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호오, 둘이 아는 사이였나?”
아렌과 몰디나가 아는 체를 하자 가웨인이 관심을 보였다.
“네. 몇 년 전부터 이따금 방문해주셨죠. 덕분에 궁금했던 성의 소식들도 알 수 있었고요.”
“호오, 아렌 공이 그랬다고?”
돌아보는 가웨인.
아렌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별것 아닙니다만.”
아렌으로선 그녀에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몰디나에게 황궁에서의 일들을 알려주지 않고, 황궁에 대한 궁금증만 들불처럼 번져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된다면.
금기를 어기고, 황궁에 대한 점괘를 스스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몰디나의 점은 아렌의 회귀까지 암시할 만큼 적중률이 높다.
괜히 황궁의 이것저것을 점치다, 아렌의 진상에까지 다다르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역시, 미리 써뒀어야 했나? 손을 더럽히는 걸 원치 않았고, 어딘가 이용할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마음 굳게 먹고 그냥 처리했어야 하는 게….’
그녀가 아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하필 레온나토스 최대의 경쟁자인 가웨인의 밑이라는 것도 문제다.
가웨인이라는 호랑이만 해도 문제인데, 그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다.
“흠흠, 아름다운 숙녀분? 전 레온나토스 황자전하의 가신이자 낮안개 기사단의 단장인 발커스라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발커스가 한껏 가다듬은 목소리로 앞서며 말했다.
아렌은 머리를 감싸 쥐었고, 후드를 눌러쓴 몰디나는 생긋 웃었다.
“발커스 경이시군요. 아렌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최근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고요.”
“아, 뭐! 활약이랄 것까지야! 최근 중부의 낙석길 도적단을 일망타진한 것은 좀 고되긴 하더군요! 핫핫핫!”
몰디나의 칭찬에 입꼬리가 귀에까지 걸린 발커스.
그리고, 가웨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렌이, 황궁의 사정을 계속 알려줬던 건가? 난 처음 듣는데.”
“네. 제가 전에 모시던 분과의 어떤 일로 연이 닿아서요.”
아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웨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아렌을 향했다.
“황궁 안의 점술가가, 황궁 밖의 다른 점술가를 찾아가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
“점술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백 명의 점술가가 백 가지 다른 점괘를 치기도 하지요. 몰디나는 꽤 유능한 점술가로, 저도 이따금 다른 곳의 시점이 필요할 때 찾곤 했습니다.”
“흐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
‘젠장. 가웨인이 의심하고 있어.’
궁궐 안에서 아렌의 이름값은, 신통하리만치 덕분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아렌의 능력이 의심받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 올린 이름값이 단숨에 무너지게 된다.
아렌은, 관심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가웨인 전하께 점괘를 내린 사람도 몰디나라는 말이군요. 어쩐지. 그렇다면 이해가 갑니다. 남쪽과 북쪽에서 온 손님이라. 얼마 전에, 비밀리에 교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더군요. 그들이 필시 남쪽에서 온 손님이겠죠.”
아렌은 몰디나의 실력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추켜세우는 말을 한다.
“제국과 교국은 필시 단교 직전까지 갈 것처럼 보였는데요. 교국에서 먼저 사절을 파견하다니. 이쪽의 ‘이상징후’를 저들도 알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요.”
“그렇지. 몰디나 양의 실력엔 정말 감탄했어. 그런데 아렌, 자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말 그대로 극비리의 방문이고, 아직 공표되지 않았을 텐데.”
“전하께서 알고 계신 이유와 같지요.”
황궁 내에 세력을 갖춘 자들은, 저마다 황궁 곳곳에 심어둔 독자적인 소식 창구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공공연히 말할만한 사실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시치미 뗄 필요는 없다.
“교국은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겠지만, 제국과의 사이가 파탄으로 치닫는 것은 역시 경계하겠지요. 제국을 옭아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은광석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요. 저들 역시 속이 타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과연. 자네 말은 알겠네.”
가웨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 공으로서의 의견이고, 나는 점술가 아렌의 의견이 더 궁금한데.”
“전, 사사로운 이유로 저에 대한 점을 보지 않습니다.”
아렌이 피해 가려 했지만, 가웨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렌공이 본 점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더글라스 경의 분실물을 찾아줬을 때나, 세리엔과 한 내기들은 모두 네 사사로운 이유 때문 아니었나?”
‘…쳇. 아픈 곳을 찌르는군.’
“…그것들은 모두, 점괘가 틀리더라도 저나 남의 미래에 큰 영향이 없는 것들이었죠. 하지만 가웨인 전하의 앞에서 점을 보았을 때, 그 영향력은 작을 것 같지 않군요.”
가웨인은 싱긋 웃으며 몰디나를 돌아봤다.
“그럼, 우리 몰디나 양은 어떻지? 지금 점을 봐줄 수 있겠나?”
가웨인의 목적은, 아렌과 몰디나의 점괘를 최대한 많이 마주치게 하는 것이었다.
둘의 점괘가 모두 맞으면 몰디나와 아렌의 실력이 같아지니 아렌의 독주를 막을 수 있고, 서로 다른 점괘 중 몰디나의 점괘만 맞으면 더할 나위 없다.
설령 몰디나의 점만 틀리더라도 외부에서 잠시 데려온 인물일 뿐. 가웨인의 명성에는 타격이 없다.
아렌으로선 타파할 수단이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몰디나는 가웨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불쾌하군요. 이런 식으로 경쟁하듯 점을 보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에요.”
“…그렇군. 이거 실례했네.”
몰디나의 말에 가웨인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몰디나를 가신으로 삼았지만, 기간제인 만큼 몰디나의 행동에 제약은 없었다.
‘…과연. 몰디나를 통해 나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겠다?’
가웨인은 이후에도 아렌의 권위를 흔들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비록 상대가 정말 영험한 점술가라 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
아렌의 점술은 가짜가 맞지만, 가짜는 가짜 나름의 방식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있을 가웨인의 도발을 어떻게 대처할지, 아렌이 고민하는 사이.
-웅얼웅얼.
바람에 실려 저 멀리서, 한곳에 모인 수십 명의 웅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가웨인은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태양교도들인가. 궁 안 어딘가에 예배 공간을 차려준다는 말은 들었지만.”
태양교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가웨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긴, 독실한 태양교 신자였던 고드프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당연할지도.’
“시끄럽고, 천박한 놈들이야. 저런 식으로 궁 안에서 자신들의 위세를 자랑할 셈이겠지.”
“그런가요? 어떤 경우에도 신앙 자체만으로는 나쁜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몰디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렌이 첨언했다.
“태양교도들은 점술사와 점괘를 부정해요. 치졸한 미신으로만 여기죠.”
“어머. 완전 나쁜 사람들이네요.”
몰디나는 태도를 바꿔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발커스 역시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렌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궁 안에 두 개의 다른 교단이 들어와 있다는 말인데. 하나는 정식으로 제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하나는 파탄 직전인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발밑 아래서 거대한 무언가가 소용돌이 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양반은 못 되시는군.’
“아…”
저 멀리서, 회랑의 복도를 따라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아트마 국의 사절이 나타났다.
시선으로 보나 걸어온 방향으로 보나, 황궁 어딘가에 마련됐을 태양교의 예배장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가웨인을 보고 잠시 눈을 끔뻑이다, 곧 황자인 것을 알아챈 듯 머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첫 번째 삶에서 교국의 인사와도 몇 번 접촉했던 아렌이지만, 인솔자인 듯한 중년 남자는 기억에 없는 자였다.
“평안하십니까. 아트마 국의 사절단으로서 방문한 주교 퀴레스라 합니다.”
“…수고가 많군. 난 셰오덴의 네번째 황자 가웨인이오.”
“오오, 제국의 검성 후보를 뵙습니다.”
자신을 주교라 밝힌 남자는 더욱 머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근육의 모양이 검을 배웠음 직한 수행인 몇몇의 몸이 움찔거렸다.
한 세대에 대륙 전체에서 몇 명 나오기 힘든 검성이라는 이름. 그 유력한 후보를 앞에 뒀다는 것만으로 무인으로서 피가 끓는 거겠지.
“…검성 후보라. 황제 후보가 아니군.”
주교의 말에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가웨인을, 아렌은 놓치지 않았다.
사절단은 총 열 명이었고 그들을 보호, 혹은 감시할 목적으로 네 명의 제국 병사가 따라붙어 있었다.
힘깨나 쓸 법한 수행원 네 명과 나머지는 시녀들로 이뤄진 듯한, 평범한 구성.
아렌은 그들의 면면을 무심한 표정으로 훑었다.
그리고, 아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새침한 표정을 한 채, 시녀의 복장으로 주교의 뒤에 선 자.
아렌의 기억에 있는 것은 물론, 요주의 인물이었다.
‘…아트마 대주교?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여인의 몸으로 차후 아트마 교의 대주교 자리에까지 오르는 여제, 아르테였다.
*****
아렌은 과거를 떠올렸다.
‘흠, 자네가 점술가 아렌인가? 듣자 하니 황자들은 물론, 궁을 방문한 손님들에게까지 점을 봐준다고 하던데.’
‘보잘것없는 재주입니다. 그저 잠시 즐겨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이 섬기던 레온나토스는 황권 경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아렌의 점괘 역시 레온의 독점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재에 더 가까웠다.
주위에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제1 목표였던 아렌에겐 더할 나위 없는 환경.
그리고,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아렌의 점괘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점술이 틀릴 가능성은 적당히 두루뭉술한 점괘로 넘기는 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23살의 아렌은 당시 교국의 주교였던 아르테를 만난다.
‘보잘것없는 재주라. 그렇지는 않은데요? 사람의 속마음을 가늠하는 재주는 대단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점술과는 거리가 먼 것 같군요. 하물며 미래를 예견하다니.’
‘…….’
‘당신, 거짓말을 하면 재밌나요?’
아렌은 아르테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을, 아렌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
‘여제, 아르테.’
대주교에 오르면서 사람들은 아르테를 ‘여제’라고 불렀지만, 더 많이 불린 별호가 있었다.
심안.
보는 것만으로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자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행히, 첫 번째 삶에서 그녀는 무슨 변덕에선지 아렌의 비밀을 지켜줬다. 아렌이 받은 건 동정과 경멸의 시선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아렌은 뒷걸음질 쳤다.
‘저 여자는 마음을 읽어. 가까이 가면 안 돼.’
사람의 속마음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아렌과 비슷했지만, 그 수준이 질적으로 달랐다.
사람의 마음을 물로 비유한다면, 흐르는 물의 파형이나 흐름, 색으로 물 속이 어떤지 유추하는 것이 아렌이었다.
반면, 몰디나는 직접 잠수해 보고 만지며 물 속이 어떤지 직접 밝혀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요주의 상대였기에 아렌의 긴장은 최고조였지만, 어떤 묘한 기대도 동시에 들었다.
몰디나와 아르테를 번갈아 보며 미래에서 온 자, 아렌은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와, 진짜 점괘를 내리는 자.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