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9화 (49/227)

#049화

세리엔 황녀와의 내기 당일.

“제가 써놓은 쪽지엔, 백합 정원이라 쓰여 있습니다. 여기 보시죠.”

“우으으….”

세리엔이 자신이 방문할 정원의 이름을 쪽지에 적음으로써, 방문 직전에 변덕을 부릴 가능성은 사라졌다.

황녀의 마음이 도중에 바뀌지 않는 이상 사실상 변수는 없었다. 사람의 속마음을 가늠하는 건 아렌의 주특기였다.

세리엔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지 볼을 부풀린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야 당연하겠지.’

내기의 내용이 중간에 바뀌어 사실상 ‘세리엔이 할 행동 맞추기’가 아니라 ‘쪽지에 적은 글자 맞추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그 원인이 시녀 몰디나의 쪽지를 먼저 보게 된 자신에게 있는 이상 다른 말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세리엔의 꺼림칙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저나 다른 점술가들을 모두 믿어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정말 눈치만으로 대충 둘러대며 점술가 행세를 하는 사기꾼도 많으니까요.”

“…….”

아렌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로 말했다.

“다만, 모든 점술가가 사기꾼이라는 생각만은 말아주십사, 하는 마음뿐입니다. 혹시 마음이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딱히, 그런 건 아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만약 다음에 또 내기를 하신다면, 이번엔 정원이 아니라 무슨 말을 탈지, 혹은 무슨 목검을 고를지로 하지요. 그럼, 이만-”

“…잠깐만. 그걸 어떻게 알아?!”

순순히 물러나려는 시늉을 하는 아렌에게, 세리엔이 달라붙었다.

정원보다는 연무장, 산책보다는 승마, 꽃꽃이보다는 검술 연습이 더 좋다는 세리엔이었지만 일국의 황녀로서의 신분이 있기에 항상 억누르기만 해왔다.

세리엔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활달한 성격이라는 것은, 첫 번째 삶에서도 아렌을 비롯한 몇 명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어떻게 아냐니, 그야 점술가니까 그렇죠.”

무슨 점술가 만능주의도 아니고.

말한 아렌 자신도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아직 어린, 그리고 한때 점술에 흠뻑 빠져 있었던 세리엔에겐 정통으로 먹혔다.

“…그래? 뭐… 너에 대한 소문이 완전히 거짓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태양이 사라지는 걸 예언했다면서.”

처음에 한 말이 있으니 곧바로 태도가 바뀌진 않았지만, 아렌을 대하는 세리엔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 한 번으로 완전히 넘어오진 않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아렌은 나가려다 말고 마지막 말을 했다.

“아, 그리고 오늘 일은 가능하다면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실은 레온나토스 전하는, 저더러 함부로 점괘를 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 일이 레온 전하께 알려지면 혼날 거에요.”

“…생각해 보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세리엔.

하지만 아마 세리엔은 아렌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이 나이대에 또래 아이와 나눈 비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런 만남을 몇 번만 더 가지면, 세리엔 황녀를 함락시키는 건 금방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원래부터 점술을 좋아했던 사람이고 아렌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

세리엔 황녀와 내기를 마치고 아렌이 복도로 물러섰을 무렵.

“야, 잘 봤다, 아렌? 대단하던데?”

복도 뒤쪽에서 걸어오며 핀이 말했다.

“뭐야, 방금 본 거야? 어라? 하지만….”

황녀와의 내기가 이뤄진 방은 기본적으로 밀실이었다. 방 안엔 아렌과 세리엔, 그리고 철통같이 주변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 셋뿐이었고 그 외에는 훔쳐볼 곳도, 몰래 숨어서 들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역시 전혀 모르겠지. 사실 난 내기가 시작할 때부터 천장 위에 있었거든. 뭔가 재밌는 게 시잘할 것 같길래 말야.”

“…천장 위?”

아렌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위로 향했다. 황궁 복도는 천장까지 붉은 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핀은 한술 더 떠 말했다.

“어디 몰래 숨어들 곳 없나 이곳저곳 살펴보다 말야, 천장 위쪽이 텅 비어있더라고.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 지나갈 수 있게 설계한 것처럼. 이따금 누군가 드나드는 흔적도 있었어. 아직 누군가를 마주치진 못했지만.”

“…그런 말 아무 데서나 하지 마. 레온 전하의 가신이, 황녀의 방 천장 위에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운이 좋아 극형일걸?”

“그보다, 천장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들은 게 있거든?”

“들은 게 있으면, 전하께 바로 알리지 그래?”

“어차피 난 내가 들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직접 말해봤자 뭐 하겠어? 황자 나리의 가신 중에는 네가 서열 1위, 아냐?”

“…평소에도 남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

아렌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렸다.

하지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황제와 회의를 마친 신료들끼리 하는 이야기였거든. 군무대신이었는데, 이름이-”

“그건 됐고. 무슨 이야기였는데?”

아렌이 알고 싶어 하던 이야기였다. 아렌은 내용에 집중했다.

“…원래는, 레온 나리가 자연스레 임무에 참가하는 그림이었대. 가웨인 황자와 테오드릭 황자와 함께.”

“그런데?”

“그 그림을 끊은 것이 바로 황제.”

“…황제?”

“그래. 그 신료들이 보기에도 의아했었나 봐. 황제가 별 이유도 없이, 말을 억지로 끊는 느낌이었다고.”

“…그래?”

‘레온 황자를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는 건 황제다. 단순히 공을 세웠기 때문인가? 아니면…’

“황제 폐하가, 왜 레온 전하를 보내지 않았는지도 들었어?”

아렌이 물었다.

아렌은 핀이 무슨 말을 들었든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다.

레온나토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 혹은 부정적인 경계심 모두 가능했기에.

하지만, 핀의 말을 들은 아렌은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아직, 너무 어리다던데?”

*****

핀에게 들은 보고는, 필히 레온나토스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보고를 앞둔 아렌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레온나토스가 어리다, 라. 확실히 그렇지.’

그리고 그 ‘어리다’라는 의미는 절대적이라기보다 상대적일 것이다.

동쪽 국경의 사태에는, 이제 막 수여된 기사단과 함께 파견보냈으니까.

레온나토스가 옛 아티스 국경에서 보낸 일이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폐허가 된 동쪽 황무지와 달리 제국에게도 요주의 상대인 남쪽의 교국과의 교섭에 나갈 만한 나이는 아니거나.

어느 쪽이든 다른 두 황자와 달리 나이 면에서 발목을 잡힌 것은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아렌은 지금까지 레온나토스의 ‘나이’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당장 아렌도 그 속만 서른 살일 뿐, 겉모습은 열 살짜리 아이일 뿐이었으니까.

아렌에게 어린아이의 모습은 실보다 득이 더 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해한 척하며 실리를 많이 취했으니까.

하지만 궁 내에서의 평가만큼이나 밖에서의 평가도 중요한 제국의 황자 입장에서, 어린 나이는 득보다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렌은 핀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레온나토스에게 보고했다.

“…그렇군. 아직 어린 나이 때문이라.”

레온나토스의 목소리는, 명백히 힘이 빠져 있었다.

당연하다. 레온나토스가 황태자 경쟁에 뛰어들고, 가신들을 받으면서 그들의 운명 모두를 그 작은 등에 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레온나토스의 실패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 등에 올라탄 가신들 모두의 기대와 입장을 저버리는 것이다.

황권에 도전하는 시기가 늦었다거나, 아직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레온나토스의 약점이지만 그렇게까지 낙담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

결국 레온나토스가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문제니까.

하지만 나이는, 레온나토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시간을 빠르게 가게 할 순 없으니까.

교국과의 교섭 자리에 레온나토스가 끼고 싶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디든 공을 세워 입지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레온나토스의 능력과 의지 밖의 요소로 결정된다는 건 레온에게 너무 가혹한 사실이었다.

“…잘 되었군요.”

“뭐라고?”

보기 좋게 상심한 레온의 앞에서, 아렌은 대놓고 말했다.

“황제 폐하께선 레온 전하가 ‘단지’ 나이가 차지 않아서 보내지 않는 것뿐이십니다.”

“…방금 네가 그리 말했지.”

“그렇다면 레온 전하의 결책 사유는 지금으로선 단지 나이뿐, 다른 것에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궤변이다. 나이가 문제일 뿐, 나이‘만’이 문제라고는 황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최근에 동부 국경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전하십니다. 만약 나이 외의 다른 곳에 이유가 있었다면 필시 동부 국경에서의 임무가 거론되었을 것입니다.”

“…아렌 네 말이 사실이라 치자. 하지만 나이야말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솔직히 말해, 막막한 심정인데.”

단적으로 바로 내일 황제가 위중한 상태가 된다면, 지금 당장 유력한 황자가 곧바로 황태자 직위에 올라 국정을 대리 운영할 것이다.

황제는 아직 기력이 정정할 나이였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아렌이 아니고서는.

아렌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 걱정입니까. 시간만이 문제라면, 시간은 흘려보내면 그만인데.”

“…시간을 흘려보내?”

“네. 저흰 그저 그동안 충실하게 내실을 다지며 때를 기다리면 될 뿐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시간은, 저희 편이니까요.”

“…….”

시간이 우리 편.

흔히들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었지만, 이 말만큼 지금 아렌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은 없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어.’

이제는 아렌이 기억하는 첫번째 삶과 너무도 다른 길로 흘러왔기에, 궁전 안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전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아렌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건들이 바뀌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렌이 십수 년 전의 세세한 사건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었기에.

작은 개울 정도는 삽질 몇만으로 쉽게 물줄기를 틀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십, 수백배의 삽질로도 고고히 흐르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바꿀 순 없다.

아렌이라는 변수와는 무관하게, 나라와 나라 사이의 큰 사건은 일어나는 것이다.

‘남은 건, 그때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있게 역량을 가다듬는 것뿐.’

그리고 시간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느긋하게, 하지만 확실히 흘러갔다.

*****

자주색 화려한 옷을 입은 신관은 황궁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기가 눌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연, 이곳이 제국의 궁전, 천년궁인가. 불신자들 치곤 위세가 대단하군.”

그를 나무라듯 말하는 키 작은 신관.

“어허. 말씀 삼가시지요. 저흰 5년 전의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왔을 뿐, 괜히 양국의 우호에 금이 갈만한 말씀을 해선 아니 됩니다.”

“어허,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왜 교국이 일부러 여기까지 와야 하냔 말이다. 5년 전 그토록 저자세로 나왔던 건 놈들이었는데.”

“그것이 외교란 것이겠지요. 세속의 법도가 그러한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제국의 두 황자가 교국으로 와 조약을 했으니, 그 연장은 교국 측에서 오는 것이 양국의 예의에 맞을 겁니다.”

“그게 이상하다고. 양국 사이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느냐 말이야. 어차피 조금 뒤면-”

“-사형.”

이곳은 적지인, 제국의 황궁 한복판이다.

키 작은 신관은 불만 많은 자신의 선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실은 책임교주께서 하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는데, 이곳 황궁에 기묘한 점술가가 산다고 하더군요.”

“기묘한 점술가? 어차피 그래봤자, 신심도 모르는 것들이 떠받드는 미신 아닌가?”

“그러니 저희들이, 직접 점을 받아보고 그 허실을 찔러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아트마 교를 믿는 자들은 교리 이외의 다른 신앙이나 미신을 믿어서도, 행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그것이 교를 설파하는데 필요한 행위로 인정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엇보다, 신관이라 해도 똑같은 인간.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질 만큼 유명한 점술가에 관심이 가지 않을 리 없다.

마침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시동 하나가 지나가기에 둘은 얼른 그를 붙잡았다.

“어이. 여봐라.”

“네. 부르셨습니까.”

“보다시피 우린 교국에서 직접 행차하신 귀인이다. 듣자 하니 이 궁에 꽤 쓸만한 점쟁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안내해주겠느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신관들이 누구를 지칭하지도 않았는데 시동은 둘을 곧바로 안내했다.

황궁 안에 점술가가 많지는 않겠지만, 이리도 스스럼없이 안내하는 걸 보니 황궁을 방문한 과객들이 비슷한 걸 묻는 모양이다.

시동이 길을 안내하는 동안에도 둘은 계속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자가 그렇게 점을 잘 본다는 말인가?”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듣기론 이제 열다섯의 나이인데도 황태자에 유력한 황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자도 물건이지만, 그 자의 가신이 제국에서도 유명한 점술가라는 모양입니다.”

“그런 자가, 우리 점을 봐주겠나?”

“물론 점괘 내놓으란 식의 막무가내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역시 교국에서 온 손님이니 문전박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정중하게 행동한다면요.”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시동은 둘을 황궁 외곽의 으슥한 방으로 안내했다.

둘이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방 안에는 두 신관과 시동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뭐냐, 이 방은?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거냐?”

“기다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둘을 안내한 시동은 고개를 들었다.

“그 점술가는, 이미 이 자리에 와 있으니까요.”

“…설마?!”

그 점괘가 신묘하다는 것만 들었던 신관은, 그의 나이까지는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

황궁의 어린 시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황자의 비서관, 아렌은 바닥에 카드를 놓으며 두 사절에게 말했다.

“그래서, 무엇을 점치길 원하십니까.”

“…….”

“물론, 듣지 않아도 알고는 있습니다만. 형식상의 질문입니다.”

아렌은 이전과 한껏 달라진 표정으로 물었고, 신관 둘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이지만 한겹 아래에선 치열한 암투가 몰아친다는, 제국 황실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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