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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53화 (53/227)

#053화

“…….”

황궁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지만, 아렌은 황제의 발언 뒤에도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의 진위가 무엇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가. 짐의 점괘가 맞을까, 틀릴까?”

황제가 조아린 아렌에게 물었다.

물론 우문이다.

황자는, 어떤 점괘가 나오든 대부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니까.

‘문제는, 황제의 의도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아렌에게 저런 말을 했는지. 그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살얼음판 위와 같은 지금의 형국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없다.

원래라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냉수를 마시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온몸을 화려한 옷으로 감싸고, 가면으로 얼굴과 눈마저 가린 황제.

빤히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죄가 될 수 있는 상대다.

‘정리해보자. 교국과의 전쟁이 황제의 뜻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으므로.

먼저, 교국과의 전쟁이 황제가 원하는 것일 경우다.

가장 무리 없는 가설이고, 점괘의 형식을 빌려 아렌에게 먼저 통보한 것 역시 레온나토스의 동의를 구하거나, 아렌의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교국과의 전쟁이, 황제의 뜻이 아닌 경우.

교국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고 이미 외교로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랐다면, 황제의 점괘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 경우 아렌에게 점괘를 꺼낸 의미는 ‘네가 힘을 써서 일어날 전쟁을 막아다오’라는 뜻일 것이다.

‘…어느 쪽이지? 어느 대답을 하는게 가장 옳은 길이지?’

되돌아갈 수 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 한번 막다른 길을 만나면 그대로 끝인 미로에서, 한붓그리기로 활로를 찾아가는 듯한 감각.

설령 셋 중 누가 황제인지 알아도, 아렌이 볼 수 있는 건 표정은 커녕 안색조차 숨긴 두꺼운 금가면 뿐이다.

‘답이 없는 문제를 계속 고민해봤자 소용없지.’

아렌은 황제의 생각을 읽는 걸 포기하고, 유불리로만 접근했다.

“제 점괘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되어있군요.”

“…호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국고가 탕진된다거나, 국민들이 고통받는다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가 전시체제가 되면, 자연스럽게 무력에 장점이 있는 황자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레온나토스 황자는 말하자면 내정형. 나라가 평화로울 때 빛을 발한다.

“방금 네 점괘는, 황자를 위한 점괘인가?”

“제가 열과 성을 다해 얻은 점괘입니다, 폐하. 물론 점괘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미래가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군. 하지만 일어날 전쟁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잘못 점괘 내린 거라면, ‘미래가 바뀌었다’는 농담으로 넘어가긴 무리가 있을 텐데.”

‘…그렇지. 그러니 나로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손을 써야겠지.’

다행이라면, 어조만 들어 보면 황제의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황제 역시도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뜻.

‘교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제국을 상대로?’

생각에 잠긴 아렌에게, 황제는 느긋하게 말했다.

“어디 솔티르의 재림께서 내린 점괘가 사실인지 아닌지. 기대하도록 하지.”

*****

아렌은 황제와 있었던 일을 곧바로 레온나토스에게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폐하께서 전쟁을 원하는 것인지, 혹은 다른 자들이 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그래? 아렌, 네 점으로 알아보는 것도 힘들겠나?”

“네. 직접 만나보지 않은 상대를 점치는 것은 힘든 일이고, 점괘의 정확도도 낮은 편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가면을 벗고 앞에 서신다면 달라지겠지만…”

“…꿈과 같은 일이군.”

황위에 오른 후부터, 황제가 가면을 벗고 나타난 적은 없다. 황제가 가면을 벗고 등장하는 건 이미 후계자가 결정된 후부터.

첫 번째 삶에서 목이 잘리던 당시, 그때 황제는 분명 가면 없이 맨 얼굴로 아렌을 응시했다.

‘확실히,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군.’

“만약 전쟁이 폐하의 뜻이 아니라면, 전쟁을 원하는 건 교국측이란 말인가? 잘 상상이 안 가는군.”

“확실히, 썩 와닿는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신성 아트마 교국은, 그 국토와 인구수, 병력 모두 제국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제국을 이루는 20개의 대영지 중 하나의 규모가 아트마 교국과 맞먹을 정도이니.

하지만 교국은 대륙 곳곳에 퍼진 아트마교의 총본산이고, 교국의 사제병은 사후세계가 보장되어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정평이 나 있다.

덕분에 대확장 전쟁 시기에도 제국은 교국만큼은 건드리지 않았고, 교국은 생겨난 당시의 국경을 지금도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하긴. 교국의 광신병 군단은 도시국가 연합의 철갑용병만큼이나 까다로운 상대니까.”

“네. 제국으로서도 섣불리 전선을 만든다고 해도 이점이 없습니다. 확전이 아니라 새로운 조약을 끌어내기 위한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지요.”

나라 몇 개를 품을 만큼 크나큰 땅덩어리가 있기에 제국이라 불리지만, 거대한 영토는 동시에 큰 먹잇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국을 탐내는 건 외부에만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네 말대로 교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면 그건 황자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크게 넘는 짓이야.”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

“…….”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아렌은 말을 아끼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레온나토스가 독촉했다.

“아렌. 말해보게. 폐하와 교국 측 말고,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 달리 누가 있지?”

“…이건 모든 사안을 득과 실로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제국과 교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득을 보는 자들이라면 양국의 분쟁을 환영하겠지요.”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양국의 전쟁을 일으킬 힘이 없다.”

“황자라면 어떻습니까.”

“그건-”

레온나토스가 침묵했다

“제국 전역에, 황제 폐하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시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의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곳은 있습니다. 황자들의 황권경쟁이 바로 그렇지요. 만약 그렇다면-”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 황자라면, 그것을 막는 것도 황자가 되겠지.”

레온나토스의 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니.’

아렌은 생각했다.

‘다른 황자를 막아달라. 황제의 의도는, 정말 이것 뿐인가?’

*****

황제는 황자들의 황권 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

황제가 개입하는 것이 허용되는 순간, 황제가 선호하는 황자가 황태자가 되기 쉬워지고 이는 지명제와 다를 바가 없다.

지나치게 번거롭고 때로는 국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으면서까지 황자들 사이의 황권 다툼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황제가 되기 적합한 인물을 가려내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셰오덴 제국이 생겨난 뒤 끊이지 않고 내려온 전통 아래서, 제국은 단 한 번도 자격 미달의 황제를 배출하지 않았다.

‘황자들끼리의 경쟁에 황제가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대원칙을, 황제가 우직하게도 지키려 하는 이유이다.

황제가 개입하는 건 황권 다툼의 와중에 규칙을 어겼을 때. 경쟁자인 다른 황자를 죽이거나, 제국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혹은, 황제의 권위를 넘보거나.

‘…이웃 국가와 전쟁을 부추기는 건, 제국에 해가 되는 행위가 아닌 건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만, 아렌은 이미 전쟁을 부추기는 황자가 있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교국 측에서 전쟁을 원한다면, 그건 황자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황제가 점괘를 빌미로 아렌에게 알려준 것 자체가 바로 힌트다.

아렌, 레온나토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전쟁이 나는 것이 자신들에 유리한 황자들은 몇 있지.’

가령 제4 황자, 가웨인.

무술에 재능이 있는 정도를 넘어서, 제국 전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 중 한 명이었다.

시기의 문제일 뿐, 빠르든 늦든 검성의 자리에 오를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재능에, 수많은 무인들과 책사들이 몰려들었다.

가웨인과 그 가신들의 역량이라면 평화로운 시기에는 크게 두각을 못 드러내겠지만, 전시체제에 돌입한다면 이미 유리한 황권 경쟁에서 확실히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이런 건, 되도록 빨리 접근하는 게 좋겠지.’

*****

아트마 교국의 최남단.

비탄의 해안이라 불리는 곳에는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바위기둥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사이에 왕관처럼 얹힌 거대한 건축물은, 황궁이나 성보다는 하나의 도시처럼 보였다.

아트마 교국의 실질적인 수도라 일컬어지는 비원궁.

교단의 대주교와 고위사제들이 밀집한 그곳에, 제국에 파견되었던 사절들이 돌아왔다.

“…젠장. 우리같은 말단을 왜-”

“쉿! 사형, 조용히 하세요. 주교께서 들으시겠어요.”

제국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두 신관, 옌슨과 베리트는 영문을 모른 채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교단의 서열 9위, 아르테가 그 둘을 콕 집어 불렀기 때문이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기에 영문도 몰랐지만, 둘로서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

“듣기는 무슨. 아직 방에도 없는데. 아트마께 받은 은총이라니, 난 그런 것 안 믿어!”

“…….”

후배, 베리트는 초조하게 아르테를 기다렸다.

소문이 맞는다면 아르테는 분명-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 아닙니다!”

두 신관이 벌떡 일어났다.

나이가 30줄인 두 신관에 비해, 방에 들어온 주교 아르테는 그들보다 훨씬 어렸다.

이제 갓 스물, 혹은 그보다 어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외모.

온몸에 흰색 주교복을 두르고, 유일하게 드러난 얼굴조차 흰색 베일로 가려 은은하게 보였지만 유난히 큰 눈과 앳된 눈망울은 가릴 수 없었다.

머리카락조차 은은한 초록빛이 감도는 은발.

아르테의 몸에서 검은 부분은 눈동자와 왼팔에 낀 검은 구슬을 꿴 팔찌뿐이었다.

“제가 여러분을 부른 건, 제국의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여러 시각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아… 성심성의껏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미 저흰 모든 것을 보고서로 만들어 올렸습니다. 더 할 말은 없을 줄 아는데요.”

“흠, 그런가요? 제가 묻고 싶은 부분은 성에서 만났다던, 점술가에 대한 자세한 말입니다.”

“그, 그 부분 역시 저흰 모두 다 보고했습죠. 더 들으실 부분이 있을까 합니다, 주교님…”

두 신관 중 선배, 옌슨이 한껏 저자세로 말했다. 주교가 방 안에 들어오기 전의 태도와는 썩 다른 자세였다.

아르테 주교가 말했다.

“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옌슨 사제님. 제 머린 원래부터 세어 있던 건 아니랍니다?”

“……?”

베리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주교가 생뚱맞은 말을 꺼낸 것 같아서.

하지만, 경악에 빠진 옌슨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설마, 방금 그게 소문의 ‘아트마의 은총’이었나?’

“은총이라,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베리트 사제님.”

“…….”

“아,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었나요? 죄송합니다. 가끔 구분이 안 될 때가 있어서.”

베리트, 그리고 옌슨 모두 극도로 입을 조심했다.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주교 아르테가 숙녀보다 소녀라 불리는게 더 어울리는 나이에도 교단의 서열 9위에 오른 이유가 바로 저 ‘은총’ 덕분이었다.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어떤 위증이나 기만도 그녀 앞에선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신관은 모르고 있었지만, 교단에서 이단심문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찾는 게 바로 아르테였다.

‘주교께서, 그 점술가를? 대체 무슨 이유로?’

“이유라. 그런 것을 알려드릴 필요는 없겠죠. 베리트 사제님. 하지만 제 물음에 따라 그렇게 자연스레 떠올려주시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랍니다.”

싸아아.

베리트의 뒷골에 싸늘하게 소름이 돋았다. 마치 얼음물에 담근 차가운 손가락이 자신의 뇌 주름 사이사이를 훑는 듯한 감각.

‘…이건, 마치.’

두 신관은 셰오덴 제국 황실의 어린 점술가, 아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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