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고드프리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고드프리.
제13 황자 돌멘을 죽인 혐의를 받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반쯤 유폐된 의미로 저 먼 북방의 수도원으로 떠난 황자였다.
친족을 살해한 혐의로는 너무 가벼운 처사였다. 하지만 황족의 죄목을 그리 낱낱이 파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황권 경쟁 중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황제의 생각이 맞물려, 고드프리는 극형만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이목이 있으니 다시는 수도와 황궁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테지만.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페일 지역이라면 낮에도 얼어붙은 산맥의 그늘이 드리운 만큼 추운 곳이죠. 그만큼 산업도 도태되어 있었지만, 은광의 규모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낙후되어있던 변경, 선페일 지역.
춥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일까. 이 근방은 예로부터 태양교의 세력이 강했다.
그리고 이 은광 열풍은 선페일 지역과, 그 지역에 기반한 태양교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온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는 시기에, 제국 수뇌부와 직접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의 위치로.
‘하지만, 그게 독이 되었지.’
태양교는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기 위한 물밑작업을 벌였고, 독실한 신도인 고드프리도 거들었지만 돌아온 건 제국의 탄압이었다.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 고드프리가 낙마하는 것도 이 시점으로, 자신의 은밀한 뒷배였던 태양교가 몰락하자 그 역시 이 궁에서 떠나 수도원을 향하게 되었다.
‘고드프리가 훨씬 일찍 쫓겨났으니, 혹시나 어떤 영향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 별 이상 없이 진행됐어.’
이맘때쯤 은광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아렌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미리 그곳에 손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혹시나 역사를 바꾸어 예상 밖의 결과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굳이 은광에만 손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번 조약의 파기 여파로 제국과 교국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 겁니다. 이런 때야 말로 교섭력과 판단력에 우위가 있는 전하께서 빛을 발할 때이지요.”
제4 황자 가웨인은 여전히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지만, 그의 재능은 무력에만 치중해 있다. 강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을 가지고 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전쟁 직전의 외교나 전쟁 중의 전략과 전술, 전후의 대처에 있어서 가웨보다 더 유능한 자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가웨인이 평화 시기의 교섭에 약점이 있음은 이미 5년 전의 조약으로 드러났다.
설령 그동안 약점을 보완했다 하더라도 처음의 이미지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니 여전히 레온나토스에게 우위가 있다.
“지금까지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며 계속 점을 봐왔습니다. 같은 점을 몇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어디나 요령은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질문을 하든 교국과의 관계 파탄은 지속적으로 보였습니다. 북부에서 은광이 발견된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그 행운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용이라면, 뭔가?”
“이번 일을 통해 다른 황자들보다 먼저 우위를 점하는 것이지요. 실은 물밑에서 점쳐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먼저 준비를 하더라도, 은광이 발견되는 선페일 자체에 손을 대는 건 좀 꺼려졌던 아렌이다.
아렌의 ‘안배’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바꿀지 몰랐기 때문.
하지만 은을 채굴하고 나면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은 광석을 제련하고 운반하고, 품질을 관리하고 유통하는 일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해서, 두세 곳의 운반조합과 세공조합의 지분을 사 두었습니다. 북부의 은광이 호황이면 호황일수록 우리 역시 그 영화의 일부를 나눌 수 있도록요.”
그것 외에도 다른 안배도 있었지만, 아렌은 아직 레온나토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레온은 감탄했다.
“대단하군, 아렌. 마치… 현자 솔티르와 같아.”
“과찬이십니다, 전하.”
아렌은 머리를 조아리는 동시에 생각했다.
‘또 솔티르인가. 슬슬 부담스러운데.’
지난 5년간, 아렌은 자신의 점술을 숨기지 않았다.
아렌의 명성은 점점 더 올라갔고, 그중에는 소수지만, 아렌을 마치 선지자처럼 떠받드는 자들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황궁을 방문한 귀빈들에게 단지 여흥용으로 선보인 점술도 그 소문이 황궁 밖을 나가는데 한몫했다.
그 결과 어느덧 자신에게 붙은 솔티르의 이미지를, 이제는 벗고 싶어도 쉽게 벗을 수 없는 경지까지 와 있었다.
*****
레온나토스의 방을 나오고, 아렌은 곧바로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한쪽에 벽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어린 조수와 함께 앉아있는 청년이 보였다.
“레밍.”
“아, 아렌이군요.”
안대 없이, 눈을 감은 레밍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 조수는 레밍에게 책을 읽어주는 역할이었다. 5년 사이, 병세는 점점 심해져 레밍은 곧바로 전맹이 되었다.
그리고, 레밍은 완맹이 되고서야 더욱 빛을 발했다.
그 안에 밀어 넣은 지식들을 풀어내는 단계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레밍의 진가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일.
사람들은 레밍을 선점한 레온나토스의 안목에 더욱 감탄할 뿐이었다.
레밍은 레온나토스의 가신임에도 여전히 도서관의 사서였지만, 지금은 사서장의 명령도 받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서 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전담의, 책을 읽어주는 아이 한 명을 대동한 채.
자기 눈으로 직접 책을 읽는 것만 못하겠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눈이 되고도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퍽 즐거운 듯했다.
레밍은 전담 시동을 물린 다음 말했다.
“아렌이 여기 왔다는 건, 뭔가 물어볼 게 있어서겠지요?”
“그래. 혹시 정원사, 에 대해 아는 것 있어?”
“…정원사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레밍의 정신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완전히 암기한 3만 5천 권의 책들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먼저, 황궁에 정원이 만들어지고 정원사가 배정된 건 45년 전, 전전대 폐하 때부터군요.”
“브륀할트 6세라. 그리고?”
“그리고… 정원사 자체가 부각된 역사서는 없네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단언하는 레밍. 물론 자신이 읽고 기억하는 책들에 한해서의 대답이지만, 아렌은 레밍의 말을 믿었다.
“그럼, 그 시절 동시에 일어난 일들은 뭐가 있지?”
의자에 편안히 앉아있던 레밍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다락, 다라라락.
그와 동시에 레밍은 드문드문 말을 뱉어냈다.
“…그해 6월, 역병이 돌아 중부 지방의 소 떼가 떼죽음을 당했군요. 덕분에 물가가-”
“그리고?”
“…옥수수가 풍년이었군요. 어찌나 많이 났던지 소나 염소에게도 옥수수를-”
“그리고?”
“…교국에 일곱 번째 대주교가 등극했군요. 제국에서도 축하사절을-”
“그리고?”
“…그 해에 금면병 제도가 생겼군요. 브륀할트 6세의 명에 의해.”
“…금면병이?”
“네. 은면병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고요.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금면병이 생기면서, 비로소 은면병이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군요. 가면에 은도금을 한 것도 그때부터고.”
“…그렇군. 그리고?”
아렌은 다른 것들도 물었지만, 생각은 오직 이쪽에 쏠려 있었다.
금면병. 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황제만을 보호하는 3인의 호위결사.
항상 금으로 된 가면을 쓰고 있기에 누가 금면병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정원사가 만들어진 시기와 금면병이 발족한 시기가 같다는 것.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고마워, 레밍.”
“별말씀을요. 폐하와 아렌의 청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아렌은 레밍이 있던 별실에서 나왔다.
평소 사람이 거의 없던 도서관이지만, 지금은 네 명이나 드문드문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이것봐라?’
아렌은 도서관 안을 천천히 걸었고, 그 순간 도서관에 앉아있던 네 명이 일어나 조용히 아렌을 둘러쌌다.
아렌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누구죠?”
“널 만나고자 하는 분이 있다. 안내할 테니 잠자코 따라오도록.”
“황제 폐하인가요?”
“…….”
“네. 안내하시죠.”
수상한 자들이었지만, 아렌은 순순히 그들이 안내에 따랐다.
물론, 아렌이 미래를 미리 점쳐 그들의 정체를 안 것은 아니었다.
‘궁인의 복장을 한 주제에, 옷 안의 근육은 보통 병사들의 몇 배나 단련되어 있었어. 얼굴을 계속 가린 듯, 손보다 미세하게 하얗고. 역시 은면병이었군. 그런데, 황제가 날 부르는 이유가 뭐지?’
의문을 뒤로한 채, 아렌은 한적한 복도를 통해 황궁 내원으로 들어섰다.
외원과 내원 사이를 빙 둘러 가로막은 높고 두꺼운 붉은 벽처럼, 같은 황궁임에도 두 공간은 전혀 별개로 봐도 무방했다.
황궁 내원의 궁인들은 모두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걸었고, 필요 없는 조금의 잡음도 없었으며 지나칠 정도로 엄숙했다.
약간의 활기가 느껴지는 외원과는 대조적인, 소리가 사라진 듯한 공간.
아렌이 안내된 방 안에는, 황금 가면을 쓴 황제 복식을 한 자들 셋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황제와 그를 연기하는 금면병 둘이었다.
‘…어쩐지. 금면병은 총 셋이라던데. 항상 둘만 있는 이유를 알 것 같군.’
방금의 은면병처럼, 금면병 역시 누가 금면병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실력이 뛰어난 무사나 경비들은 여지없이 금면병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따라다녔고, 혹은 무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실력을 숨긴 금면병일지 모른다는 소문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때 황제가 금면병 셋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광경을 목격한 모두는 금면병의 의심을 벗게 되는 것이다.
황제, 정확히는 세 황금가면 중 하나가 아렌에게 말했다.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 최근엔 솔티르의 재림으로까지 불린다던데.”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솔티르라니, 제게는 과분한 칭호입니다.”
아렌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원래라면 고개를 들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대답했을 텐데, 지금은 무용지물이다.
눈앞의 상대가, 이마부터 턱까지 전부 가린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속내를 파헤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과분한 칭호라. 한 명의 착각은 있을 수 있지. 두 명의 착각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 명이 똑같이 착각한다면,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감격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아렌은 더욱 긴장했다.
‘이렇게 금칠을 해주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황제는 떠보는 것도 없이, 불쑥 말했다.
“그 점 실력에 대한 말은 익히 들었다. 그 실력으로, 어디 제국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겠느냐.”
“…….”
엎드린 아렌의 목덜미 아래로 식은땀이 흘렀다.
‘-위험하다.’
제국의 앞날을 점쳐달라니. 일견 듣기엔 특진처럼 보이는 달콤한 제안이다.
하지만 언제나 치명적인 독일수록 혀에 더욱 달콤한 법이다.
‘점괘가 빗나갔을 때의 안전장치가 전혀 없어. 방파제 없이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꼴이야.’
마치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 서 있는 듯했지만, 아렌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점술은 불가합니다.”
“호오. 어째서지?”
황금 가면을 쓴 셋 중 하나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심기가 상한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목소리에 더 가까웠다.
“전 레온나토스 황자의 가신입니다. 제 모든 점괘는 레온나토스 황자의 윤허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
“…….”
아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금 가면을 쓴 세 명 중 둘의 기색이 급변했다.
털을 곤두세운 호랑이처럼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위협하는 둘.
그건 사람을 관찰하는데 도가 튼 아렌이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지표였지만, 나머지 하나는 오히려 아렌의 말이 꽤나 기꺼운 듯 보였다.
‘…황제는, 가장 오른쪽이군.’
아렌이 그걸 알아도 지금 뭘 할 수 있는 것도, 뭘 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과연. 자네의 말이 맞아. 이거 실례할 뻔했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네를 여기까지 부른 게 미안해지는데.”
황제가 일개 가신 하나 오고 가라 명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저렇게 대우를 해주면 오히려 더 멋쩍을 뿐이다.
뒤이어 흘러나온 황제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짓궂은 기색도 묻어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자네 대신, 짐이 점을 보겠네. 그건 어떤가.”
“…….”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몰라 아렌이 대답을 망설인 사이.
“남쪽 국경에서, 큰 전란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3개월 내로 큰 전쟁이 있을 거다.”
황제는, 태연하게 이뤄져선 안 되는 예언을 아렌에게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