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할 말이 있다면, 용건은 빨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시간이 넘쳐나는 몸은 아닙니다.”
레온나토스의 소환에 응한 태양교 신관은, 설마 아트마교 사람들도 와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지의 고귀한 분들 앞에서 험한 말이라도 나올 것 같군요.”
그건 아트마교의 인솔자 역시 마찬가지.
아렌은 두 종교에 관심이 없었기에 두 교의 교리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서로 다른 신과 진리를 추구하는 둘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았다.
그리고, 갈등은 종교인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제법 오랜만이구나, 테오드릭.”
“…잊으셨는지도 모르지만, 최근 나라가 뒤숭숭한 단초를 5년 전 저희가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부끄러워서 한동안 별궁 안에만 있었지요. 그런데 형님은 잘도 밖을 돌아다니시더군요.”
“흥, 고작 그런 이유로 말이냐? 그렇게 소심해서야, 황제의 재목은 아니로군.”
“낯이 너무 두꺼운 것도 황제로서 어떨까 합니다만.”
가웨인과 테오드릭 역시 서로를 향해 보이지 않는 날을 드리세우고 있었다.
정원의 경계 바깥에는 레온나토스의 기사단과 가웨인의 사병, 테오드릭의 무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그건 외부인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용의자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안쪽이 이런데, 바깥 분위기는 어떨지 짐작 가는군.’
아르테의 은밀한 눈짓을 통해 이 중 전쟁을 원하는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냈지만, 그건 아직 레온나토스에게 밝히지 않았다.
레온나토스는 아렌과 상의한 대로 이 자리의 회담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한곳에 모이기 어려운 바쁘신 분들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모이신 분들에겐 작은 공통점이 있지요.”
“공통점?”
테오드릭이 물었고, 답한 건 가웨인과 동행한 그의 비서관 시온이었다.
“5년 전 제국과 아트마와 평화의 진리성전 간의 맺어졌던 국경 통관 조약, 그 파기와 관계 있는 자들이군요.”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시온.”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5년 전의 조약과 지금의 양국 상황에 어떤 이유로든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 레온. 5년 전의 조약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지. 하지만 파기된 조약의 책임까지 이쪽으로 돌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오드릭 형님. 단지, 지금 여기 모인 자들끼리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것을 악용하려는 자들이 있는 듯해 상황을 정리하고자 부른 것입니다.”
“…상황을 정리해?”
레온나토스의 눈짓에 어흠, 헛기침한 아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여러분들께 전달한 서신에서 보이듯, 최근 황궁 안에는 불온한 생각을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높으신 분의 밀명을 받아 그 ‘불온한 자’를 찾고 있었지요.”
“…….”
제국 안에서 황자 레온나토스보다 높은 자는 몇 없다. 그의 가신인 아렌이 직접 ‘높으신 분’이라 표현했다는 건 대상이 황제를 말함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점괘를 통해 약간의 단서를 찾은 듯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호오, 단서라?”
“…….”
가웨인이 흥미를 보이자, 몰디나는 조용히 아렌을 응시했다.
아렌은 말을 이었다.
“점괘는, 이번 황궁에서의 사건이 5년 전부터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 범인이 있다. 그 말인가?”
가웨인의 눈이 살기를 담았다.
움찔.
두 교단은 일제히 긴장했다.
하지만 교국의 단장은 아르테의 제지로 뒤로 물러나있던 반면, 태양교 신관은 한발 나서서 말했다.
“잠시만요! 그럼,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저흰 5년 전의 조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게 꼭, 조약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그게 무슨?”
“5년 전에 양국 간의 조약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
“오랜만에 입에 담게 되는군요. 5년 전 이맘때쯤, 생살을 씹는 심정으로 고드프리 전하를 고발하게 되었지요. 감사하게도 태양교께서 고드프리 전하를 품어주셨지만요.”
“…….”
아렌이 말하는 점괘는, 물론 실제로 점괘를 돌려 나온 것들이 아니다. 신기라고는 없는 아렌이기에 적당한 말을 늘어놓고 있을 뿐.
그리고 여러 세력이 모인 정원 안에서, 서로 간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기묘한 긴장감 위에 편승한 아렌의 말은 묘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조용히 손을 든 아트마 교국의 인솔관이 물었다.
“아까부터 말슴하시는, 황궁 안의 사건과 그 범인이란 대체 무엇인지요.”
“아, 말씀이 늦었군요. 손님분들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만, 최근 황궁 안에 제국과 교국, 양국의 전쟁을 부추기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자를 은밀하게 찾고 있지요.”
“…전쟁 사주라고요!?”
화들짝 놀라서 물러나는 태양교 신관. 반면 교국의 인솔관은 놀랄지언정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진짜 인솔자가 뒤에 있기 때문일까.
“…어이, 아렌. 그런 이야기를 손님들에게 그리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이곳에 부른 것입니다. 가웨인 전하. 다른 들을 귀가 없는 곳에서, 책임자 몇 분에게만 몰래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황궁에 와 계신 동안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셔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렌은 눈을 들어 두 신관을 바라봤다. 특히,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태양교의 신관을.
“여기서 들은 내용을 밖에 전달해도 소용없을 테고요. 어차피 전쟁을 일으키려 한 자는 붙잡힐 테니, 그때가 되면 비밀도 아니게 되겠지요.”
“그럼, 아렌.”
지금껏 가만히 있던 테오드릭이 조용히 말했다.
“아렌 너도 이 중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거, 맞나?”
“그렇습니다, 테오드릭 전하. 그리고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만큼은 서로가 모두 용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아렌이 이곳에 두 종교인들까지 모은 이유였다.
그 이유 첫 번째는 지금까지 아르테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황자, 테오드릭과 대면시켜주기 위해.
두 번째는 서로를 용의자로서 두고 견제시키고, 혹은 경거망동한 행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황제가 직접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아렌은 그 범인이 황자들 중 하나라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사실들까지 굳이 태양교도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괜히 황궁 안에 눌러앉아서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얼른 무거운 엉덩이를 치우시지.’
“…하지만, 불쾌하군. 아렌.”
“말씀을 듣겠습니다, 가웨인 전하.”
가웨인으로선 레온나토스의 호출에 ‘너그럽게’ 응해준 것이나 마찬가지. 거기서 용의자 취급을 받으면 응당 나올 반응이었다.
“그 범인을 색출하는 임무는 아렌, 너만 받은 것이 아니다. 여기 시온도 마찬가지로 받았어. 그건 적어도 레온나토스와 나는 무관하다는 뜻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 스스로도 범인을 모르기에 저희에게 맡긴 것입니다. 설령 임무를 받은 저희 측이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황제 폐하의 경고를 그 자리에서 받은 셈이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 경고를 받은 셈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웨인 형님.”
가웨인이 아렌에게 한 말을, 레온나토스가 대신 받았다.
“아렌은 절 위해 대신해서 그 말을 해준 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입니다. 서로 의심받는 상황이니, 그 의심을 벗기 위해서라도 서로 조금이라도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네 부하의 알량한 점괘뿐이고 말이다.”
“굳이 아렌의 점괘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중 범인이 있을 확률은 5할은 넘는다 생각합니다만.”
“…흥. 그리고 굳이 그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겠지.”
가웨인은 두 종교인 집단을 흘겨봤다. 가웨인이 보기에도 저 두 종교인 집단은 범인 후보가 아니었다. 레온나토스가 저들을 모은 이유는, 괜한 의심받기 싫으면 황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얌전히 있으라는 일종의 포고였다.
아렌이 완전히 다 깔아준 판.
레온나토스가 마무리했다.
“그럼 모두, 제 제안에 따라 주시겠습니까?”
*****
레온나토스의 제안이래 봤자, 이 중 범인이 있을 확률이 높으니 서로 감시하자는 것 정도.
물론 황자들이 아닌 종교인들, 특해 태양교도들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가웨인의 가신으로 합류한 몰디나가 아렌에게 다가왔다.
“…아렌, 잠깐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네, 그야 물론이죠.”
그녀는 아렌을 붙잡고 정원의 한층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충분히 외진 곳으로 간 후에야, 그녀는 말했다.
“…아렌. 당신은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의 점을 본 건가요?”
“아뇨? 황궁을 위협하는 범인에 대해, 같이 포괄적으로 본 점이었는데, 왜 그러시죠?”
몰디나는 지금 하는 말을 정말 해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였다.
“아렌 왜 당신의 점만 보면, 점괘가 검게 나오죠?”
“…점괘가 검게 나온다고요? 잘못 본 건 아니고요?”
“아뇨. 전혀 잘못 본 게 아니에요. 당신을 알고 난 후에도 몇번인가, 이곳에 다시 고용되고 나서도 여러 번 점쳤는데 항상 당신에 대해 점을 보면 먹물을 뿌린 듯, 앞날이 뿌옇게 보이더군요.”
‘…드디어 올 게 왔군.’
정말 신기가 있는 점술가인 몰디나에게, 미래에서 되돌아온 아렌의 점괘는 마치 검은 구름처럼 뿌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렌은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 갖지 않고 자신의 점을 보지 않게 하려 노력했지만, 그녀가 레온나토스를 견제하는 가웨인에게 고용된 이상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렌, 당신은 정말 짚이는 게 없나요?”
몰디나의 물음.
거기서, 아렌은 반대로 되물었다.
“그건 저만 그런 건가요?”
“네?”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도 그런 적 없었냐고 묻는 겁니다.”
몰디나가 아렌처럼 사람의 표정을 읽었다면 지금 아렌의 속셈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 능력이 있는 만큼 사람의 표정 따위는 볼 수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왜 물으시죠?”
당연히 아렌은 몰디나의 표정으로 떠오른 지표들을 읽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역시 그랬군.’
“실은, 제게 점술을 가르쳐주신 어머니가 비슷한 것을 말했거든요.”
“비슷한 것이라니요?”
“운명이 사람의 앞날을 비추는 해나 달과 같다면, 그 사이를 가리는 존재도 있다고요. 마치, 구름이나 안개처럼.”
“…!”
‘구름이나 안개’라는 표현에서 몰디나의 반응이 격해졌다. 아렌에게서 보이는 무언가와 닮은 모습이었던 것일까.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지만 아렌은 재차 그 표현을 사용했다.
“네. 맞아요. 구름이나 안개처럼 말이죠. 어머니는 그걸 ‘필연의 그림자’라 하셨죠.”
“필연의 그림자?”
“네. 모든 사람은 운명이라는 거센 강물 속 물고기와 같죠. 더러는 어렵게 강물을 역행하기도 하고, 그대로 순응하기도 하죠. 하지만 어떤 물고기는 강바닥을 파고 들어가, 운명의 흐름에 영향을 덜 받기도 한다고요.”
물론, 지금 아렌이 하는 말은 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몰디나를 현혹하기 위해.
‘이 말이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 거짓말 속에서 한참 헤매보라지.’
물론 몰디나에겐 금시초문인 말이다.
“…전 방금 처음 듣는 말인데요. 스승님께도 들어본 적 없어요.”
“제 어머니도 ‘필연의 그림자’속 사람을 살면서 딱 한 번 보셨다더군요. 점술가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의 다른 점술 방법이 있다잖아요? 처음 들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죠. 그리고…”
여기서, 아렌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몰디나 말은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죠? 우연이네요. 실은 저도,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최근에요.”
“…설마?”
“…네.”
아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저 멀리 있는 아르테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