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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57화 (57/227)

#057화

표면적으론 가웨인과 교국 사절단 대표의 만남이었지만, 아렌에게는 뒤쪽으로 물러난 두 여성, 몰디나와 아르테 간의 만남이 더 큰 사건이었다.

‘독심술사와 진짜 점술가. 되도록이면 서로 물고 싸워주면 좋겠는데.’

아렌은 교묘히 동행한 발커스 뒤에 숨은 채 둘의 기색을 살폈다.

일단은 몰디나와 아르테는,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몰디나야 점을 쳐야 그 진가가 드러나겠지만, 아르테 역시도 우선은 눈앞의 황자 속마음부터 먼저 읽어야 할테니까.

‘…그렇군.’

아렌은 왜 아르테가 굳이 위장해서 제국으로 들어왔는지 알 것 같았다.

‘교국으로서도 제국과의 전운은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 전쟁을 부추기는 게 누구인지 알고 싶었을 테고. 굳이 복잡하고 효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밀정을 잠입시키는 것보다 아르테 하나 두는 게 훨씬 효과적일테니.’

그 결과 아르테 한 명에 의해 제국 고관들의 속마음이 낱낱이 파헤쳐지게 되겠지만, 그건 아렌 알 바가 아니다.

다만 아렌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

가웨인에 충분히 시선을 보낸 아르테는 곧이어 몰디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때마침 교국의 가짜 책임자, 퀴레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 아리따우신 분은, 소문이 자자한 전하의 비서관 시온 공이십니까.”

“시온? 황자의 일개 비서관일 뿐인데 미리 알고 있다니, 조사도 철저히 한 모양이군. 하지만 이 자는 아니오. 짐이 얼마 전 등용한 점술가지.”

“오오! 점술가! 그렇다면 여기 이분이 해를 떨어뜨렸다던 그 분이십니까.”

아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웨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건 여기 있는 이 녀석이지. 내 아우 레온나토스의 가신이지만.”

순간 교국의 사절로 온 모두의 시선이 아렌에게 집중되었다.

아렌에 대한 설명이 어떤 식으로 교국에 전달되었는지, 그건 아렌으로서도 알지 못하지만.

자연히 아르테의 시선도 아렌에게로 머물렀다.

아렌은 이를 꽉 악물었다.

‘이 멍청이. 왜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지?’

가웨인에게 다소 실례되더라도, 설령 도망치는 꼴이라 하더라도 아르테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물론, 이미 후회해봐야 늦었지만.

아르테의 시선이 아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의 꺼림칙한 시선. 순간 아렌은 모든 걸 포기했다.

‘이미, 다 틀렸어.’

“오오! 이렇게 어린 분이 멀쩡한 해도 떨어뜨린다는 분이십니까!”

“…해를 떨어뜨린 건 아닙니다. 제가 지정한 시각에, 우연히 해가 떨어진 것뿐이지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점괘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양국 사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말입니다.”

“양국 사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미천한 저는 모릅니다만,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허락해주시면 기꺼이 점괘를 봐 드리지요.”

하지만, 이 자가 아렌에게 점괘를 부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아렌의 정체는 아르테의 심안에 전부 까발려졌을 것이므로.

자신의 모든 점술이 사기이고, 단지 미래에서 왔을 뿐인 사기꾼이라는 걸 알아채고 경멸의 시선을 보내올 아르테에게, 아렌은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아르테는 아렌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교국의 심계 깊은 차기 대주교치고는 너무 무방비한 표정이라 아렌도 금방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당황하고 있어? 설마 내 속마음을 못 읽은 건가?’

아르테는 마치 시험하듯 가웨인과 몰디나, 그리고 아렌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리고 매번 아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당연히 보여야 할 것이 새까맣게 가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렌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운,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첫번째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뭐가 달라진 거지?’

역사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 무언가 변인이 생겼기에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아렌은 곧바로 한가지 변인을 떠올렸다.

‘내가 미래에서 되돌아와서?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 거지?’

생각에 빠진 아렌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르테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러다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제복부터 머리카락까지 죄다 하얀색인 아르테의 왼쪽 팔목에는, 도드라지듯 검은색 묵주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는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묵주의 재질은 분명 아렌의 반지와 같은 흑옥처럼 보였다.

‘…아트레움의 노인이 가졌던 피리도 분명 비슷한 재질이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렌은 자연스레 말했다.

“…실은 그렇게 말했지만 레온나토스 전하는 웬만해선 점괘를 보는 걸 허락해주십니다. 특히나 타지에서 오신 분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애초에 ‘점괘를 보기 위해선 레온나토스가 허락해야 한다’는 말은 아렌이 점을 거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그렇다는 말씀은-”

“타지에서 멀리 오신 분들께 제 미천한 재주가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면, 사양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원하기만 하신다면 기꺼이 한분 한분, 모두에게 점을 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점을 볼 때는 단둘이 있어야만 효험이 있다고 둘러대면 손쉽게 단둘이 있는 공간이 완성된다.

아렌에게 자신의 심안이 통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아렌은 아르테에게 찍힌 것이나 다름없다.

‘보잘 것 없는 수행원으로 위장했으니, 마음껏 움직이기엔 편하지만 누군갈 만날 때는 꽤 답답할 거야. 내가 궁금하겠지? 기꺼이 장소를 마련해주지.’

그리고, 마음을 읽지 못하는 아르테는 아렌에게 일반인이나 다름없다.

“오오, 그렇다면 그 호의 감사히 받기로 하지요. 형제, 자매님들 중 점을 보고 싶은 분 계십니까.”

손을 든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예전에 점을 봐줬던 교국 사제의 반응을 보면 태양교와 마찬가지로, 교국에서도 점술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손을 드는 사람은, 아렌의 말에 응하는 것도 외교의 일환으로 여겼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손을 든 사람 중에는, 여전히 아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르테도 있었다.

*****

황궁 외곽 너머에는 20곳이 넘는 별궁이 있다.

황궁과 이어져 있고 그곳의 주인 역시 황제이긴 하지만, 실제 사용과 권리는 임명된 별궁의 주인이 행한다.

3년 전, 레온나토스도 12살에 별궁의 주인 자리에 올랐다.

레온은 어릴 때의 방을 그대로 사용하고, 아렌 역시 고용인들이 묵는 숙소를 그대로 이용하기에 별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2년 전, 레온나토스의 별궁 공터에 기묘한 건물이 올라갔다.

검은 벽을 팔각형으로 쌓아 올려, 위에는 검은색 돔을 올린 기묘한 건물.

레온의 허락을 받고 아렌이 직접 세운 점술관, 낙일관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황궁 어느 곳에서나 도청의 위험을 지울 수 없다.

신축한 낙일관은 도청과 비밀시설을 최대한 배제해, 낙일관 안의 일은 오직 아렌과 점을 보는 사람 둘만이 알 수 있게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

아렌의 점술은 레온의 허락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실제로 낙일관을 사용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낙일관이라는 건물 자체는 이미 점술가 아렌의 상징과도 같이 자리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아트마와 평화의 진리성전 평교도 아르테라 합니다.”

꾸벅. 백색의 사제복을 입은 아르테가 허리를 숙였다.

머리가 기울자 은도금한 듯한 은발이 사르르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방이 검은 벽, 빛조차 최소화해 어두운 안에서 아르테의 모습은 꽤나 눈에 띄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레온나토스 황자 전하의 비서관 아렌입니다. 점술에 약간의 재주가 있는 정도이지요.”

아르테는 다가와 아렌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과거 아르테에게 속마음이 완전히 까발려졌던 아렌이기에 그녀 앞에만 서면 괜히 위축되곤 했지만, 지금은 그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내 마음을 읽지 못 하는 군.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당신도 낯설겠지.’

“꽤나 조용한 공간이군요.”

아르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낙일관 안쪽은 바깥의 소리와 완전히 차단되어있었다.

그 말은 곧, 안쪽의 소리 역시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혹여나 주변에 알리기 힘든 내용을 점치고 싶은 분들도 계실테니까요. 흔히들 황궁 안에서 비밀을 간직하길 바라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많이들 말합니다만, 평소에도 전 황궁 안에서 비밀스러운 공간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 안에서 하는 말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전적으로 절 믿어주셔야 하지만, 원하기만 하시면 지금 하시는 말들은 제 주인이신 레온나토스 전하께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그러셔야 할 겁니다.”

“……?”

아렌의 허울 좋은 말에 아르테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다시금 묻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말을 엿들을 만한 사람은 없겠지요? 이건 당신을 위한 말이기도 합니다.”

“…….”

‘뭐지? 이 여자, 지금까지 수행인을 연기하던 그 모습이 아냐.’

“다시 묻겠습니다, 아렌. 지금 하는 이야기는 오직 우리 둘만 아는 것이겠죠?”

당초 이곳을 지을 때 비밀공간 한두곳 정도는 남겨두자는 의견도 있었다. 유사시에 언제든 튀어나와 아렌을 지킬 수 있도록.

하지만 오히려 악용될 위험이 더 크다는 계산하에, 대외적으로 피력한 대로 이 안에서의 말은 정말 아렌과 의뢰자, 단둘만이 알게끔 지어졌다.

아르테의 심상찮은 반응에 이끌리듯 아렌도 답했다.

“-네. 이 안에서 나누는 말은 정말 누구도 들을 수 없습니다.”

“…확실히 낯설군요. 예전이라면 누군가의 진심을 아는데 이렇게 신경 쓸 필요 없었는데. 하지만 그 말을 믿기로 하죠.”

“무언가, 굉장히 은밀한 걸 점치려나 보죠?”

아무리 그래도 타국의 권력자의 최측근에 있는 점술가다.

무언가 굉장한 비밀을 물어보지는 않을 터.

하지만, 아르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아렌의 예상 밖이었다.

“…당신도 돌의 은총을 받은 거겠죠?”

“…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정말 이곳에서 하는 이야기가 단둘만의 것이 맞다면, 굳이 모른 체하지 않는 게 나을 거에요.”

아르테는 점술용 탁자 위로 자신의 왼팔을 턱, 올려뒀다.

아렌이 눈여겨봤던, 검은색 묵주가 묘한 존재감을 뽐내며 탁자 위에 있었다.

‘…확실히, 검은 돌을 아무리 조사해 봤자 알 수 있는 건 없었지. 아르테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고.’

서로의 나라가 다른 것과는 별개로, 아렌의 비밀은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도 알려져선 안 된다.

아르테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 다른 입장 아래서 기묘한 협력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다.

아렌은 말했다.

“-당신은 그 검은 팔찌인가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말.

하지만 아르테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 당신은?”

아렌은 자신의 반지를 보였다. 과거로 다시 돌아온 시점부터 미세하게 금이 가 있던, 흑옥 반지를.

“그래서, 이게 뭐죠? 당신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탁자 위의 촛불이 일렁였다.

어두운 방 안, 불빛은 작은 촛불 하나가 전부.

불그스레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걸 부르는 여러 이름이 있겠지만, 교국에서는 그것을 운명석이라고 불러요.”

“…운명석?”

“네. 마음을 담아 빌면 이룰 수 있을 만큼의 특별한 능력을 주는 돌을 말하죠. 겉보기엔 보통의 흑옥과 마찬가지라, 갖가지 물건으로 가공되는 모양이지만.”

“…당신이 그렇다는 걸, 교국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죠. 제 능력은 그들에게 신의 은총일 뿐인걸요?”

아렌은 촛불 아래 떠오른 표정으로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아르테 역시 아렌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속이고 있던 것이다.

아렌은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털어놓을 생각을 한 거죠?”

“그야,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운명석에 대해 숨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렌의 말이 멈췄다. 아렌의 사고가 어떤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는, 아렌의 생각을 읽을 수 없지만,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은 달랐다.

아르테는 아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아렌이 자신의 상황을 주변에 모두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아르테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그 반응은, 아렌 당신, 내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군요.”

“…….”

더 이상 속이는 것도 무의미하다.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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