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어어… 자네가 그 점술가였나?”
“혹시, 우리가 결례를 범한 거라면-”
결례라면 큰 결례가 맞다.
하지만 아렌도 여태껏 말하지 않고 둘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왔으니, 그 결례를 걸고넘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키 큰 쪽의 점괘 먼저 봐드리지요.”
아렌은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카드를 술렁술렁 넘기기 시작했다.
제국과 황궁에 불평이 많았던 신관은 사색이 되어 말했다.
“아, 저기… 되었네. 점은 안보고 그냥 가도 될 것 같아.”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이미 점을 시작해버렸는데요. 한번 시작한 점을 멈추는 건 길한 징조가 아닙니다.”
“…….”
아트마 교단의 사람들에게 점술은, 사람들을 홀리는 사이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기에, 특별한 누군가는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건 교리를 떠나, 아트마의 교인도 마찬가지.
“그, 그렇다면 얼른 아무거나 점치면 되잖아!”
“네. 그리하지요.”
아렌은 카드를 섞었다.
그들이 아렌을 붙잡아 아렌의 위치를 물어본 것은 단지 우연일 뿐.
아렌으로서도 그들을 오래 묶어둘 이유는 없었고, 얕보이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놀려준 뒤 그들을 내보내, 또 다른 소문을 양산하게 하면 그만이다.
아렌은 익숙한 손길로 카드를 뒤집었다.
첫 번째 삶에선 별다른 야망이 없었기에, 아렌은 점을 볼때도 카드를 예사로 뒤집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극적으로 보이게끔 힘껏 카드를 화려하게 다루고 있었다.
“‘끊어진 밧줄’과 ‘물에 젖은 책’이군요. 끊어진 밧줄은 실패 혹은 단절, 물에 젖은 책은 불확실성, 혹은 무용(無用)을 뜻하죠.”
“…그래서?!”
“이런 말은 드리기 죄송하지만….”
레온나토스가 나이로 인해 임무에서 제외되고 5년.
그동안의 시간은 레온나토스가 역량을 강화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아렌이 최적기를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일어나는 게 확실한 사건이면서, 레온나토스가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최적의 사건.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여러분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은 아마 실패할 것입니다.”
“…….”
아렌은 담담히 사실을 고했다.
제국과 교국 간의 조약은 갱신되지 않는다. 그건 아렌이라는 불순물이 역사 사이에 끼어든 것 정도로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허, 헛소리. 너 같은 말단이야 모르겠지만, 이미 조약은 갱신되었단 말이다! 이곳에 온 목적은 이뤄진 거나 다름없어?”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점괘는 실패라고 나왔습니다만.”
아렌의 점괘가 틀린 듯하자 신관들의 기가 살기 시작했다.
“흥.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실력있다던 점쟁이도 별것 아니잖아?”
“어차피 불신자들이 지어낸 유흥일 뿐, 진지하게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요.”
“흐음.”
아렌은 두 신관을 유심히 바라봤다.
저 둘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만. 굳이 아렌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별것 아니더라는 소문을 내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그쪽 신관분. 이름이… 얀슨, 아니 옌슨인가요?”
“…어떻게 내 이름을?!”
교국에서 온 사절의 숫자야 30명 안쪽. 이들의 명단은 온 지 하루 만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5년의 세월 동안, 아렌은 단지 몸만 자란 것이 아니었으니까.
“옆의 분은 베리트로군요. 두분 다 독실한 신자시군요. 하늘을 우러러 신에 거리낄 것 하나 없는. 하지만, 키 크신 신관분, 옌슨 씨의 사정은 다를지도 모르겠군요.”
“…나, 나?!”
아렌이 ‘신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이라 말했을 때, 키 큰 신관의 몸이 움찔한 것을 아렌은 놓치지 않았다.
“어떤 잘못이나 비리… 비리 쪽이 맞겠군요. 그건 교단 안에 있다는 입장을 이용한, 게 맞고요. 그 사실을 옆의 신관분은 모르고 계셨군요. 아, 혹시 파헤치면 안되는 거였습니까? 그렇다면-”
“어, 엉터리! 이 자식은 엉터리야!”
키 큰 신관 쪽, 옌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옆의 신관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물러가지요. 당장 이 점쟁이는 이미 성사된 회담의 결과조차 틀리지 않았습니까. 귀담아들을 말은 없을 겁니다.”
“…흥! 조금은 기대했더니만, 결국 이교도들의 미신 놀음일 뿐이지!”
그들이 일어서려고 하는 찰나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점술가인 아렌과 비슷해 보였다. 열다섯 남짓한 소년의 나이. 하지만 입고 있는 복식은 질 좋은 금실을 마음껏 사용한 황족의 것이다.
무엇보다 제국 황실의 점술가 아렌이 누구의 가신인지, 신관 옌슨을 데려온 후배 신관 베리트는 알고 있었다.
‘…제국의 12황자, 레온나토스.’
제국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는 주변국들 초유의 관심사였다.
현재 가장 황태자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다섯. 그 중 가장 어린 나이의 황자가 바로 눈앞의 레온나토스였다.
5년 전쯤부터 두각을 드러내, 지금은 명실상부 황자들 중 가장 현명하다 일컬어지는 인물.
“아렌? 뭔가, 이 두 분은?”
“아트마 교국에서 오신 사절들이십니다. 점을 보아달라 하셔서 그리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손님이셨군. 제 가신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점을-”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만 일어서야 겠습니다.”
서두르는 신관들을, 레온은 굳이 막지 않았다.
“물론이지요. 바쁜 손님을 굳이 붙잡는 건 도리에 맞지 않으니까요. 부디, 꼭 다시 제국에 들러주시길 바랍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두 신관은 황급히 자리를 방을 빠져나왔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두 신관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저자가 레온나토스. 제국의 네번째 수레바퀴.”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조금 더 좋은 인상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멍청한 녀석아. 저런 곳에서, 저런 식으로 만났는데 어떤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단 말이냐. 곧바로 눈에서 사라지면 절반은 하지.”
“소문대로, 아직 어리군요. 이제 열다섯이라니. 그런데 벌써 장성한 황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능가했지. 모든 황자들 중 서열 4위라니까.”
고작 5년 만에 급부상한, 옆 강대국의 차기 권력자는 교국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관심은 지난 5년간 레온나토스 곁에 거의 항상 같이 있었던 동년배의 비서관에게도 일정부분 나뉘었다. 그 비서관이 황궁 전체에서 유명한 점술가라면 더욱더.
“…일각에선 저 점쟁이가 황자를 조종한다는 말도 있던데.”
“조종이요? 설마요. 잠깐 본 것뿐인데, 두 눈에 서린 총기에 찔릴 것 같던데요.”
“그자가 제국의 황제가 되면, 교국에 득일까 실일까?”
외부인이 그런 말을 쉽게 입에 담을 정도로,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는 미래는 썩 자연스러워 보였다.
*****
두 신관이 황급히 자리를 뜨자, 레온나토스는 방구석에 놓인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아렌, 그들은 제국이 맞이한 손님이다. 또 그들을 골려주면 쓰나.”
“골려주다니요. 전 그저 간단한 점괘를 봐줬을 뿐인데요.”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 안 속아.”
“…조금 짓궂게 군 것은 맞지만, 정말 점을 봐달라기에 점을 봐준 것뿐입니다.”
“세간에선 그걸 골려줬다고 말하지만… 좋아. 그래서 무슨 점을 봐준 건가.”
“그들이, 이곳 제국의 심장부까지 찾아온 이유. 그 결실을 되찾지 못할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레온나토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둘밖에 없는 밀실이지만, 혹시나 모른다.
아티스 유민 출신의 핀이 가신으로 들어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황궁 곳곳에 있는 비밀시설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천장과 벽, 바닥 사이의 공간들과 청음시설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레온나토스는 황궁에서 그나마 보안이 될만한 장소들을 몇 군데 추렸고, 황궁 외곽의 이 외딴 방도 그 중 하나였다.
“아렌 넌 5년 전부터 그 소리였지. 불리한 조약을 맺고 돌아온 테오드릭 형님을 위로하기도 전에 말야.”
원래는 레온나토스도 참여할 뻔했지만, 나이 때문에 황제가 직접 반려한 임무.
차출된 가웨인과 테오드릭은 모두 손꼽히는 강골이었지만, 외교에서 어떨지는 미지수였다.
황제의 의도는 둘의 역량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그 둘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는 실패였다.
교국은 제국의 영토 안에 본거지가 있는 태양교가 상행을 빙자해 교국 안으로의 포교를 시도한다며 항의했고, 태양교를 국교로 삼고 있지도 않은 제국으로선 물론 그 의도가 아니었다.
“그 조약은, 분명 제국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지금 제국의 기조는 주변국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야. 당분간은 그 조약을 유지할 거다. 내 생각도, 전반적인 신료들의 생각도 그래.”
“네. 저도 제 점괘가 틀렸다면 안심입니다.”
“…하지만 네 점은 유난히 잘 맞으니. 그래서 대비는 해 뒀어.”
“감사합니다.”
아렌에게 시간이 자신들 편이라는 말을 들은 뒤 5년.
레온나토스는 정말,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황궁 안에도 조금씩 자신의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다크호스에서 유력주자가 되면 될수록 뒤에 붙으려는 세력은 더 많아졌다.
물론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가신들이 늘어날수록, 레온나토스의 책임감 역시 켜켜이 쌓이고 있었지만.
“오늘 저녁 교국의 실무단들과 만찬이 있다더군. 아렌 너도 참석하겠나?”
“…글쎄요.”
입장이 달라진 건 레온나토스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아렌은 황족이 함께하는 만찬에 초청받는 지위가 되었고, 심지어 그 거절권마저 자유로웠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힘들 것 같군요.”
“…선약? 그거 아쉽군. 그런데 누구지? 감히 내 비서관과 약속을 주고받는 사이가.”
레온나토스의 표정이 조금 짓궂어졌다.
이상한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
“혹시, 누구 소개시켜줄 거면 사양 안해도 돼. 그런 건 빨리 알면 알수록 좋은 거니까?”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그런 거 아니거든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부정한 아렌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누구 만나러 가는지 안다면 경을 치겠군.’
*****
밀정 핀에 의해 황궁의 방대한 지도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보이는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비밀 통로나 다른 시설의 여부가 기록된 자세한 지도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이야기 나눌 만한 곳은 정말 드물었고, 황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더욱 그랬다.
‘그런 점에서, 여긴 맹점이었지.’
예전 황녀와의 내기에 사용되었던 정원.
광대한 황궁 부지 곳곳에 열두 곳이나 있었고, 넓은 정원을 관리하는 건 상시 상주하고 있는 정원사 하나 뿐이었다.
평소 이곳을 여유 있게 거닐만한 사람은 귀족이나 황족뿐이므로, 실은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기엔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아렌은 사람 키만큼 자란 관목 울타리 앞에 섰고, 기척을 보내자 울타리 반대편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렌이니? 뭐야, 늦었잖아!”
“죄송했습니다. 레온 전하가 이야기를 끊지 않으시기에 그만.”
“사과는 그게 끝이야? 이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
“하는 수 없잖습니까.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기분이 안 좋으시면, 오늘은 그만 돌아가봐도 되겠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건너편의 목소리는 명백히 당황한 듯했다.
“-농담입니다. 이대로 갈 리가 없죠. 세리엔 전하.”
“그, 그렇지? 이번 교국 사절단의 명단을 알려준 것도 나니까. 그 대가를 아직 안 받았잖아. 그렇지?”
5년 전, 완벽히 점술 불신자가 되었던 황녀 세리엔은, 5년이 흐른 지금 완전히 아렌의 점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문제는 주변의 시선. 점점 세리엔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신도 아닌 남자 하인과 둘이 있는 걸 보이면 생기는 문제가 점점 늘어갔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다른 눈으로 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밀회야.’
첫 번째 삶의 아내였던 아라흐네와도 비슷한 일을 했었지만, 궁의 하녀와 황녀 사이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아렌으로선 매번 살을 도려내는 기분으로 세리엔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한달 간은 3월생과 5월생과의 관계가 길하겠군요. 12월생은 조금 멀리하시는 게 좋을 듯하고요.”
“시, 12월생? 그게 누구야? 사람들 생일을 모두 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건 황녀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죠. 다음번은 원추리 정원에서입니다. 오늘 가져온 정보는 복채로서 영 별로군요. 좀 더 구미 당기는 내용이 아니면 점은 못 봐드립니다.”
“…너, 그거 제국의 황녀한테 하는 소리야?”
“네. 맞는데요?”
“…….”
속마음이야 어쨌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정원수 울타리 너머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세리엔은 돌아간 듯했고, 아렌도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정원에서는. 정숙.”
“…!”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황급히 뒤돌아본 아렌.
그 자리에는, 항상 한마디도 하지 않던 과묵한 정원사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었어? 벙어리가 아니었나?’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황녀와 내가 나눈 말을,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