 정 궁금하면, 탐험대라도 꾸려보던가요? ‘밟지 못하는 땅’에도 산맥 근처까지는 유랑족이 산다고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초입 부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르테는 낙일관을 나갔고, 곧 교국의 사절단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손님들로 잠시 시끄러웠던 황궁도 원래의 일상을 되찾을 터.

‘하지만, 완전히 끝맺지 않은 일둘이 있지.’

제국령 최북단, 얼어붙은 산맥과 영지를 맞대고 있는 선페일 지역.

그곳에는 태양교의 총본산과, 그곳에 몸을 의탁한 고드프리가 있었다.

그들은 황궁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황제 역시 전생에 그랬듯 그 뒤를 추격해 숨통을 조여갈 것이다.

마침 아렌과 황제의 목표가 일치했다.

‘황제 혼자서도 충분하겠지만, 한 손 거들고 싶단 말이지.’

고드프리와 태양교. 그리고 제국 최북단이라는 위치상 운명석의 정보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잘하면, 놈들이 가진 은광산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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