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다음날 아침.
아렌은 보고하기 위해 레온나토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아렌이 뭐라 보고하기도 전에 레온나토스도 대강의 일들을 들은 모양이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이어졌다면서. 황궁 안에 그렇게 한가한 궁인들이 많았다니, 다시 볼 일이야.”
“네. 줄을 섰던 절반 이상은 결국 점괘를 못 보고 돌아가야 했지만요. 그렇게 많이 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다고? 거짓말도 잘하는군.”
아렌의 낙일관 개방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결국 기다리다 점을 못 본 사람들에겐 아렌이 미리 준비해둔 번호표를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아렌의 서명이 들어간 번호표가 있으면, 언제든 다시 낙일관이 개방되었을 때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번호표는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선 바로 나눠줄 수 없지. 네가 원한 대로 많은 사람들의 점괘를 보게 했는데, 그것으로 무슨 이득을 본 거지?”
“그건….”
“아니, 미안하군. 자세한 건 묻지 않기로 했지. 잠깐 착각했어. 아렌 네가 필요하다 생각한 것만 얘기해주면 그걸로 족해.”
아무래도, 레온나토스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성정이 너무나 올곧기에, 꼭 필요한 일을 못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아렌이 하는 일을 자신이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듣자 하니 테오 형님도 줄을 서셨다고?”
“…네. 모처럼이니, 흥미가 돋으셨던 모양이지요.”
“흐음, 궁금하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도 됐을 텐데. 그런데 어떤가, 아렌. 그만큼 성황이었으니 이 기회에 정기적으로 열어보는 것은.”
“실은 그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그때였다.
레온의 집무실 밖에서 아렌의 시녀 멜로익이 들어왔다.
“아렌 님. 어느 시녀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시녀’라는 표현에서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는 아렌이었다.
“그래? 전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멜로익을 따라 집무실 밖 복도를 걷는 아렌.
“…….”
“…….”
그리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데도 멜로익은 평소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렌도 위화감을 느꼈다.
“…멜로익,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아무 일도.”
“…….”
역시 이상했다.
다른 사람의 이목 앞에선 깍듯이 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아렌에게 스스럼없이 반말로 대하던 멜로익이었다.
‘…기분이 안 좋은가?’
지금 아렌에게 보이는 건 조금 앞서가는 멜로익의 뒤통수뿐.
미처 그 속내를 파악하기도 전에, 멜로익은 물러났다.
“그 시녀는 이 앞에 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 그래. 수고-”
아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횅하니 가버리는 멜로익.
안내받은 아렌의 응접실에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라흐네가 있었다.
“아라흐네? 무슨 일이지?”
“테오드릭 전하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아렌은 아라흐네가 사무적으로 건넨 서신을 받아들었다.
멜로익의 태도에 어쩐지 찬 바람이 느껴지는 것은, 확실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것봐라. 멜로익에 이어, 아라흐네까지?’
아라흐네. 이전 삶에서 아렌의 아내였고, 그 끝에 배신했던 사람이었다.
표면상으로는 테오드릭의 시녀이지만, 동시에 황제의 말단 정보원인 ‘황제의 눈’ 일원이기도 했다.
비록 과거 아렌을 배신하긴 했지만, 그건 첫 번째 삶에서의 일.
지금의 아라흐네는 아직 배신하기 전이고, 그 미래에까지 다다를지도 알 수 없다.
이미 두번째 삶에서 5년이나 살아온 이상, 아라흐네에게서 느끼는 호감이나 적대감 모두 지금의 삶에 조금씩 희석되었다.
지금은 단지 조금 더 시시콜콜한 사정들을 자세히 아는 아렌의 단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아무것도 아닌데 태도가 왜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평소와 똑같은데요.”
‘…혹시?’
“음, 그래? 그러고 보니 최근은 점을 본 적 없었지. 기왕 만났는데 점이라도 봐줄까?”
평소라면 당장 혹했을 제안.
하지만 아라흐네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됐거든요? 그런 점이야, 몇 시간만 줄 서면 누구든 볼 수 있잖아요.”
“…….”
‘역시 그거였나.’
아라흐네는 팩 토라져선 아렌과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다.
“저도 다음 기회에 줄 서보려고요. 그게 위험하고 귀찮게 다른 정보들과 교한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고요.”
누구든 줄을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아렌의 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단 아라흐네 뿐 아니라, 황궁 곳곳에 아렌의 점괘를 미끼로 놓은 단말들이 있었다.
정보와 점괘의 교환조건은 아렌의 점을 아무나 볼 수 없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누구든 기다려서 점괘를 볼 수 있다면, 아렌의 단말들은 단번에 그 동기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낙일관은 앞으로도 종종 개방하고 싶은데.’
실은 아예 정기적으로 개방하는 것마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렌이 직접 관여해 지은 낙일관은 황궁에서 엿듣는 귀를 신경 안 써도 되는 몇 안 되는 장소였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저번처럼 테오드릭을 직접 만난 것이나, 교국의 사절들이 돌아간 뒤에도 궁 어딘가 있을 아르테의 밀정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기 용이하다.
여러 궁인들의 사정과 고민을 들으면서 얻는 황궁 내 잡다한 사정들은 덤이다.
‘다른 무엇을 미끼로 삼을지, 제대로 생각해둬야겠어. ’
여전히 냉랭한 아라흐네를 곁눈질하며, 아렌은 테오드릭의 서신을 열었다.
‘아라흐네가 열어보거나, 하다못해 중간에 누군가 강탈할 수도 있었는데. 전에 한 답변이라면 조금 경솔한 것 아닌가?’
하지만 받아든 서신 안에는 그것만으로는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는, 간단한 답변만이 적혀 있었다.
[그러지.]
‘…좋았어!’
테오드릭이 아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레온나토스는 슬그머니 웃으며, 불 피워진 벽난로에 서신을 던져넣었다.
*****
아라흐네를 다시 돌려보낸 후, 아렌은 황궁을 거닐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선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황궁을 거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집무실 근처였기에 딱히 동행한 호위는 없었고, 여전히 냉랭한 기운을 띤 멜로익 뿐이었다.
‘이제, 테오드릭은 제국과 교국사이의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을 거야. 이 사실도 아르테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테오드릭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아르테도 알고 있다. 애초에 회담장에서 테오드릭이 범인이라 알려준 것이 바로 아르테였다.
물론, 지금 테오드릭이 아렌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까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아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직접 알려주는 것보단 언제 테오드릭을 그녀 앞에 세우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이다.
그때.
복도 앞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호리호리한 청년.
아렌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가웨인 황자전하를 뵙습니다.”
“아, 아렌이군. 마침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나를?’
가웨인은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혼자였다. 비서관인 시온은 물론, 최근 거의 항상 따라붙었던 몰디나도 곁에 없었다.
“최근에 네가 거하게 점판을 벌였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야.”
“재주란 밭과 같아서, 잠깐만 멀어져 있어도 금방 못쓰게 되어버리죠. 종종 원하는 사람들의 점을 봐줘 실력이 녹슬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호오, 종종 점괘를 본다고? 마침 잘됐군. 조금 흥미가 동하는데, 나도 한번 점을 봐주지 않겠나.”
“그것이라면-”
아렌은 조금 망설였다. 지금 가웨인의 곁에는, 진짜 영험한 점술가인 몰디나가 있었다. 굳이 그녀를 놔두고 아렌에게 부탁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설마, 두명의 점괘를 직접 받아 비교하려는 건가?’
가웨인은 아렌의 망설임을 다른 쪽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 혹시 아직도 레온나토스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렇다면 직접 레온에게 말하지.”
“…아닙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바로 얼마 전 제 개인 재량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전에 낙일관을 개방했던 것도 그 일환이지요.”
가웨인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낙일관 안에서 점판에 앉히기만 하면 바로 드러난다.
유력한 황태자 후보 중 한명, 제4 황자 가웨인을 점판 앞에 앉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대답이 시원시원해 좋군! 그럼, 그 낙일관인가 뭔가 하는 것도 구경해볼까?”
“안내하겠습니다.”
가웨인을 데리고 레온의 별궁으로 향하는 아렌.
그런데 어딘가, 아렌은 형언할 수 없는 찜찜함을 느꼈다.
‘…기분 탓인가?’
그건 어쩌면, 아렌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직감이 내린 경고였다.
*****
멜로익은 낙일관의 앞에 세워두고 다른 이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가웨인은 낙일관의 안을 둘러보곤 말했다.
“호오, 여기가 낙일관인가. 이름은 역시 예전에 했던 예언 때문이겠군.”
“부끄럽습니다. 뽐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자신의 장기를 밝히는 것이 뭐가 문제되겠나. 그나저나….”
가웨인의 시선이 낙일관의 내벽을 한바퀴 훑었다. 벽을 따라 늘어서 환히 밝혀진 촛대를 보고, 가웨인은 곧바로 의도를 알아챘다.
“과연 그렇군. 어두운 공간을 유지하고 싶지만, 벽 주변을 밝혀두면 어둠 속에 누가 숨기도 쉽지 않겠지. 엿듣는 사람은 없다 이건가?”
‘역시, 가웨인이로군.’
잠깐 둘러봤을 뿐인데, 아렌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
주변이 위험한 곳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타고난 능력이라도 있는 듯했다.
아렌은 낙일관 중앙,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물었다.
“그럼, 가웨인 전하. 어떤 것을 묻고 싶으십니까.”
“글쎄… 그래, 우선은 테오드릭에 대해 물어볼까?”
“테오드릭 전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녀석, 그동안 모습을 안 보인다 싶더니 아렌 네가 부르니 회담장에는 느닷없이 모습을 보이고. 바로 이곳에서 직접 점괘도 봤다면서? 너와 테오드릭이 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럼 아무도 모르겠군.”
“점술가로서 손님과 나눈 이야기들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습니다.”
“네 주인인 레온에게도 말이냐?”
“…레온나토스 전하께도 말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더더욱 테오드릭에 대해 묻고 싶군.”
‘-위험하다.’
아렌의 머릿속에서 주의를 알리는 경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설마 가웨인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가지고 있는 건, 천재적인 검술 재능에 뒤따르는 예민한 감각.
낙일관의 어둠과 아래에서 비치는 촛불은 사람의 표정을 더욱 잘 보여줬다.
점술을 받고 있는 가웨인과, 점술가인 아렌의 표정 둘 다.
“…네. 그것도 한번 점쳐보겠습니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이니, 먼저 가웨인 전하와 관련된 점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한 것은 없는데.”
모처럼 가웨인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다시는 없을 기회. 조금은 가웨인의 신경을 긁는 한이 있더라도, 동요시켜 마음속 안에 가라앉은 것들을 끄집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입장인지는 황권 경쟁 후발주자인 레온나토스에게는 무척 중요했으니까.
아렌은 자신의 공간인 낙일관 안에서 조금 용기를 얻고 말했다.
“가령, 전하를 둘러싼 여러 구설수에 대해 말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의 가신들을 직접 참살했다는, 그 소문들부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