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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60화 (60/227)

#060화

“그, ‘필연의 그림자’인 사람이면 운명과 관련없는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의 운명에는 어떤 영향을-”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몰디나는 아렌이 한 거짓말에 한 발짝 더 달려들었다.

아렌이 원한 건 자신의 점괘가 보이지 않는 그럴듯한 설명을 해주고 싶었던 것 뿐.

거기에 몰디나가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필연의 그림자라 해봤자, 고작 그 앞날을 점괘로 알기 어렵다는 것 뿐이니까요. 가령 일평생 한 번도 점을 보지 않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입니까?”

“…아니요.”

아렌의 말을 곰곰이 듣던 몰디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죠. 필연의 그림자 역시 일평생 점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과 본질적으로 같아요. 점을 통한 미래 예지를 못한 사람일 뿐이죠. 그저 드문 체질일 뿐이에요.”

“…그리고, 저기 교국의 사절단 중에도 그런 체질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군요.”

“몰디나도 교국 사절단을 점쳐봤나요?”

“네. 결과는 아렌 당신을 봤을 때와 같았죠. 저 중 누가 그 체질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죠. 그냥 특이체질일 뿐인데. 그보다 제가 필연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니, 처음 알았어요.”

“점술가는 자기 자신을 점쳐보지는 않으니까요.”

몰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로써 한동안은 아렌의 점괘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은, 아마도 아르테가 ‘운명석’, 흑옥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점괘가 나오지 않는듯 했지만.

“그랬군요. 당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해했어요. 이따금 황궁 안의 미래를 점칠 때 검고 뿌연 안개가 끼어있는 듯한 기분도, 이제 설명이 되네요. 당신도 연루된 사건들이었던 거에요.”

“저도 모르게 괜히 몰디나의 점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뇨? 오히려 이번 기회에 좋은 걸 배웠는걸요? 아렌 덕분에요.”

“…몰디나는 황궁에 왜 들어온 거죠?”

“네?”

몰디나는 우수한 점술가다. 실제로 신기가 있고, 아렌의 몸 안에 다 큰 아저씨가 들어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아챌 만큼.

‘이만큼의 능력자, 가웨인의 곁에서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야 해.’

“가웨인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서인가요?”

“아뇨, 황궁 내 정치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전 단지 그분께 고용되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저쪽이 돈을 주는 한 계속 부하로 남아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몰디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건, 글쎄요?”

“아니. 몰디나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황궁 내의 무겁고 음습한 싸움에 진절머리가 나고 있죠. 성 밖의 자신의 천막이 더 아늑하고 좋은 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네?”

“이거 봐달라, 저거 봐달라. 점술가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심부름꾼이 아니에요. 하물며 미래를 엿보는 일이기에 점괘 하나하나 조심해서 정중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

“사실 이건 뒷담화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아니, 누가 봐도 뒷담화다.

아렌은 고개를 쭉 뻗고 몰디나의 어깨 뒤쪽을 바라봤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가웨인은, 이쪽을 의식하면서도 레온나토스와 테오드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웨인 전하는 타고난 무골이시죠. 자신의 신체로 하는 일이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었을 거에요. 물론 가웨인 전하의 능력은 축복이지만, 그 기억을 갖고 괜한 기대감을 다른 곳에 투사한다면 문제가 되겠죠.”

“…전 아직, 그런 억지를 당해본 적 없지만-”

“어차피 시간 문제 아닐까요? 가웨인 전하는 레온 전하의 심복인 절 의식하고 계시죠. 가웨인 전하가 저에 대한 점괘가 나오지 않아, 닦달한 적이 정말 없나요?”

“…그건.”

몰디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엔, 가웨인의 성정은 좀 급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반면, 레온나토스 전하는 점술의 불확실한 면을 잘 이해해주시죠. 세간의 시선과 달리 제 점괘에 의지하는 면도 없으시고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별것 아닙니다. 혹시 가웨인 전하와의 계약이 예상보다도 빨리 끝난다면, 그다음 직장으로 레온나토스 전하는 어떤가요? 저와 몰디나, 둘의 점괘로 레온나토스 전하를 더욱 바른길로 인도하는 거죠.”

“…….”

“분명 황궁에서 못다 한 것이 있다고 하셨죠. 그건, 세리엔 전하와 관련된 일, 맞지 않나요?”

황녀 세리엔의 시녀였던 몰디나.

아직도 몰디나는 세리엔에겐 엉터리 점술가일 뿐. 불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분하거나 오기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슬프신 거군요. 세리엔 전하에게, 사실과 다르게 불리고 있다는 것이.”

“…아렌 당신도 저를 점쳐본 거군요.”

아니다. 아렌은 단지 지금 몰디나의 눈치를 조금 살펴봤을 뿐이다.

“글쎄요? 어쨌든, 저와 함께 이름을 알린다면 세리엔 전하의 생각도 달라지실 겁니다.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

이미 가웨인에게 고용된 몰디나지만, 고용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다.

“물론 원한다면 가웨인 전하께 이야기하셔도 전혀 상관없어요. 지금 자유 계약 상태이시고, 전 어디까지나 계약이 끝난 이후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생각… 해볼게요.”

몰디나는 대답을 유예했다.

하지만 아렌은 몰디나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이라 확신했다.

‘내가 이미 세리엔에게 정기적으로 점괘를 제공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금방 넘어오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시간문제일 뿐이지. 그럼 이다음은, 테오드릭의 차례인가?’

*****

수국 정원의 출입구를 막은 채 세 황자와 두 종교인들이 모여 진행된 회담은, 정원 밖에서 지켜보던 많은 궁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정원 안의 인물들이 차례로 밖으로 나왔는데도,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모여있던 자들 중에 제국과 교국, 양국 사이를 뒤흔들려던 범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자신이 범인으로 의심받을지 모르는 사건을 쉽게 떠들 사람은 없다.

회담을 주최한 레온나토스는 조금 염려스러운 얼굴로 아렌에게 말했다.

“…아렌. 정말 이걸로 충분한 건가?”

“네. 충분합니다.”

“하지만, 서로 감시한다면 범인의 섣부른 행동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겠지만, 색출해내는 데는 오히려 역효과인 것 아닌가?”

‘역시 레온나토스. 눈치가 빠르군.’

아렌은 아르테의 신호로 이미 테오드릭이 범인인 걸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을 지금 레온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잘만 하면, 테오드릭도 내 장기말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씀해주신 대로입니다, 전하. 하지만 역으로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일 수도 있지요. 설령 범인이 여기 모인 인원 중 없었더라도, 이 회담이 일종의 경고가 되었을 테고요.”

이번 일은 레온나토스의 이름으로 진행한 것이지만, 아렌이 주도한 일이다.

정작 레온나토스도 모르는 것이 많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은 제가 따로 준비한 일이 일단락되었을 때 하도록 하지요.”

“…어째서지?”

“전하께 설명해 드리지 않는다면, 제가 준비한 일이 문제가 되어도 제 독단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만큼 위험한 일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그리고,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실패할 확률이 올라갑니다.”

그럼에도 레온나토스는 끝까지 들으려고 했지만, 아렌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단념했다.

범인은 이미 찾은 상황이지만, 아렌에겐 지금의 황궁 안 기류가 썩 나쁘지 않았다.

교국의 사절들과 태양교 신관들 간의 갈등,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황자와 그것을 찾으려는 황자들 간의 미묘한 알력 다툼은 황궁 안에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었으니까.

‘이럴 때일 수록,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굳이 엿보고 싶어 하지.’

“…그래, 네 자초지종이 뭔지는 종종 그랬듯 사후 보고로 받지.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고.”

“아, 하나 있습니다.”

“…….”

말이 떨어지자 말하는 아렌을 보고, 레온나토스의 눈은 피곤한 듯 반쯤 감겼다.

“말해봐라, 무어냐.”

“그것은-”

*****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레온나토스의 별궁, 그 두터운 정문은 오늘 온종일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주에 한번,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별궁 안의 낙일관에 들러 아렌의 점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평소 아렌의 점괘는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물며 일반 궁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

아트마 교의 사절들이나, 태양교 신관들이 궁에 있는 동안은 지금처럼 종종 별궁을 개방할 것이고, 그 동안 아렌의 점술에 대한 소문만 들었을 뿐, 접해본 적 없는 이들이 특히 호기심을 갖고 긴 줄에 자진해서 섰다.

“…난리 났네.”

언제 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기약 없이 늘어선 줄을 보고, 암살시종 멜로익이 중얼거렸다.

줄을 선 사람들은 50명이 넘었고, 모여든 인원 모두 점을 보는 데는 4시간도 모자랄 터였다. 줄의 뒤쪽에 선 사람은 오늘 점을 볼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흐아, 이렇게 긴 줄이라니, 이게 다 뭐래?”

“아, 지상엔 오랜만이네, 핀?”

타오르듯 붉은 머리카락을 꽁지머리로 묶어 관모 속에 감춘 핀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말도 말라고. 겨우 황궁 안 하수도를 다 조사했나 싶더니만, 그 아래 제국시대 이전의 유적이 묻힌 것 같더라고? 그래서 보고하러 왔는데…”

“저 줄이 다 뭐냐고? 우리 비서관 님한테 점괘 받고 싶은 사람들이지.”

“…공짜로 점을 봐준다고? 대체 왜?”

“그 사람 생각을 내가 알겠어? 이렇게 마구 모여든 통에 보안도 엉망인데, 우리 비서관 님은 대체 무슨 득이 있다는 건지 원.”

아렌이 자신의 점술을 미끼로 곳곳에 눈과 귀를 심어둔 것을, 철썩 붙어다니는 멜로익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기한이 정해져 있다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점술을 헐값으로 파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 같지 않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멜로익.

그리고, 줄의 가장 뒤쪽에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가 나타났다.

“줄의 가장 끝이 여기인가?”

“테, 테오드릭 전하.”

제국의 제9 황자, 테오드릭이었다. 줄의 가장 끝에 있던 궁인은 감히 황자를 자신의 뒤에 세워둘 자신이 없었다.

“아, 앞으로 가시지요! 송구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먼저 왔으니 응당 자네가 앞에 서야지.”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하를 제 뒤로 모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습니다. 절 위해서라도 앞으로 가 주십시오.”

테오드릭은 몇번이고 거절했지만, 궁인의 간절한 부탁을 끝내 저버리지 못하고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테오드릭이 선 줄에는 감히 황자를 자신의 뒤에 세워둘 만큼 간이 큰 궁인은 없었다.

“전하, 앞으로 가시지요.”

“전하께 양보하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테오드릭 전하와 미천한 저의 시간이 같을 리가 없지요.”

“이미 자리를 비켜 놓았습니다.”

“…….”

길게 늘어선 줄이었지만 테오드릭은 그저 걷기만 해 어느새 낙일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우, 다음 분 들어가시면-, 허억! 테오드릭 전하!”

낙일관 안에서 후련한 표정으로 나오는 사람을 뒤로하고, 테오드릭은 어두운 낙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넓을 뿐인, 육각형의 건물. 벽을 따라 촛대가 늘어서 있었고 건물의 중앙 좌탁에 점술가 아렌이 앉아있었다.

푹신한 방석 위에 몸이 반쯤 파묻히듯 앉은 채, 두건을 눌러쓴 아렌은 마치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아렌은 느닷없이 등장한 테오드릭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어서 오시지요, 테오드릭 전하. 밖에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 서 있든, 도착만 하신다면 곧바로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기별하고 찾아온 것도 아닌데, 날 기다리고 있었나?”

“제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긴.”

테오드릭은 사방을 돌아봤다.

벽을 따라 늘어선 촛대는 벽 어딘가 누가 숨어있을 가능성을 없앴고, 중앙에 놓인 좌탁은 벽 어디와도 거리가 멀어 낙일관 밖에서 안쪽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도 무리였다.

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의 보안만큼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렌, 내가 찾아온 이유도 알고 있나?”

“전하께서 전쟁을 일으키려 하셨죠. 제가 그것을 알고 있나 탐색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역시 속일 수 없구나. 수국 정원에서는 그저 모른 척했을 뿐이군.”

테오드릭은 놀라지 않았다. 수국 정원에서 회담이 있으리라는 서신을 받았을 때부터, 아렌이 진상에 접근했다는 확신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아렌의 이어진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그리고, 당신께선 황제가 되고픈 욕심이 없으시죠, 테오드릭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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