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레온나토스는 황궁의 높은 창 너머로, 저 멀리서부터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선명한 태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짙은 보라색의 복장이었다.
황실의 초청으로 방문한 선페일 지역의 태양교도는, 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거처에 들어서면서도 기세등등했다.
‘그럴 수밖에. 새로 발견된 은광 대부분이 태양교가 가진 토지 안쪽이니.’
레온의 뒤에서 행렬을 바라보던 아렌도 입맛이 썼다.
제국읜 교국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한 만큼 원만한 은괴 공급을 위해 태양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와 아렌에게 태양교는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고드프리의 뒤를 봐주던 미심쩍은 집단일 뿐.
‘태양교는 고드프리와의 연루를 극구 부인했지만, 그간 보인 행보에서 뒷배가 되어준 것도 사실이지. 덕분에 그간 제국으로부터 박해 아닌 박해를 당했으니, 태양교로서는 이번 기회에 만회하고 싶은 모양이지.’
굳이 고드프리와 얽힌 일을 차치하더라도, 아렌은 태양교도가 싫었다.
첫 번째 삶에서 사사건건 아렌과 충돌했었고, 언제나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렌. 전에도 말했듯 난 저들이 싫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곧 진리라는 듯한 독선이 싫고, 우리를 위해 계몽을 한다는 위선이 싫다. 차라리 똑같은 광신이라 하더라도 아트마 교도가 더 낫지. 그들이 속으로 우리를 멸시할지언정, 우릴 교화하려 들지 않으니.”
물론, 제국으로선 교국은 물론 아트마 교 자체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국경지에서는 아트마 교도가 속속 발견된다고 합니다. 자신들만의 나라도 있고요. 제국에 있어서는 태양교 따위보다 몇 배는 더 큰 위협이지요.”
피식, 레온나토스는 실소했다.
“제국은 제국민들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아. 아트마 교 역시 수많은 신앙들 중 하나일 뿐. 아트마 교를 탄압하기 위해선 그만한 명분이 필요하지. 설마, 아트마 교를 탄압할 명분을 위해 태양교를 국교로 지정이라도 할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죠. 제국은 아트마 교와 교국을 견제할 수 있고, 동시에 태양교가 손에 쥔 은괴도 수월하게 거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될 리는 없겠지만. 이야기만으로도 역겹군.”
“네. 물론 지나친 비약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0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군.’
황제와 독대한 이후, 아렌의 머릿속은 줄곧 복잡했다.
곧 전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황제가 이곳저곳에 귀띔한 것은 사실.
황제는 전쟁을 막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손을 쓰려고는 하지 않으며, 누가 범인인지도 모른다.
‘가장 유력하다 생각했던 건 가웨인이지만-’
“레온나토스. 명당을 잡았구나.”
“아, 가웨인 형님. 오셨습니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제국의 제4 황자, 가웨인이 다가왔다.
5년 전만 해도 가웨인에게 레온나토스는 수많은 동생 중 하나였을 뿐. 별다른 흥미를 끌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레온나토스는 유력한 차기 황태자로 손에 꼽히는 가웨인과도 경쟁하기 손색이 없었고, 가웨인은 오히려 레온나토스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더 가까이했다.
‘겉으로만 레온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말 진실로 여긴다는 게 웃긴 노릇이지.’
그것이 가웨인이 더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웃는 얼굴 뒤에서 칼을 준비하는 상대였다면 오히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렌에게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본인의 능력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는 만큼, 레온나토스는 가웨인에게 상대할 맛 나는 좋은 상대인 거겠지.
“참. ‘그’ 일은 비서관 시온에게 들었다.”
주변에 다른 이가 없는 걸 확인한 가웨인이 느닷없이 말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황제의 전쟁 예고를 말하는 것이다.
“네. 저희 모두 같은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요.”
“흠. 정말 그런가? 조금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가웨인은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시온은 ‘그’ 일이 일어났을 경우 내 5년 전 허물이 재조명될까 봐 걱정하더군. 물론 그 우려는 합당하다만, 달리 생각할 수도 있지. ‘그’ 일이 일어났을 때야말로 나와 내 부하들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고,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인즉슨, 자신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손을 더럽혀 그 일을 일으키려면 기꺼이 그 상황을 이용하겠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는 아니지만,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다.
가웨인이 하는 말은 전부 빈틈없이 이치에 맞았다. 거기에 더해-
‘지금 가웨인 황자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야.’
가웨인은 속내를 숨기지 않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유리처럼 투명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아렌이 별 노력 없이도 가웨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끔.
“…형님은 ‘그’ 일을 막는 데 도움을 주시지 않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 말 그대로야. 물론, 시온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니 내 입장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비서관에 전폭적인 믿음이 있는 가웨인은 약간의 여지를 남겼다.
껄끄러운 이야기를 뒤로하고, 가웨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북에서 온 손님’은 꽤나 화려하게 도착하셨군. 그럼 ‘남에서 오는 손님’은, 역시 교국의 작자들이겠지?”
“네? 남에서 오는 손님이라니요?”
생소한 표현에 레온나토스가 반문했다.
대답하려는 가웨인의 시선이 문득 아렌을 슬쩍 스쳐 갔다.
“아, 레온 넌 아직 모르나? 실은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손님이 온다는 사실을 귀띔해준 자가 있어서 말야.”
“…정보원입니까? 하지만 나라 안팎의 기밀을 그리 간단하게-”
“아니. 내가 말해준 자는 단순한 점술가일 뿐인데.”
“…….”
가웨인의 말에 아렌은 긴장했다.
‘…점술가?’
“꽤나 잘 들어맞더군. 그런 건 믿지 않는 편이었는데. 생각을 달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겨질 만큼.”
“확실히, 형님이 점술가를 등용하는 건 잘 안 어울리는군요.”
“레온나토스 네가 사용하는 걸 보니 꽤나 좋아 보이더구나. 그래서 우리도 하나 장만했지.”
가웨인이 스스럼없이 그리 말했을 때, 이미 레온나토스는 정면으로 가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자. 안돼.’
“말씀 삼가시지요. 아렌은, 제 도구가 아닙니다.”
“음, 그랬나? 그랬었군. 이거 내가 실수한 모양이야.”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않은 채 가웨인은 순순히 사과했다.
애초에, 가웨인은 일부러 레온나토스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한마디 말로서 레온나토스를 흔들었을 때, 어디를 얼마나 흔들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내 말에 오해가 묻었던 모양이군. 단지 난, 레온 네가 지금껏 가신들을 꾸리고 세력을 구축한 데 아렌의 공이 꽤 컸다.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렌이 점술가여서가 아니라, 아렌과 다른 가신들의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유 ‘도’ 있겠지.”
“…….”
두 황자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신이 내렸다 해도 좋을 검술 솜씨와, 뒤따르는 흉흉하고 포악한 소문으로 황궁 내에서 존경과 혐오를 동시에 받는 제4 황자 가웨인.
본래 황자들 중 가장 총명하다고 평가되었지만, 나이가 차면서 점점 그 진가가 드러나는 제12황자 레온나토스.
황궁 안의 서열으로 보나, 이 자리의 기세로 보나 우세인 건 가웨인이지만, 레온나토스는 자신보다 열 살 이상이나 더 차이 나는 큰형 가웨인을 상대로 크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5년 전이었다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그림.
‘하지만 아직은 가웨인과 대적할 때가 아니야.’
여기서 아렌은 한번 흐름을 끊었다.
“…점술가라.”
팽팽히 맞서던 두 황자의 시선이 단번에 아렌에게 향했다.
“이번에 가웨인 전하께서 새로이 등용했다는 점술가라니, 같은 재주가 있는 자로서 누구인지 꼭 만나 뵙고 싶군요.”
“아, 물론 아렌 자네가 보고 싶다면 안내해줄 수 있지. 서로 통하는 것도 있을테니. 조만간 시간을 내도록 하지.”
“하해와 같은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렌. 자네는 이번 태양교의 행차를 미리 예견하지 못했나?”
가웨인은 느닷없이 아렌의 아픈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렌은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미리 점쳐본 적이 없던 지라.”
아렌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선페일 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되고, 태양교도들이 황궁에 방문하는 건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첫 번째 삶에서는 돌멘이 죽지도 않았고, 고드프리 황자가 궁에서 축출당하지도 않았다.
무엇이 어떤 연유로 변수가 될지 모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예언은 아렌으로선 불가했다.
‘…내 약점이지. 5년간 제국 곳곳에 밀정을 뿌려두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힘이 되어주기엔 숫자가 부족해.’
아렌에게 도착할만한 내용이라면, 이미 황궁이나 다른 황자들도 비슷한 첩보를 받았을 터.
밀정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점술로서 아무 가치가 없다.
‘가웨인 황자가 데려온 점술가는, 밀정보다도 먼저 정보를 가져왔다 이거지. 속임수, 혹은 정말 실력 있는 점술가인가?’
세리엔 황녀의 전 시녀이자 점술가였던 몰디나. 5년 전부터 최근까지도 가끔 그녀의 동향을 살폈던 아렌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귀띔이 있고 몇 주간은 그녀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조만간 확인해봐야겠어.’
그리고, 가웨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렌의 수고를 덜어주게 된다.
*****
레온 황자의 비서관 아렌과 레온 직속의 낮안개 기사단의 기사단장 발커스가 황궁의 복도를 나란히 걸어갔다.
낮안개 기사단.
40명이 채 되지 않는, 그리 규모가 크지 않는 기사단이었지만, 황자 개인을 호위하는 데는 차고 넘치는 숫자다.
가웨인 황자는 황궁 내 사병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300명도 넘겠지만, 가웨인이 미치지 않고서야 황궁 안에서 그런 대대적인 칼부림을 일으킬 리 없으니.
레온의 명성도 점점 높아져, 기사단 외의 호위병들도 더욱 모집을 했다.
레온나토스의 개인 호위병이 70을 넘겼을 때, 그만큼 호위의 부담이 줄어든 낮안개 기사단은 레온나토스의 이름으로 제국 곳곳의 크고 작은 분쟁지에 파견되어 그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번에도 중부 황무지에서 전공을 세우셨다고요. 대단하군요, 발커스. 여전히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없었다고요.”
자신의 전공이 그리 싫지 않은 발커스는 레온나토스의 말을 당연하게 받았다.
원래도 출세할 욕심이 있었던 발커스기에, 요즘 레온나토스와 자신의 위치가 썩 마음에 드는 것도 당연했다.
“이게 다, 아렌 공의 점괘 덕분이죠 뭐. 이제는 부하들도 아렌 공의 점괘 없이는 출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까요?”
‘…덕분에 나만 죽어나는 꼴이지.’
아렌이 기사단에게 해주는 ‘점괘’는, 사실상 정보원들을 뿌려 얻어낸 정보에 그럴듯한 말을 섞은 것뿐이었다.
산적이 많은 곳에선 ‘높이 있는 자들을 조심해라’, 기묘한 역병이 도는 곳에선 ‘정령의 분노가 서린 땅이니 밟지 말아라’ 등등.
하지만 미래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은 기사단은 그 별것 아닌 조언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었고, 정말 마음가짐 때문인지, 혹은 운이 좋았는지 낮안개 기사단은 그동안 한 명의 인원 손실도 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아렌과 발커스는 먼저 약속 장소인 황궁 외원의 회랑에 도착했다.
건물의 외부에 긴 지붕만 있을 뿐, 사방이 뚫려있어 저 멀리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는 점이 좋았다.
아무리 아렌이라도, 여러 흉흉한 소문이 있는 가웨인과 밀실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아렌 공 부탁이니 기사단장인 제가 이렇게 직접 들어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누굴 만난다고요?”
“아, 아직 말 안 했던가요?”
가웨인은 조만간 자신의 점술가를 소개시켜준다고 말했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리고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진영에서 제법 무게감 있는 인물.
설마하니 황궁 한복판에서 살해당할 리는 없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이미 5년 전에 그런 시도가 있기도 했으니까.
발커스라면 설령 가웨인이 직접 덤벼들어도 아렌이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어줄 것이다.
아렌이 발커스를 대동한 것도 여차할때 그를 인간 방패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런 일은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겠지만.’
“가웨인 제4 황자께서 자신의 새로운 가신을 소개해준다 하셨거든요.”
“…가웨인 전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랑 너머에서 가웨인과 한 여인이 나란히 걸어왔다.
발커스의 눈은 단숨에 경계 반, 선망 반이 되었다.
“이런, 황궁제일검을 상대론 지켜준다 어쩐다 큰소리 못 치겠는데요.”
“발커스 경의 희생은 고맙게 여길게요.”
“…벌써 꼬리 자를 궁리입니까. 뭐, 어쩔 수 없지만요.”
아렌이 발커스를 조금 골려 먹는 사이, 가웨인과 여인은 점점 가까워졌다.
옆에 전혀 호위를 대동하지 않은 것도 가웨인다웠지만, 아렌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아렌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몰디나. 과거 세리엔 황녀의 시녀이자, 진짜 신통한 힘을 가진 점술가였다.
아렌과 같이 숨겨진 사정이 있거나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닌, 정말 적중률이 높은 점괘의 점술가.
“먼저 와있었군, 아렌. 이쪽은 몰디나라 하네. 한동안은 내 가신으로 있을 거네”
아렌이 모를 리 없었다. 아렌은 겉으론 자신의 당황을 감춘 채 웃는 얼굴로 몰디나를 맞이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몰디나. 역시 성 밖에 있기엔 아까운 솜씨라 생각했습니다.”
“반갑군요, 아렌. 여전히 이곳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못다한 것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오게 되었군요.”
‘…못다 한 것을 이루려는 것을, 바로 미련이라 부르긴 하지.’
“뭐야, 둘이 구면이었나?”
몰디나를 소개하며 아렌의 반응을 보려 했던 가웨인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긴장한 아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커스는 눈치도 없이 옆에서 속삭였다.
“…아는 사이십니까? 분위기가 그윽한 게, 딱 제 취향인데요? 저한테도 소개시켜주시죠?”
“…….”
아렌은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