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방금, 뭐라고?”
“전하께선 과거 황권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렌의 거침없는 말에, 테오드릭의 눈매는 조금 매서워졌다.
“지금 하는 말도, 그 알량한 점괘로 보고 하는 말인가?”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하 본인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름 아닌 본인의 일이니까요.”
“…….”
탁자 위 촛불이 일렁이자 깊은 이목구비를 가진 테오드릭의 표정이 더욱 자세히 드러났다.
낙일관 안에서 맨 얼굴로 앉은 상대에 한해서만큼은, 아렌은 교국의 아르테 못지않게 마음을 읽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말씀 드리죠. 이대로 제국과 교국 사이의 주전론이 득세한다면, 분명 그 시작점에 있던 5년 전의 통관조약이 부각되겠지요. 그건 테오드릭 전하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화살이 가웨인 전하를 향할 겁니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동귀어진이죠.”
“…그래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그로 인해, 전하께서 지지하는 다른 황자의 입지가 더 올라가겠죠. 아마도 내정에 더 중점이 있는 황자가.”
그리고 테오드릭이 지지하는 황자는, 아마도 레온나토스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년 간은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어.’
언제부터인가, 테오드릭에게선 황위를 노리는 자 특유의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권을 노리게 된 것이 비교적 최근인 레온나토스의 눈빛이 오히려 더 도전적으로 느껴질 정도.
아렌은, 테오드릭과 같은 눈을 바로 최근에도 본 적 있었다.
‘내원 시종장이 테오드릭과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어.’
만인의 위에 직접 서겠다는 각오가 아닌, 만인의 위에 설 자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서린 눈빛.
“제 말이 사실입니까?”
“…….”
“그럼 달리 말씀드리죠. 방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대체 언제부터셨습니까.”
테오드릭은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아렌은 테오드릭이 입을 열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테오드릭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조약을 협상하기로 간 자리에서, 상대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다 엉터리 조약을 맺으면 어떤 심정일 것 같나.”
‘…5년 전? 그렇게 오래전부터?’
테오드릭은 레온나토스와 사이가 막역한 편이었지만, 아렌과는 단둘이 독대할 일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깊은 얘기는커녕, 점괘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물론 가웨인 형님도, 나도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이다. 무엇보다도 내 선조분들이 건국한 나라니까.”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물론 전장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 하지만 나와 가웨인 형님의 힘만으론 그따위 엉터리 조약만이 한계였지. 황궁에서도 조약이 만료되는 5년 뒤만 기다리는 눈치였고. 그때 절감했다. 나나 가웨인 형님이 제국을 발전시키는 방향은, 오직 전시에 국한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전쟁 또한 제국을 위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아렌은, 제국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벌이는 전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레온나토스 황자는 아티스 왕국의 폐허를 보고 난 뒤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은 듯했지만, 아렌에겐 그 또한 제국을 부강하게 한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전쟁을 부정한다면, 지금의 제국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테오드릭도 딱히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지. 나도 전쟁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30년 넘는 기간 동안 평화를 누리고 있다. 제국 역사상 이만큼 오래 평화를 누린 적이 없다지. 그러니 난 폐하께 신호를 보낸 거다.”
“신호, 말씀입니까.”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접어든다면, 과연 폐하께선 어떤 선택을 하실까. 과거 그랬듯 기꺼이 전쟁을 준비하실까? 아니면 최근 그랬듯 평화를 선택할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차기 황태자의 성향 역시 정해지겠지.”
그리고, 황제는 전쟁을 막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황제도 그리 확고한 결정을 내린 건 아닐 거야.’
제국의 주인으로서 전쟁을 막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었다면, 황자들의 황권 경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황제의 조사관을 풀면 그만이다. 그러지 않고 황자들에게 일임했다는 건, 전쟁 위협까지도 황자들의 경쟁의 일환으로 봤다는 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더 선호했을지언정, 극구 피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을 터.
‘하지만 지금 테오드릭에게 그리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그래서 레온나토스 전하께 모든걸 대신 맡기실 생각이었습니까? 자신은 가웨인 전하와 함께 침몰하면서? 하지만 아직 유력한 황자 후보들은 많습니다.”
명실상부한 유력후보인 제1 황자 라이안이나, 그리고 제3 황자 루카스 역시 황태자에 가장 가깝다는 네 명의 황자들이었다. 그리고 레온나토스가 밀어냈지만, 서열상으론 아직도 상위인 제2 황자 엔지까지.
가웨인이 실각한다고 레온나토스가 그 빈자리를 온전히 차지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잘하면 써먹을 수 있겠어.’
“그것까지는 레온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보다, 넌 이제 어떡할 거지? 날 고발이라도 할 거냐? 이 자리에서야 자백했지만, 바깥에서 어떨지는 모르는 일일 텐데.”
물증은 없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독심술이 가능한 아르테의 지목과 아렌의 추리로만 진행된 이야기였으니.
그리고, 물증은 필요 없었다.
“고발은 하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예상외의 대답을 들은 테오드릭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물론, 아렌의 결정은 테오드릭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테오드릭과 가웨인이 동반 실각하는 것이, 정말 레온나토스에게 최선일까?’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전하께서 정말 레온나토스 전하께 힘을 실어주실 생각이라면, 이대로 실각하지 않은 채 힘을 보태주십시오.”
“…그 대신, 내 죄는 함구하겠다? 하지만 네가 입을 다물어도 언제 어떤 창구로 드러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내가 레온과 손을 잡은 상태라면 레온에게도 불똥이 튀게 돼!”
“그러니, 연합하지 않은 척해야지요.”
“…?”
“전하와 손을 잡은 사실 또한, 레온나토스 전하께조차도 비밀로 두는 겁니다. 다른 접점 없이, 오직 저와만 연루된 형태로요.”
“너와만 연결된 형태라고? 그건 마치-”
한 명의 신하가, 양손에 두 황자를 쥐고 휘두르는 형국이다.
테오드릭이 우려를 표하려는 찰나였다.
“마치, 막후에서 두 황자를 조종하는 실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이라고? 실제로도 그런 게 아니고?”
“아시다시피, 레온나토스 전하는 강직하시죠. 자신의 유불리보다 정직함을 더 우선시할 정도로. 레온나토스 전하께 모든 걸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됩니다.”
“…비겁하군. 정말 레온나토스를 위한다면 결국 네 말을 따르라는 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렌은 알고 있었다.
결국은 테오드릭도 아렌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레온나토스는 너무 고결하고, 진실을 알게 된다면 테오드릭에 실망하겠지. 그건 테오드릭도 그리 원하지 않는 결말일 거야.’
테오드릭은 아렌의 제안에 따를지 말지를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에 직면한 그 순간 결정은 내려진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차후에 합리화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아렌은 제안을 한 직후 테오드릭의 표정에서 엿보였던 긍정적인 신호들을 놓치지 않았다.
“결정은, 굳이 지금 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생각한 후 마음의 결정이 섰을 때, 그때도 충분하니까요.”
“마치,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말투군.”
“점술가니까요. 그럼, 이만 다음 분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다음 손님이 있기에.”
“…….”
테오드릭은 낙일관 뒤로 길게 늘어섰던 줄을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
아렌의 낙일관이 모든 궁인에게 개방된 일은 황궁 전체에서도 화제였다.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할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더군. 그 자식, 하는 것 하나하나 신경을 긁는단 말이지.”
호전적인 가웨인으로선 강한 상대는 언제나 환영이다. 특히나 가웨인 본인이 가장 유력한 황자 후보도 아닌 다음에야, 판을 흔들어줄 또 다른 실력자의 등장은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물론, 그 환영도 자신이 결국 승리한다는 가정이 뒤따르지만.
“어떤가, 몰디나. 우리도 그냥 열어버릴까? 자네의 점술도 아렌 못지않지 않나.”
“아마, 이번 만큼의 반향은 없을 겁니다.”
자신 앞에 놓인 홍차를 조금 홀짝인 뒤 내려놓으며 몰디나는 말했다.
“저쪽이 먼저 시작한 이상, 어설피 뒤따라 봤자 그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겠죠. 그리고 전, 아렌 공만큼의 명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요.”
실상은 아렌이 사기꾼이고, 몰디나야말로 제대로 된 영험한 점술가다. 하지만 황궁에서만큼은, 몰디나는 어디까지나 아렌의 그늘 아래에 있는 또 다른 점술가일 뿐이다.
자신의 제안이 먹히지 않자 조금 언짢아진 가웨인은, 문득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난 후 아렌과 단 둘이 이야기를 하던데. 둘이 무슨 얘길 한 거지?”
“그건….”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다. 계약이 끝나면 레온나토스의 곁에서 일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별것 아닌 이야기였어요. 서로의 점술에 대한 방법론 같은 거였죠.”
몰디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버무리고는 깜짝 놀랐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대목에서 거짓말을 하고 말았으니까.
‘…잠깐. 내가 왜 그런 거지?’
아렌의 제안은, 스스로도 결정을 못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제안 내용을 가웨인에게 숨긴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군.”
그리고, 가웨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런데 몰디나 양. 그것 아나? 자네는 엄밀히 말해 내게 모든 것을 의탁한 가신은 아니야. 한시적으로 돈에 의해 고용된 고용인일 뿐.”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렇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것은 있어. 고용주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몰디나는 겉으로는 태연함을 연기했다.
몰디나도 점술가다. 실제로 미래를 알 수 있어도, 고객 앞에서 연기하는 데에는 능했다.
가웨인에게 자신의 속내를 섣불리 드러내지는 않았을 터.
“난 자네가 그 당연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군.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말야.”
하지만, 가웨인의 야성적인 직감이 몰디나보다 위였다.
몰디나는 처음으로, 눈앞의 황자가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껏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웨인은 자신의 가신을 몇이나 직접 참살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말야, 이상하지 않나 몰디나 양?”
다행히, 약간의 미심쩍음만 남긴 채 가웨인의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테오드릭은 얼마간 황궁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는데, 회담장에는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단 말이지.”
“…그건, 아렌 공의 점괘에 테오드릭 전하도 포함돼서가 아닌가요?”
“고작 그런 이유로 별궁 밖으로 모습을 보일 거면, 그 전부터 나왔어야지.”
“…….”
“이상해, 이상하단 말야.”
몰디나와 마찬가지였다.
가웨인의 머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듯했지만, 그 직감이 먼저 고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물밑에서, 무언가 많은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