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아렌은 태양교 수신관 펠릭스를 낙일관으로 불러들였다.
‘태양교도가, 낙일(落日)관에 들어오다니. 웃긴 그림이야.’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할만큼, 아렌에게 이곳은 이제 어머니의 자궁보다도 아늑한 곳이었다.
설령 눈앞에 핏발이 날카롭게 선 광신도가 노려보고 있다고 해도.
“이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야기가 다르다니, 뭐가 말입니까?”
“가웨인 전하와 당신, 그리고 본 교단은 한 배를 탄 동지 아닙니까? 왜 가웨인 전하에게 그런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너무 서두르시는군요. 저도 아직 그분께 제 의견을 전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술래잡기 편을 짜듯 그리 쉽게 뭉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설마, 우릴 좋을 대로만 써먹고 내쳐버릴 셈은 아니겠지요!”
‘아니, 써먹지도 않고 버릴 셈인데.’
당초 계획은 가웨인과 태양교, 둘 사이의 오해를 점점 키워 양패구상시킬 예정이었으니, 저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니다.
잘만 된다면 가웨인은 전쟁을 도모한 범인으로, 태양교는 그런 가웨인을 부추긴 세력으로 몰아 서로를 공격하게 몰고 갈 수도 있었다.
물론 둘의 사이에 아렌도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아렌이 말해준 건 점괘의 내용뿐이다.
수신관 펠릭스가 아렌의 점괘를 듣고 멋대로 확대해석했다는 식으로 변호하면 못 빠져나갈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설마 펠릭스가 벌써부터 접촉해올 줄은.’
아렌의 생각보다도 더 태양교는 지금 상황을 조급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렌은 그 다급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갔다.
“갓 철이 드셨을 때부터 가웨인 전하의 주변은 오직 적과 아군, 둘밖에 없었죠. 그런데, 황궁 밖에서 온 외부인인 당신들을 그리 쉽게 믿으실 것 같습니까?”
“아렌 공 당신은 우리가 궁 밖에서 온 자들이라 믿을 만하다지 않았습니까?”
“제 경우엔 그랬지요. 가웨인 전하에게 외부인은 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지요. 외부인이 가웨인 전하의 아군으로 인정받으려면, 나름의 실적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적이라면?”
“지금, 교국의 사절들은 전하께 꽤나 눈엣가시인 모양이더군요.”
“흥, 그놈들을 좋게 보는 사람도 있을까.”
여기서, 아렌은 탁자 위에 단검을 내려놨다.
“…이 단검은 뭡니까. 설마 이걸로, 그놈들 중 하나를 죽이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들도 나름 타국에서 온 사절이고, 황궁 경비병의 경호를 받고 있지요. 암살은 쉽지 않을 겁니다.”
펠릭스는 조심스레 단검을 집어 들었다.
날렵한 칼날은 손바닥의 세로 길이보다 조금 더 길었고, 가죽 정도는 부드럽게 찢을 만큼 날카로웠다.
상아로 조각된 손잡이에는 뒤쪽에 후광이 비치는 인간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건.”
“신인(神人) 아트마의 조각이죠. 이건 남부 국경에서 구한 아트마 교의 제식(祭式)용 단검입니다.”
아렌은 단검을 손수건에 곱게 싸 앞에 놓았다.
“이것으로 교국 놈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를 죽이는 겁니다. 단검을 그 자리에 놓고 오는 것이지요.”
“…허, 아트마 교의 단검으로 사람이 죽으면 살인 혐의가 아트마 교에 향한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닙니까?”
“평소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황궁 안에는 제국과 교국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가웨인 전하 말고도요.”
정치적 이유에 의해 몰아갈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제국과 교국 사이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기껏 개발한 은광산은 빛을 보지 못할 겁니다.”
“…….”
제국이 교국으로부터 사들이는 은광은 교역 물품인 동시에 두 나라 우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질 좋은 은광석이 나온다면 나름의 수익을 올릴 수 있긴 하겠지만, 이 기회에 제국의 중추부터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고픈 태양교에게 두 나라의 우호적 기류는 분명 달갑지 않은 그림이었다.
조금 조급한 선택지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왜 굳이 제가 해야 합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좋아! 가능하겠어.’
펠릭스가 아렌 말에 넘어올 가능성이 커졌다.
여전히 의구심이 있는 펠릭스였지만 그 이유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가 아니라, ‘왜 우리가 해야 하냐’였기 때문이다.
“황권에 유리한 황자와 그 가신일수록 주변의 감시가 매서운 법이니까요. 다행히 교국의 사절단과 태양교로 인해, 감시의 눈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인원도 많은 태양교라면, 장소에 따라 목격자 없이 살인할 수 있을 테지요.”
낙일관 주변만 하더라도 감시하는 눈이 몇 개일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안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니 모든 건 추측에 지나지 않겠지만, 누군가를 이곳으로 부른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이목을 끄는 일이다.
“그래도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대답을 오래 기다릴 순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만 해도 이미 과할 정도니까.”
“…….”
“결심이 서셨다면 단검을 잡고, 아니면 그대로 나가주시면 됩니다. 물론 이곳에서 나눴던 이야기는 함구해주셔야 하고요.”
설령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어봤자 물증은 없다. 태양교로선 황궁이 본거지인 레온나토스 황자 측과 지루한 진실공방을 감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 사람 하나 죽이는 건, 너희에게 별일도 아니잖아? 어서 받아들여.’
펠릭스는 목이 타는 듯 연신 침을 삼켰지만, 곧 확신이 선듯 탁자 위 단검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렌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요. 우리도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으니.”
만약 자신들이 범인으로 몰리면, 혼자 죽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발설하겠다는 말이었다.
“물론입니다. 저흰 어디까지나 신뢰가 아닌 이해득실로 엮인 관계니까요.”
“…그래서, 이 단검으로 아무나 죽이면 되는 겁니까?”
“그래도 상관없지만, 될 수 있으면 뒤탈 없을 만한 자를 죽이는 것이 좋겠죠.”
“추천할만한 자가 있습니까?”
“모름지기, 황궁은 중심에서 외곽으로 갈 수록 인적이 뜸해지는 법이죠.”
그리고 황궁의 외곽에는 열두 개나 되는 정원이 주르륵 늘어서 있다.
“전에 회담장에서도 보셨겠지만, 황궁 외딴곳에 있는 정원은 그만한 넓이에 정원사 하나만 관리하고 있지요.”
“호오. 그렇다면 뒤에서 몰래 다가가 이 단검으로 찌르면 되겠군요.”
“그것도 좋겠지만, 정원은 지나치게 고요하죠. 아마 들키지 않고 다가가기는 힘들 겁니다. 정원사가 당황할 만한 말을 하면서 기습하는 게 더 간단하겠죠.”
“당황할 만한 말?”
“가령, 이렇게 말해보는 겁니다.”
고개를 숙이는 아렌을 따라, 펠릭스도 따라 숙였다.
*****
이틀 후.
황궁 안은 다른 때보다 불온한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
쉬쉬하면서도 그것을 옆으로 전달하지 못해 안달인 소란은, 보통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발생한다.
반나절 내내 자신의 집무실 안에 있었던 아렌은 지나가던 궁인에게 물었다.
“뭔가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궁인은 열다섯 살인 아렌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비서관 아렌 공을 뵙습니다. 저, 다름이 아니라 태양교의 사제 하나가 정원 안에서 죽어있었다고 합니다.”
“그거참 흉흉한 일이군요. 태양교의 인솔자는 어떻습니까.”
“그게, 죽은 자가 그 인솔자였다고 합니다.”
“-저런.”
시침 뚝 떼고 말한 아렌은 시녀역의 멜로익을 대동한 채 정원으로 향했다. 사건이 일어난 주변에서 조금 더 자세한 것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의 계획대로, 펠릭스는 다른 이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아렌과의 관계는 최대한 널리 퍼지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테고, 황궁의 정원사 하나 정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그 경우 죽임당하는 건 펠릭스다. 단 세 명만 뽑히는 황제의 최측근 경호병인 금면병의 후보씩이나 되는 자들이, 일개 사제의 기습을 대처 못 할 리 없기 때문이다.
도착한 정원.
이미 시체는 치워지고 없었지만, 곳곳에 낭자한 피가 여기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을 봤던 자들이 증언하기로 펠릭스는 정원 가위에 두 눈이 찔린 채,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목이 갈라져 죽어있었다고 했다.
마치, 두꺼운 가지까지 쳐내는 가위의 양날로 싹둑 썰어버린 것처럼.
사제는 갑자기 정원사에게 달려들었고, 이 사건은 정원사의 정당방위로 그렇게 마무리되는 모양이었다.
사건 조사를 위해서인지 이곳을 관리하는 정원사도 자리에 없었고, 다른 이들의 인적도 없었다. 괜히 살해 현장에 들렀다 엄한 꼴을 볼까 싶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멜로익이 물었다.
“…아렌. 네 짓이야?”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아렌의 행동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온 멜로익은 대강의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상 아렌의 일거수일투족은, 멜로익에 의해 반쯤 감시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처럼 대동하는 것도 일상이고, 설령 대동하지 않아도 아렌의 암살시종이 된 멜로익은 미행까지 해가며 아렌에 따라붙었다.
물론 아렌도 불평 따위는 할 수 없다.
아렌 정도의 지위라면 다른 적대 세력에게 감시가 붙는 것도 평범한 일이다. 오히려 멜로익이 먼저 선점했기에 다른 자들의 감시를 덜 받는 면도 있었다.
“그럼 만약의 이야기라 치고. 태양교 사제는 여기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그것도 그 즉시. 무슨 짓을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생포되었다면 너와 나눴던 이야기들도 전부 들통났을 텐데?”
“만약의 이야기, 좋네. 그 말대로 된다 해도, 발뺌할 수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냐. 일단 범인의 일방적인 주장이기도 하고.”
정원사의 실력이라면, 단검을 든 펠릭스 따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은 펠릭스가 죽을 것이라 확신했다.
펠릭스에게 가르쳐준, 정원사를 한순간 당황시킬만 한 말 때문이었다.
[난 가면의 비밀을 알고 있다.]
펠릭스는 그 말의 뜻을 모르지만, 정원사가 황금 가면을 쓴 황제의 근위병 ‘금면병’의 후보들이라는 건 극비 중의 극비다.
황궁 안의 정보들을 그러모으고 있는 아렌조차도 아르테에게 들어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정원사로선 죽여서 입을 막고 싶었을 테고, 자연히 펠릭스와 아렌이 나눴던 대화들도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가진 단검은 아트마 교의 제식용 단검. 태양교가 아트마 교에 누명을 씌우려는 정황으로는 충분했다.
멜로익은 조심스레 말했다.
“…황궁에서 하는 일은 일부러라도 잔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레온나토스 전하께 부족한 것도 그 지점이라 생각하고. 설령 무고한 사람을 유인해 죽였더라도 말야.”
“무고한 사람?”
아렌은 반문했다.
실제로 죽이지 않았을 뿐, 죽이려 마음먹고 실행에까지 옮긴 사람이다.
고작 그 정도의 등 떠 밈으로 행동에 옮겼다면, 이와 비슷한 짓을 전에도 얼마나 했을지 알 수 없다.
‘당장, 나와 레온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돌멘을 죽였으니까.’
“약간의 부추김만으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죽이려던 사람을, 무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
“…흐음.”
아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멜로익은 시침 뗀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에, 인 거지?”
“물론 만약의 이야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