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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65화 (65/227)

#065화

태양교 사제는 아렌과 연이 닿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돌아갔고, 그와 교대라도 하듯 몇 분 후 아르테가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해요, 아렌. 좀 늦었어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오다가 만난 사람은 없었어요?”

“그냥 궁인 몇 명 정도? 다른 사람은 못 만나봤네요.”

혹시나 오면서 태양교 사제와 스치기라도 했는데, 그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렌도 설명할 수고는 덜었을 것이다.

아렌은 미리 준비해둔 쪽지를 꺼냈다. 황자의 비서관이, 교국의 사람과 오래 이야기하는 걸 다른 이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어머, 우연이네요.”

미리 언질을 주지도 않았는데, 아르테 역시 소매에서 곱게 적힌 종이를 꺼냈다. 아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

“…그럼.”

서로의 쪽지를 교환한 뒤, 둘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정원의 반대편으로 헤어졌다.

아렌이 적은 쪽지 내용은 간단했다.

테오드릭이 범인인 걸 알았을 테지만, 최대한 함구해줄 것.

계속 황궁에 있을 것이라면 최대한 활동을 줄이고 조용히 지내줄 것.

그리고 아렌이 언제고 낙일관을 개방한다면, 쪽지의 그림대로 만든 번호표를 들고 낙일관 안으로 들어올 것.

낙일관은 개방만 해놓는다면 누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눠도 얼버무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르테도 쪽지를 줄지는 몰랐는데. 내가 생각할만한 건 자기도 한다는 건가.’

그리고, 아르테가 건네준 쪽지의 내용은 아렌이 준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중에는, 아렌이 계속 찾아헤메던 정보도 들어있었다.

‘…정원사가?’

이전부터 아렌은 정원사가 단순한 관리직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단순한 관리직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그 이상인데?’

황궁을 둘러싼 열두 정원에 한 명씩, 총 열두 명 배치된 ‘정원사’는, 아르테에 따르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뽑힌다.

그 조건은 가족이 없을 것, 절대적으로 황제에게 충성할 것, 병사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체격이 황제와 비슷할 것.

‘…그렇군.’

아르테도 정원사에 대해 제대로 파고든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나가며 얼굴 한번 흘깃 본 것으로는 차고 넘치는 정보량이긴 하지만.

그제야 아렌에게 대강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사는 아마도, 금면병의 후보들일테지.’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에 한해서만큼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서가 된다. 황궁법에 따르면 설령 정원사가 자신의 정원 안에서 살인을 해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일개 정원의 관리인에게 적용되기에는 너무도 막강한 권한이다.

‘정원사가 황제의 또 다른 회중검이라면, 굳이 황제 자신과 체격조건이 비슷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

그렇다면 그들이 평소에 말 한마디 안하는 것도, 금면병이 되기 전의 훈련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렌도 첫 번째 삶과 지금 통틀어, 금면병이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금면병에 대한 오랜 궁금증은 풀렸지만, 지금 아렌이 신경 쓰이는 건 흘깃 본 것만으로 정원사의 정체를 알아챈 아르테의 능력이었다.

까다롭고 성가신 능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협력관계이니 그나마 다행인가. 하지만, 언제고 문제가 될지 몰라.’

그렇다고 섣불리 손을 쓰는 것도 위험하다.

아르테에겐 항상 지나치게 많은 정보량이 향하므로, 아렌이 부하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든 아르테에게 미리 발각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일단은 당장은 협력을 유지하되, 언제고 경계는 늦추지 않는 쪽으로.’

아르테의 쪽지 나머지 내용은, 교국의 사절단이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일은 당분간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황궁에 오래 머물수록 다른 의심이나 반감만 불러오게 되는 이상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

아르테로서도 제국의 황궁에서 얻어낼 정보는 구미가 당기겠지만, 지나치게 머무르다 아르테의 정체가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할 것이다.

‘그거 읽던 중 반가운 일이네.’

아르테의 능력은, 손으로 쥐기에 너무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손잡이를 잡고 있을 땐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지만, 칼날이 자신을 향할 땐 대처하기 난감한.

그녀가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떠난다는 건 기꺼운 일이다.

남은 건, 교국의 사절단이 머무르는 동안 어떻게든 더 이득을 볼 부분이 없냐는 것.

‘지금 내가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건, 가진 정보의 격차 정도인가? 이 격차를 최대한 이용해야 해.’

아렌에게 이건, 마치 요리와도 같았다.

지금 아렌에겐 써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료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가공하고 조합해 어떤 요리를 만들지는, 오직 아렌만이 결정할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패는-’

아렌은 하나하나 속으로 꼽아봤다. 모두 널리 알려지기 전 아렌이 먼저 알고 있는 것들을.

아렌과 테오드릭 간의 비밀 협력.

조만간 황궁을 떠나게 되는 교국 사절단.

점술가 몰디나에게 한 영입 제안.

그런 몰디나를 의심하는 황자 가웨인.

정원사들은 사실 금면병의 후보들.

초조해하는 태양교도.

‘-이 정도인가?’

아니, 하나 더 있었다.

아득할 만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아르테조차도 모르는 사실.

바로, 과거로 되돌아온 자만이 알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었다.

*****

그날 밤.

날짜가 바뀌기 직전 늦은 밤, 아렌은 황궁 외곽의 외부인용 숙소로 향했다.

낮에 얘기했던 태양교의 사제와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분명, 펠릭스였나?’

기억해둬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실제로 기억하려 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막상 필요하니 저절로 떠올랐다.

“펠릭스 수신관을 불러주십시오.”

숙소 앞을 지킨 불침번에게 고하자, 불침번은 의아해하면서도 사제를 깨우러 갔다.

시간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무례한 상황이었지만, 레온나토스의 비서관이라는 아렌의 이름값은 이럴 때도 빛을 발했다.

“…이렇게 빨리 또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렌 공께선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한참 자고 있던 중이었는지 사제의 머리는 잔뜩 떡져 있었고,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화급한 용건이라, 무례임을 알면서도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겠습니다.”

“실은, 날짜와 날짜 사이에 행한 점괘는 더욱 용하다고 하지요.”

“…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점괘로, 범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펠릭스 수신관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아마, 잠에서 강제로 깨었다는 짜증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내가 범인을 찾아 양국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는 건 바라지 않겠지?’

황실이 선페일 지역의 은광에 매달리게 하기 위해선 양국의 관계가 파탄 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점괘는 증거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점괘만으로 범인으로 모는 것은 어쩐지-”

“충분하지 않다고요?”

“…….”

“물론 그렇죠. 하지만 우선 지목당한 순간 조사는 불가피하고, 그가 정말 범인이라면 숨겨둔 죄목들이 낱낱이 밝혀지겠죠. 설령 그가 범인이 아니었거나, 드러난 죄목이 없다 하더라도 잃는 건 제 점에 대한 신뢰뿐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냐, 는 말이 사제의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점괘로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면, 어째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외부인인 제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사제 펠릭스가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의문.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아렌이 하는 말의 설득력은 급감한다.

좋은 미끼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충분히 매력적일 것.

두 번째, 자연스러울 것.

“그건, 이 사실이 여러분들께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갑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 저의 제보로 범인을 찾게 된다면 제국과 교국 사이에 화해의 흐름이 생기겠지요. 그리고 그건, 선페일의 은광산을 가진 태양교에게 악재 아닙니까?”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의 신하로서 어찌 저희가 그런 불충한 생각을-”

“아,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거든요.”

아렌은 미끼를 던졌다.

“…네? 그렇다는 건 레온나토스 전하도-”

“아니, 그건 아닙니다. 레온나토스 전하와는 상관없는, 오직 저만의 뜻이지요.”

“죄,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잘 못 따라가겠습니다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레온나토스 전하가 절 거둬주셨지만, 전 다른 길을 가겠다 다짐했지요.”

사제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서 자신이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그, 저…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 맞습니까?”

“실은, 5년 전 고드프리 전하를 고발한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고드프리의 이름이 나오자 펠릭스의 눈이 떨렸다.

아렌은 그 징후를 놓치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없는 내용까지 지어내며 형제를 내치는 레온나토스 전하의 행각에 염증을 느끼던 차였지요. 지금이야말로 그때의 후회를 만회할 기회입니다.”

“…….”

펠릭스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고드프리 황자의 뒷배가 정말 태양교였다면, 자신들의 일을 망친 레온나토스와 아렌을 적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축 중 하나인 아렌이, 손을 건네온다면?

“…저, 아렌 공의 점괘에 나왔던 범인은 누구였습니까?”

“아무리 듣는 귀가 없다고는 하나, 황궁 안에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황자 중 한 분이며 무술의 고수이고, 주변 가신들 역시 무력에 능하며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손꼽히는-”

“가웨인 전하였습니까?!”

쉿.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아렌은 나지막이 말했다.

“직접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아니 될 일입니다.”

“-헙!”

“이 황궁 안에선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제가 믿을 만한 분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으면서 황궁 안 사람이 아니었던 태양교 정도뿐이지요.”

“…그건, 영광스럽습니다만.”

아직도 펠릭스는 아렌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 난 너희에게 눈엣가시였을 뿐이니.’

하지만, 아렌에게 ‘레온나토스를 배신한다’라는 명분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곧 마음의 결심을 한 듯 펠릭스는 말했다.

“…저희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고개를 숙인 아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방금한 이야기는,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시고 혼자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우선-”

*****

‘…굳이 내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아도, 머지않아 태양교는 없어져.’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도 그랬다.

선페일 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되는 것은 필연이었고, 제국은 교국의 은광에 연연해야 하는 관계를 끊어내고 싶었다.

교국은 여전히 제국에 비싼 값으로 은광석을 팔고 싶었으니 양국의 사이는 자연히 냉랭해졌다.

반면 그사이, 태양교는 자신들이 소유한 은광의 힘으로 제국의 중추, 천년궁에까지 진출해 입지를 다지는 데 최선을 다했다.

‘거기서 멈췄다면 아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태양교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직 황궁에 있던 제5황자 고드프리를 통해 황궁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포교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건 태양교의 은괴만을 원할 뿐, 교리까지 원하지는 않았던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이었다.

곧 황제의 수사관이 선페일 지역으로 향했고,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온갖 혐의가 태양교를 향했다.

태양교는 금방이라도 지도 위에서 사라질 것 같았고, 그것만은 피하려는 태양교의 노력과 고드프리 황자의 거듭된 탄원으로 간신이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소유한 은광산은 모두 황실에 증여해야 했지만.

그리고 그건, 분명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일이었다.

아렌은 생각했다.

‘어차피 예정된 결말이라면, 조금 앞당겨져도 큰 불만은 없을 테지?’

&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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