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하암.”
어젯밤 늦게 잠든 아렌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황궁 복도를 걸었다.
태양교 수신관 펠릭스에게, 어제 부탁한 것이 있었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 만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일부러 가웨인의 별궁 쪽으로 발길을 돌린 보람이 있었다.
저 앞에서 길을 걷는 가웨인과 몰디나가 보였다.
‘찾았다.’
“평안하십니까, 가웨인 전하.”
“뭐냐, 아렌 아니냐. 여기엔 무슨 일이지?”
평소 아렌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특히 가웨인의 별궁 근처에 발길을 들른 것은, 일부러 찾아왔다고 보기에 충분했다.
“의식하고 이쪽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만… 저도 모르게 전하께 해드린 최근 점괘가 신경 쓰였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안녕하세요, 아렌 공.”
가웨인 뒤쪽의 몰디나가 인사했다.
가웨인과 몰디나가 같이 다니는 걸 보니, 둘 사이에 있을 뻔했던 오해가 조금은 풀린 모양이었다.
‘…잘만 하면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잘 안되었나?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아렌 자네가 한 말대로, 몰디나와는 이야기를 잘 나눴네.”
“그거 다행이군요. 혹시나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 아닐까 해 걱정했습니다만.”
아렌의 걱정에 몰디나도 화답했다.
“다행히, 전하께서 잘 이해해 주시더군요. 하지만, 다음부턴 아렌 공께서도 전하께 이야기하기 전에 제게 먼저 말씀해주시죠.”
“네. 명심하죠.”
가웨인은 쓰게 웃었다.
“또 그 소린가. 별로 숨길 일도 아닌데 너무 과민 반응하는군.”
“가웨인 전하야말로 이토록 너그러우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
“…?”
둘의 말은 맞물리는 기색 없이, 자꾸만 헛돌고 있는 듯했다.
‘서로 다른 말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뭔가 오해가 생겼나?’
하지만 아렌에게 둘의 오해는 호재다.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늦게 밝혀질수록 둘 사이에 알게 모르게 앙금이 쌓이겠지. 마침 잘됐어.’
“전하께서만 허락해주신다면, 조금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동행? 아침부터 낯 두꺼운 놈이군. 시온은 아침부터 업무로 바쁜데, 레온나토스의 비서관은 한가하기 짝이 없나?”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일을 쉬이 아래에 내려주지 않으시죠. 덕분에 전 항상 한가합니다.”
“…그러니, 잠깐 동행이나 되어달라? 허, 날 심심풀이 말동무 취급하는 건 전 대륙에 너밖에 없을 거다.”
“과찬이십니다.”
“칭찬 아니다.”
조금 단호하게 말한 가웨인은, 어느덧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 좋다. 결국은 네놈 점의 덕을 봤으니. 빚졌다고 생각하고 결례를 눈감아주지.”
“제 사소한 재주를 좋게 봐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사건건 혀가 길단 말이야. 네놈이 고작 열다섯인 건, 슬슬 익숙해질 만한데도 낯설단 말이지.”
이제는 아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익숙해졌거나, 혹은 아렌보다 높지 않은 신분이라 지적할 수 없는 지점을 가웨인은 서슴없이 짚고 넘어갔다.
“정말, 인생을 한 번 더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
“…….”
뜨끔.
아렌은 눈을 피했다.
‘이것도, 가웨인의 날카로운 ‘감’인가?’
더 추궁당하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마침 복도 앞, 외부인용 숙소 앞에서 소란이 있었다.
‘-옳지. 잘하고 있군.’
“…그런데, 저건 무슨 소란이지?”
가웨인이 덥석 미끼를 물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금방 윤곽이 드러났다.
교국의 사절단은 다수의 태양교 사제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명백히 태양교 사제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렌이 전에 한 제의에 따라 교국의 사절들은 대외 활동을 자제했고, 필요한 최소한의 경우에만 숙소 밖을 나왔다. 이제 곧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사실인 듯했다.
교국 사절단의 활동이 줄어든 만큼 태양교 사제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지금의 시비 역시도 책임자인 수신관 펠릭스가 내린 지시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아렌이 어젯밤 한 제안 때문이겠지만.
[태양교 교인들은 황궁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아트마 교의 종자들과 많이 충돌해 주십시오. 저들이 이 황궁 안에서의 일을 기억할 때, 온통 푸대접밖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냉정하게 생각하면 태양교는 제국, 황궁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단체다. 저들의 행동이 제국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황궁의 초대 손님이고, 교국 사절들이 황궁에서 겪은 일들이 인상으로 남는 것 또한 사실.
황궁에서 겪은 푸대접의 기억은, 양국 사이의 화해 움직임을 막기엔 적합하다.
…라는 말로, 아렌은 태양교 수신관을 납득시켰다.
별것 아닌 것 같더라도, 사소한 행동이 감정싸움으로 연결되어 화해 분위기를 망친다고.
그리고, 이 황궁 안에 자신들과 같은 편이 있다는 걸 안 태양교도들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이요!”
“시끄럽다! 네놈들이 먼저 부딪쳐온 것 아닌가! 광신도의 나라에서 온 놈들. 여긴 제국의 땅이다!”
“이런 무도한! 이번 일은 황제께 반드시 고하도록 하겠소!”
“흥, 마음대로 하시지. 황제 폐하께선 다른 나라의 광신도보다 제국의 신민을 더 위하실 테니까. 너희가 아직도 황궁에 머무르고 있는 건, 설마 정보를 그러모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오, 좀 예리한데?’
교국 안 주전론이 득세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한 화친론자들이긴 하지만 일행들 사이 독심자 아르테가 끼어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로서도 곱게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되는대로 말한 것이겠지만, 태양교도가 한 말은 정답에 가까웠다.
계속 물러날 타이밍만 보고 있는 교국 사절단과 조금이라도 더 들러붙으며 귀찮게 구는 태양교 사제들.
문득 그들 사이에 있던 수신관 펠릭스의 눈이 아렌과 가웨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가웨인과 같이 서 있는 아렌을 보고 화색이 된다.
‘옳지. 지금 가웨인과 다 이야기되어 있거든?’
물론 가웨인에게 펠릭스의 시선은 부담스럽고 의아한 것이었다.
“…대체 뭐냐, 저 천것들은.”
“글쎄요. 아마 전하를 알아보고,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러는 것 아닐까요?”
“저러는 와중에도? 추잡스럽기는. 하긴, 황궁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울 낯짝이라면 무엇인들 못 하겠냐마는.”
“그냥 무시하시지요. 저런 자들과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전쟁 위협이 사라져 교국 사절단이 돌아간다면 더 이상의 싸움도 없겠지. 적어도 여기 더 머물러있을 명분은 없어지는 셈이니까.”
가웨인은 아렌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가웨인 진영에서는 끝내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렌, 넌 좀 더 상세한 점괘로 범인을 특정해낼 수 없는 건가?”
“그게, 불가해졌습니다.”
“어째서지?”
“수국 정원 회담 직후, 어째서인지 더이상 범인에 대한 점괘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건 아마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새 범인이 이미 잡혔거나, 혹은 더이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거나.”
물론 아렌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점을 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더이상 테오드릭이 전쟁을 꿈꾸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전하께서는, 몰디나 양을 통해 점쳐보지 않으셨습니까? 몰디나 양의 점괘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만.”
당연히 손안에 유능한 점술가가 있을 터.
가웨인은 자신이 얻어낸 점괘를 먼저 말하지 않았다. 아렌의 점괘를 먼저 듣고 싶어서였다.
“역시, 용한 점술가끼리는 같은 미래를 보는 건가. 둘의 점괘가 완벽히 같아. 아마, 어떤 일로 전쟁 사주를 포기한 것이겠지.”
“네. 그리고 수국 정원에서의 회담으로 용의자를 좁혀놓기도 했고요. 감시하는 눈이 많으니 섣불리 행동하긴 힘들겠죠.”
“…설마, 정원에서 다섯을 불러 모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나?”
“모든 걸 예측할 수 있으면 그건 신이겠죠. 전 단지 범인이 더 압박을 느낄 만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국의 사절들과 태양교도는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양국 사이의 전쟁을 노리는 자가 있음에도 황제가 적극 나서지 않는 자체만으로, 그 범인이 ‘황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아렌 네가 불러모은 황자는 나와 레온나토스, 그리고 테오드릭 정도지.”
아렌의 점은 항상 맞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밖에 선전하고 있다. 기대가 큰 만큼 빗나갔을 때의 실망도 큰 법이니까.
하지만 애초에 아렌의 점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가웨인은, 지금 아렌의 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난 당연히 아니다. 네 태도 역시 전쟁을 원한다고 보기 어려워. 나도 아니고, 레온나토스도 아니라면. 남은 건-”
“…글쎄요. 레온나토스 전하가 범인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만, 테오드릭 전하도 지금 가웨인 전하처럼 말씀하시겠지요. 제가 선택할 수는 없는 일 같고요.”
“흥, 그러고 보면 네놈은 테오드릭과 밀실에서 이야기를 나눴지. 나를 빼놓고 둘이서 뭔가를 획책한 것은 아닌가?”
이 얘기가 꼭 다시 나올 줄 알았다.
“방금 하신 말씀도, 테오드릭 전하가 똑같이 하실 수 있는 말이죠.”
“…….”
가웨인 역시 낙일관에 들어와 아렌의 점괘를 봤으니까. 테오드릭이 자신과 똑같이 지적했을 때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는 건 가웨인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드릭에게 했던 것처럼 가웨인도 포섭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가웨인은 포섭할 수 없을 것이다.
테오드릭과 가웨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테오드릭은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위에 레온나토스를 두길 거부하지 않았다.
반면 가웨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위에 레온나토스를 두지 않을 것이다.
서로가 위를 목표로 하는 입장에서는, 잠깐의 동행조차 삐걱일 수밖에 없다.
“아, 저놈들 교국 놈들이 물러가는군. 하긴 태양교 놈들이 워낙 독종이라야지.”
좋은 구경거리라는 듯 노골적으로 쳐다보던 가웨인.
그리고, 교국 사절단을 물러나게 한 수신관 펠릭스는 득의양양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봐, 당분간은 아는 체하지 말라던 거 잊었어?’
어젯밤 했던 충고를 벌써 잊었을 리 없다. 아마, 개가 칭찬받기 위해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
펠릭스는, 가웨인의 앞으로 와 비굴하게 웃으며 허리를 조아렸다.
“가웨인 황자 전하. 아침부터 험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시끄럽군.”
“-네?”
가웨인은 조아린 펠릭스에게 경멸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에서 패악을 부리다니. 그것도 궁에 정식으로 초대된 교국의 사절들을 상대로. 태양교가 제국과 황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주 잘 알겠군.”
“저, 전하. 그것이 실은-”
“듣기 싫다. 가자, 몰디나.”
가웨인과 몰디나는 어쩔 줄 모르는 펠릭스를 두고 걸음을 크게 했고, 가웨인과 동행한 아렌 역시 속도를 맞췄다.
아렌이 문득 흘깃 뒤를 쳐다봤을 때.
“…….”
그곳에는, 두 눈이 충혈된 채 부릅뜨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펠릭스가 있었다.
‘저 녀석들은, 조금 더 뜸을 들이려 했는데.’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 여기까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