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첫 번째 삶이나 지금이나, 정원사는 지나가면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각 정원을 하나씩 맡은 열두 명의 정원사들이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아렌은 그들이 농아(聾啞)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정원은 황궁 안에서도 외진 구역. 평소에도 꽃을 좋아하거나, 일부러 으슥한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닌 한 굳이 정원을 자주 찾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정원의 존재감 없는 정원사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실례했습니다.”
아렌은 정원사에게 사과했다.
정원사는 아렌의 사과를 묵묵히 받아들 뿐,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나와 황녀의 대화를 들었는지는 몰라.’
만약 들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응할지 그 방법이 마땅치 않다.
정원사는 단지 주의를 주려 했을 뿐이고, 아렌이 누구와 말을 주고받았는지까지는 모르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니,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지.’
아렌은 새삼 정원사를 바라봤다.
이제 키가 꽤 자란 아렌이었지만, 정원사는 일반 남성보다도 훨씬 더 까마득한 곳에 머리가 있었다.
이따금 높이 자란 가지도 잘라야 하니 키가 큰 건 이해된다. 밖에서 일을 하니 군살 없는 단단한 체형인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허리에 찬 저 가위. 날 길이가 짧은 검 정도는 되겠는데?’
지금까지는 예사로 보고 넘어갔지만, 한번 눈길을 주고 나니 아렌에게 정원사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정말, 정원사는 단지 ‘정원사’이기만 한가?’
첫 번째 삶에서의 기억만으로 이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렌이 보고도 지나친, 혹은 잊어버린 것들이 두번째 삶에서야 비로소 보이기도 한다.
‘이거, 조사해볼 맛이 나겠는데?’
*****
레온나토스가 본격적인 제왕학 수업을 받고 3년이 흘렀다.
아무리 배움이 빨라도 5년은 걸리는 수업이지만, 레온나토스는 이미 작년에 모든 수업을 마치고 올해부턴 스승 없이 홀로 복습하는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정치와 경제, 전략전술과 무술까지. 황제가 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레온나토스의 안에 탑재가 되어 있었다.
황태자 후보가 자신의 근위기사에게 맞아가며 검을 배우는 것은 모양이 살지 않았기에 레온나토스는 더는 더글라스에게 검을 배우지 않았다.
자연히, 더글라스의 빈 시간은 아렌의 것이 되었다.
더글라스는 목검으로 자세를 잡은 아렌의 팔을 목검 끝으로 올리고 내리며 가다듬었다.
“흐음. 이젠 제법 그럴듯해지지 않았나?”
“그래봤자 흉내냈을 뿐이죠. 저야 뭐, 아직 뼈도 다 자라지 않았는데요.”
“…아니, 이미 검 좀 배웠답시고 거들먹거리는 귀족이나 기사 지망생보단 훨씬 나은 게-”
“그런 빈말 말고 다른 걸 좀 물어보고 싶은데요.”
“빈말이라니? 난 꽤 진심으로-”
“혹시 정원사에 대해 알아요?”
“…정원사?”
아렌에게 불평하려던 더글라스는 정원사란 말이 나오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원사는… 황궁의 각 정원마다 한 명씩 있는 사람들 맞지? 그자들은 왜 물어보지?”
“생각해 보니 그들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더라고요. 혹시 더글라스는 아는 게 없나 해서.”
“흐음… 그 사람들, 귀머거리인거 아냐? 누가 불러도 대답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 없는데.”
더글라스 역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렌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인으로서 보기 어때요?”
“…무인으로서?”
“네.”
“으음….”
더글라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겉모습만으로 실력을 가늠하는 건 모험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런가요? 당신이나 가웨인 전하 같은 분들은 사람을 보고 한번에 강한지 아닌지 알아맞출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체간이 안정되어있다거나, 호흡이 일정하다거나 하는 것들로 대강 가늠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사실 전부 다 감이야. 확신할만한 정도는 아니지. 그런 관점으로 봤을 때… 글쎄. 행동에 딱히 군더더기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이것만으론….”
고민하던 더글라스는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묻지?”
“그냥, 잠깐 이상한 상상을 해봤어요.”
“이상한 상상?”
황궁의 외곽을 두르듯 자리 잡고 있는 열두 정원.
황궁에서도 특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한적한 곳이고, 이곳을 관리하는 건 각각 정원에 배치된 한 명의 정원사뿐.
정원사는, 정원 안에 한해서 아주 강력한 권위를 얻는다. 황족이든 유력가문의 귀족이든 정원의 방문객은 정원사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그러지 못하면 황제의 권위로 정원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정원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으니 그 방지책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정원이 열두 곳이나 있을 필요가 없고, 그곳의 관리자에게 너무 과한 권한이 부여된 것도 사실이니까.
“음… 그러니까 정원사는 사실 황제폐하 직속의 무언가고, 어쩌면 꽤나 고수들일지도 모른다? 황궁 외곽에서 주변을 살피는?”
“사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니까, 아직은 그냥 상상일 뿐이죠.”
“그런 거라면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손을 맞대볼 수밖에 없지. 어때? 내가 몰래 시비라도 걸어볼까?”
“…됐어요.”
만약 그들이 정말 황제의 사람들이라면 괜한 시비는 걸지 않는게 좋다.
‘문제는, 장미목 정원의 정원사가 나와 세리엔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른단 거야.’
5년의 세월을 지나온 건 레온나토스 뿐만이 아니었다.
아렌 역시 아라흐네 말고도 다른 정보망을 곳곳에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직은 소규모였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세리엔 황녀가 황실 깊은 곳에서 물어다 주는 정보가 꼭 필요했다.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하지만.’
아렌은 ‘정원사’라는 존재를 마음 한편에 담아두었다.
*****
교국의 사절단 대표, 아트마 교단의 제 3순위 주교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제국과 교국 사이의 조약은 바로 어제, 같은 조건으로 5년 연장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다시 그 문제로 불려온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주교의 표정은 그래서 좋지 않았다.
“왜 다시 부르신 겁니까. 협약은 이미 다 끝난 것이 아닙니까?”
주교의 앞에 앉은 제국의 외무대신, 페론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그게, 무슨?”
“양국 사이의 조약을 전면 재검토해야겠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주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미 협상이 끝난 조약 아니었소? 그걸 번복하는 것도 외교적 결례인데, 그것도 모자라 아예 없던 일로 하겠다? 그것을 우리 교국이 수용할 줄 알았소?”
“순순히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용하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지금, 뭐라고?”
주교는 외무대신을 죽일 듯이 노려봤고, 외무대신도 사무적인 표정 그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그 눈빛을 받았다.
거기서 주교는 이전과 다름을 느꼈다.
제 3순위 주교는 대주교로부터 이번 일에 대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곳에서 그가 하는 결정은 곧 대주교의 결정, 나아가 교국의 결정이다.
반면 외무대신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의견을 대변하는 자일 뿐.
그 차이는 회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곧바로 드러났다.
주교는 모든 결정을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하는 반면, 외무대신은 이미 정해진 기조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외무대신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대신의 말은 곧, 이것이 황제 폐하의 뜻이라 봐도 무리가 없겠죠?”
“제가 할 말은 아까와 같습니다. 교국이 국경을 봉쇄하겠다면, 그리하셔도 좋습니다. 단, 제국 역시 합당한 대처는 취할 것입니다.”
“…지금, 본 교국을 협박하는 것이오? 교국과의 교역이 끊어지면 아쉬운 건 제국일 텐데.”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는 제국이지만, 은화를 만들때 사용하는 질 좋은 은은 그 대부분을 교국에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협박이라,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지요.”
“…….”
하지만 외무대신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주교는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제국은 지금, 대륙에 다시 긴장을 가져올 셈인가? 대확장 전쟁으로부터 4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제국의 목적은, 대륙의 긴장이 아닙니다.”
페론 외무대신은 이번 회담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비록 그 웃음이, 감정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차디찬 것이긴 했지만.
“제국이 응당 가졌어야 할 위치를, 지금 되찾으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요.”
*****
별 무리 없이 연장될 것으로 보였던 제국과 교국 사이의 국경조약은 돌연 파국으로 끝났다.
교국의 사절은 곧바로 제국의 수도를 떠났고, 제국 역시 최소한의 예의로 형식상의 환송식을 준비했을 뿐이다.
“아, 그 두 사람이다.”
굳은 표정으로 황궁을 떠나는 교국의 사절단 중, 아렌에게 점을 봐달라고 했던 두 신관이 보였다.
돌연 뒤를 돌아본 둘과 아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
그리고, 아렌을 확인한 둘의 얼굴은 흙빛이 된 채 완전히 굳었다.
이미 양국 간의 조약이 끝나 변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렌의 점괘가 끝나자마자 틀어진다면 그럴 만도 했다.
확실한 건, 이번 사태로 촉발된 양국 간의 긴장은 쉬이 누그러들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렌과 같이 환송식에 참석한 레온나토스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렌.”
“네, 전하.”
“환송식이 끝나고 곧바로 내 방으로 오도록.”
레온나토스는 아렌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황궁 내원과 가까이 위치한, 커다란 방.
이미 핀이 면밀히 살펴본 바, 엿듣거나 몰래 다닐 비밀시설 등은 없는 듯했다.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꽤나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레온나토스는 방에 오자마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아렌을 처음 만난 후부터 벌써 수백 번은 던졌을 의문을, 다시 꺼냈다.
“아렌, 네 점괘대로 회담이 실패했군. 이유가 뭐지?”
“점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 결과만 짚어줄 뿐이지요.”
물론 아렌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삶을 살아봤기 때문이지만, 너무 시시콜콜한 것까지 점술에 기대면 자칫 만능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점으로 확실한 정답만을 원하는 단계가 되었을 때, 혹시나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제국 곳곳의 정보상에게서 사들인 정보 중 하나가 눈에 띄더군요.”
“정보상?”
물론 아렌이 정보상의 정보를 사들인 건 맞지만, 선후관계는 반대였다.
정보를 사서 그 사실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도록 미리 정보를 산 것이다.
“실은, 제국의 북부에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교국의 은광석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품질로요.”
“…그게 사실이라면 교국과의 무역의존도는 다소 낮아지겠군. 하지만 여전히 타국과의 조약을 이리도 쉽게 어기는 건 아니 될 일이야.”
“네. 그러니 아마 다른 원인도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첫 번째 삶과의 역사적 사실과 같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렌도 모른다. 그때는 궁 밖의 일에 무관심했고, 오직 궁 안에서의 안락한 삶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세리엔 황녀도 자세한 건 모르는 눈치였어. 황권 경쟁에서 동떨어져 있는 만큼 황녀들이 더 고급 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는데도.’
“음, 그런데 아렌. 은광이 발견된 곳은 어디지?”
“…….”
레온나토스의 질문에 아렌은 잠시 고민했다.
원래라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맞겠지만, 어쩌면 레온나토스를 뒤흔들수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렌?”
“은광이 발견된 지역은, 선페일입니다.”
“…….”
선페일.
제국의 최북단에 있는 영지의 이름으로, 척박한 땅과 얼기 직전의 차디찬 강물, 그리고 낮에도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높이 솟아있는 북쪽의 거대한 산맥밖에 없는 황폐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그나마 눈여겨볼 것이라곤, 제국 전역에 퍼져있는 태양교의 수도원 중 가장 거대한 선페일 수도원뿐이었다.
그리고, 레온나토스에게 선페일 수도원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거긴, 고드프리 형님이 있는 곳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