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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54화 (54/227)

#054화

“누굴 기다리고 있나, 아렌?”

레온나토스의 세력이 커지자, 그의 비서관인 아렌에게도 집무실이 하나 배정되었다.

레온나토스의 집무실과 완전히 붙어있는 공간이긴 했지만, 이 번듯한 집무실은 아렌의 업무가 예전과 달리 단순히 황자의 비서 역할 이상이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였다.

“네. 시온 비서관이 면담 신청을 보내와서요.”

“시온이라면, 가웨인 형님의 비서관 말인가?”

“네. 마침 찾아오지 않을 거라면 제가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죠. 수고를 덜었습니다.”

“그녀라면 날 기다리지 않을까? 내가 마중 나가는 게-”

“아뇨. 시온은 저만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이유라도 있나?”

“자칫 전하와의 독대가 쉬운 걸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흔쾌히 접견을 허락할 정도라면, 동급인 가웨인 전하 정도는 오셔야지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온, 가웨인의 두뇌라 불리는 자에게 굳이 레온 황자의 반응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지.’

서로 주고받는 말보다, 슬쩍 떠본 말과 그에 따른 반응에서 더 양질의 정보가 나오기도 한다.

군사적 역량과 무력에 집중한 가웨인 황자의 집단에서, 시온만이 유일하게 두뇌라고 할 만한 자.

“자, 그렇게 되었으니 전하께선 얼른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아니, 나도 궁금한데 가만히 듣기라도 하면 안 되나? 아니면 숨어서라도-”

“자, 어서요.”

짝짝.

손뼉을 치면서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킨 아렌.

쩝, 입맛을 다신 레온나토스는 순순히, 하지만 터덜대는 발걸음으로 옆방으로 향했다.

‘괜히 시온 좋은 일을 시켜줄 수는 없지.’

얼마 뒤.

하인의 안내를 받고 가웨인의 비서관 시온이 아렌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제 서른 중반의 나이에 다다른 시온이었지만 보기에 따라 20대로도, 40대로도 보였다.

무술, 혹은 전략전술에 능한 자 투성이인 가웨인 황자의 진영에서 유일하게 내정에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자.

아렌으로서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자였다. 레온나토스를 옆방으로 물린 것도 혹시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시온에게 주게 될까 걱정되어서였으니.

‘예전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추는 게 쉽지 않았는데, 요즘은 더더욱 그렇단 말이야.’

마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방 안으로 들어온 시온은 아렌이 권한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면담 신청을 이리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렌.”

“천만에요. 시온의 요청이라면 응당 응해야지요. 그래서,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시온.”

황궁의 많은 사람들은 아렌의 이름값이 높아지고 실권을 잡고 나서야 깔보는 눈길을 거뒀는데, 시온은 아렌이 파격 발탁되었던 열 살 무렵부터 이미 아렌을 높게 보았었다.

주변의 평가나 달라진 지위에 흔들리지 않는 그 태도가, 더욱 경계되는 아렌이었다.

시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방문한 건 다름이 아니라, 최근 제국의 급작스러운 행보에 저의가 무엇인지, 아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입니다.”

“제 의견이요? 저야말로 시온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는데요.”

아렌도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하지만 설령 무언가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시온에게 할 말은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시온도 그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터.

먼저 자신의 패를 내보인 건 시온이었다.

“얼마 전, 영광스럽게도 황제 폐하를 단독으로 영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곳에서 실로 놀라운 전언을 들었지요. 그리고 제 예상이 맞았다면, 아렌 역시 저와 같은 내용을 들었을 텐데요.”

“그런가요?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그러죠?”

“…….”

아렌은 무심한 듯, 찌르는 듯한 시온의 시선을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아렌은 혹시나 싶어 발뺌해봤지만 시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물론 아렌도 통하기를 진지하게 바란 것은 아니다.

아렌은 말했다.

“…후우. 일단 전, 레온나토스 전하께는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군요. 전 아직 가웨인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네. 가웨인 전하께선 이런 쪽 일은 전부 다 제게 일임하셨거든요.”

암막과 촛불, 다른 도구로 분위기를 잡은 뒤 점술의 형식으로 분위기를 돋우지 않는 한 아렌으로서도 시온의 생각은 쉽게 엿볼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지금 그녀가 하는 말에 거짓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전쟁 암시를 시온에게도 했다고? 역시 전쟁은 황제의 뜻이 아닌 건가?’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면 굳이 그 사실을 사전에 이곳저곳에 흩뿌릴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전쟁 의도를 황자들끼리 서로 견제해서 막으라는, 황제의 의도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그리고 동시에, 황제조차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사실 역시도.

“그런데, 아렌께서는 짐작 가는 구석이 없으신가 봐요?”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일’이 벌어진다면, 분명 유리한 쪽이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전 영락없이…”

시온은 말끝을 흐렸다.

‘그 일’은 역시 제국과 교국 간의 전쟁을 뜻하겠지만, 어딘가 엿듣는 귀가 있을지 몰라 시온은 단어선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렌이 반박했다.

“레온나토스 전하에게 유리하다? 오히려 전 그쪽을 의심했는데요. ‘그 일’이 벌어지면 그쪽의 장기를 여지없이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 원인으로 5년 전의 불공정했던 조약까지 거론되겠죠. 그 조약을 체결한 가웨인 전하의 책임론도 불거질 테고요. 가웨인 전하를 실각시키기엔 절호의 무대라고 생각지 않나요?”

“그건, 그렇군요.”

아렌은 레온나토스 측이기에 레온에게 불리하고 다른 황자에게 유리한 측면만을 생각했지만, 다른 황자들에겐 또 다른 입장들이 있는 법이다.

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군요.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그 일’과 아무 관련이 없으시다는, 그 입장은 알고 있겠습니다.”

“네. 더 자세한 건 조만간 황자님들이 대동한 자리에서 듣기로 하지요. 만약 저희의 입장이 같다면 서로 손을 잡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쉽게 협력이 가능하다면 그렇겠죠.”

만약 황자끼리 만난 자리에 아렌도 동석하게 된다면, 속내를 쉬이 파악할 수 없는 시온보다 가웨인의 속내를 살피는 게 더 도움될 수도 있다.

“‘그 일’에 대해선, 조만간 가웨인 전하께 알려드릴 생각입니다. 오늘은 일정이 있으셔서 어렵겠지만요.”

시온은 아렌이 묻지도 않았는데, 가웨인의 일정을 굳이 밝혔다.

“실은, 가웨인 전하께서 조금 특별한 손님을 만나고 계시거든요.”

“…특별한 손님?”

정작 그게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시온은 아렌 앞에서 묘한 웃음만 지었다.

*****

황궁 외곽에 있는 별궁의 접견실에서, 장신에 마른 남자가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무렇게나 드리운 치렁치렁한 백발에, 말랐지만 탄탄하게 붙은 근육.

제국의 제4 황자 가웨인은 오랜 수련으로 해질 대로 해진, 금실로 수 놓인 적색 옷을 입은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접견실 안에는 가웨인 혼자.

호위조차 대동하지 않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궁 안에서 가웨인보다 무력이 강한 자는 사실상 없었고, 단신으로 대적할 수 있는 자조차 한 손으로 꼽았으니까.

반면 맞은 편에 앉은 자는 무술이라곤 전혀 익혀본 적 없는 듯한 젊은 여성이니 호위가 필요 없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십 명은 족히 들어올 법한 공간 안에 단둘, 그것도 맞은 편에는 제국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 앉아있는 상황.

위축될 법도 한 데도, 정작 그 여성은 궁이 퍽 익숙한 듯 앞에 놓인 차를 태연하게 홀짝였다.

가웨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꽤나 이런 자리가 익숙한 것 같군. 눈앞에 제국의 황자를 두고 있는데도 말야.”

“네. 저도 예전 황녀님을 모셔본 적 있는지라.”

“그랬지. 그런 약력도 있었지.”

제국의 유력한 황태자 후보, 가웨인을 앞에 두고 태연히 차를 마시는 짙은 색 후드를 덮어쓴 여성은, 예전 세리엔 황녀의 시녀이자 점술가였던 몰디나였다.

“내가 궁 밖에 있는 널 찾아간 이유는, 잠시 이 궁에서 네 힘을 빌려줬으면 해서다.”

“아무리 용한 점이라 해도 그것은 유희 이상이 되기 어려운 잡기(雜技)입니다. 제국의 황자께서는 이런 불확실한 잡기에 연연하실 필요 없지 않으십니까.”

“실은, 그 잡기가 꽤나 유용하거든.”

5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12황자 레온나토스.

10살 생일을 맞아 제 나이 또래의 시동 하나를 두었고, 그 직후 레온나토스는 눈에 띄는 행보를 거듭해 지금은 제국의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에 당당히 포함되었다.

그 레온나토스 또래의 시동, 아렌은 점괘 없이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에 존재감을 더욱 과시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신통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점술 실력 덕분이었다.

이제 아렌의 점술은 황궁을 찾는 외부인들은 물론, 가웨인의 가신들까지 찾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렌이 궁에서 갖는 무게감은 곧바로 그의 주인, 레온나토스에게 위임된다.

“사람들은 자신, 혹은 남의 미래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윽박지르며 눈 가려봤자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질 리는 없으니. 그러니 상대가 미래를 보여준다면, 이쪽 역시 미래를 보여줘야지.”

그렇기에, 가웨인은 예전 궁에 있었다는 다른 점술가를 어렵게 수소문한 것이다.

아렌이 5년 전 그녀와 접촉한 이후, 그녀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지만, 궁 안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먼저 말씀드렸듯, 저는 황궁 안 생활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습니다. 성 밖에서의 생활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하나, 궁에서 못 다한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것을 이룰 때까지는 황자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지요.”

“…못 다한 것?”

“네. 이 궁에서, 제 점술에 대한 불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5년 전 세리엔과의 내기로 찾아왔던 아렌은, 그 내기에서 다시금 몰디나의 점괘가 틀렸다는 말만을 남겼다.

물론 그게 이상하지는 않다. 점술은, 적중률 100%의 법칙 같은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황자 돌멘의 죽음과 세리엔 황자의 내기. 유독 황궁 안에서 치는 점괘만이 이토록 빗나가는 것이 세리엔은 못내 못내 궁금했다.

물론 둘 아렌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한다.

“불명예라. 목검 한번 잡아보지 않은 것 같은 자가, 제법 무사와 같은 말을 하는군. 그렇다면 어디 간단히 점을 쳐보겠나?”

“…그렇다면, 가까운 시일 내 궁에 있을 일들을 점쳐보도록 할까요?”

몰디나는 카드를 차례차례 늘어놓았다.

아렌처럼 한 장, 혹은 두 장이 아니라 위아래로 길쭉한 마름모꼴로 열 장을.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과는 점술 방식이 다르군.”

“그런가요? 백 명의 점술가가 있다면 백 가지의 다른 방식이 있다고는 하지만요.”

“흐음.”

몰디나는 늘어놓은 카드를 한 장씩 들어 올려, 그것이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 얼굴을 반쯤 가린 여성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장면은 그 자체로도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원래라면 시큰둥했을 가웨인조차도 조금 빠져들 만큼.

사실, 가웨인은 원래 점술 따위 믿지 않았다.

한시적으로 몰디나를 등용한 것도 어디까지나 또 다른 점술가를 통해 아렌의 존재감을 다소 깎아내기 위한 것뿐.

기술을 갈고닦고, 육체를 단련한 가웨인은 점술과 같은 무형의 것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그림이 되는군. 제법 혹할 사람이 있겠어. 하긴, 그러니 레온나토스의 서기관도 그만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천천히 카드를 한장씩 뒤집으며, 감았던 눈을 뜨는 몰디나.

가웨인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 뭐가 나왔나?”

“네. 곧 손님이 오겠군요.”

“손님이라? 어디에서?”

이어진 몰디나의 대답은 묘했다.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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