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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8화 (48/227)

#048화

“…영혼이 탁하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의미인지 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아렌은 굳이 되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어요. 다만, 영혼에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가 지날수록 더 쌓이는 것들이 있죠. 제 눈에는 그게 어렴풋이 보이고요. 그런데, 당신에게는 나이에 맞지 않을 만큼 굉장히 영혼에 많은 것들이 쌓여 있어요. 이상하네요.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굉장하군.’

저 말이 사실이라면 세리엔 황녀가 돌팔이라고 내쫓은 시녀야말로 진짜 점술가였다는 뜻이다. 설령 아렌과 같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렌의 평가는 희석되지 않는다. 그건 그것대로 기술이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처음엔 조금 검증해볼 생각이었지만, 그럴 생각이 싹 가셨다.

아렌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은 전, 점을 보러 온 게 아니에요.”

“네?”

“세리엔 황녀의 일로 황궁에서 온 아렌이라 합니다.”

순간, 점술가의 표정이 흐려졌다.

“황녀님은, 괜찮으신가요?”

*****

시녀의 이름은 몰디나.

바깥 천막의 문에 영업 종료 팻말을 걸어놓은 뒤 다시 앉은 몰디나는 크게 한숨 쉬며 말했다.

“후우, 가엾은 황녀님. 분명 저 때문에 크게 상심하셨겠죠.”

“전 당신을 모르니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녀님이 상심하지 않게 할 수는 있었을 텐데요. 어떤 방식으로든.”

“물론이죠. 사실, 황궁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란 건 애초부터 알았어요. 사냥대회가 있기 얼마 전부터 큰 흉조가 끼었으니까.”

“…흉조?”

“네. 사냥대회가 있기 몇 달 전 부터였나, 그때부터 황궁의 전반적인 운세가 좋지 않았어요. 마치 먹구름이 땅으로 내려와 잔뜩 끼어있는 것 같았죠.”

“흐음.”

태연하게 듣고 있던 아렌이었지만, 듣던 중 옷 아래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회귀했던 시점과 겹쳐. 우연이라기엔, 너무 지나치잖아?’

우스웠다.

황궁의 길흉을 점치던 일을 한 아렌인데, 아렌이 회귀한 이후 황궁 전체에 흉조가 들었다니 말이다.

“그 흉조는, 사냥대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떤, 무슨 점괘를 보든 좋지 않은 징조만 나왔죠. 하지만 황녀님은 계속된 흉조로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고, 흉조가 낀 점괘에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죠. 세리엔 전하께서 너무 걱정하시니, 안심시켜드리려고 무심코 다른 예언을 했습니다만….”

두드려보지 않고 막연히 건넌 돌다리는, 함정이었다.

결정적인 실패 한 번에, 몰디나는 그대로 시녀 자리를 내려 놓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렌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군. 난 변명조차 못 하고 목이 잘렸거든?’

시녀 몰디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제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릅니다만, 전 이제 궁에서 너무 멀어진 몸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궁의 모습은 사냥대회가 끝난 직후에서 멈춰 있으니까요. 무엇을 원하시든 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몰디나는, 아직 아렌에 대해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렌이 본격적으로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건 엄연히 가웨인과 고드프리가 대립했던 어전회의. 그리고 일식의 예견 이후였으니까.

“혹, 절 다시 궁으로 부르려는 것이라면 되었습니다. 세리엔 전하는 그립긴 하지만, 애초에 황궁의 흉흉한 분위기는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요. 빠르든 늦든 궁 밖에서 점집을 여는 것이 제 소소한 꿈이었습니다. 전 지금을 만족합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

아렌이 몰디나에 대해 전혀 모른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의 점술이 알려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몰디나가 황궁을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세리엔 황녀도 가까이 있던 몰디나가 사라진 반동으로 더욱 다른 점술가인 아렌을 찾은 것이고.

대강의 사정에 납득한 아렌이 몰디나에게 은근히 말했다.

“흠,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세리엔 전하가 언제까지고 점술을 싫어하시는 것은… 심지어 황녀님의 점술 혐오는 한 사람을 넘어 점술계 전체를 향하고 있어요.”

“그러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차마 황녀님께 진실을 밝힐 순 없어요. 전하께서 계신 그곳이, 먹구름같은 흉조만이 몰아치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

아렌은 이 시녀를 보러 오기 정말 잘했다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아렌은 몰디나를 잘 달래가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해합니다. 황녀님께 황궁의 모든 사실에 대해 다 알릴 필요는 없지요. 가끔은 진실을 모르는 것이 편할 때도 있으니까요. 단지, 황녀님과 저 사이에, 아주 약간의 내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내기라고요?”

몰디나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렌은 재빨리 그 ‘내기’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세상의 점술을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기 위한 그 승부에 대해.

“…그러니까, 세리엔 전하가 1주일 뒤 방문할 정원을 맞춰야 한다고요? 점술로?”

“네, 그렇습니다.”

원래는 전에 세리엔 황녀를 모셨으면서, 지금은 황궁을 나와 연이 멀어진 사람을 찾아 세리엔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려는 생각이었다. 아렌 역시 세리엔에 대해 그럭저럭 잘 알았지만, 만난 기간이 길었던 만큼 지금 당장에 대한 정밀성은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게 신변잡기 정도를 묻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의외의 대어였다.

‘몰디나의 점술이 진짜라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몰디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전 이 승부에 끼어들지 않겠어요.”

“왜죠?”

“세리엔 전하께서 승부에 나선 건 아렌, 당신이기 때문이죠. 아렌 당신도 점술가 아닌가요? 왜 저한테 대신해서 맡기려 하는 거죠?”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군요. 몰디나.”

“…네?”

액면가로는 열 살밖에 되지 않는 아렌이었지만 몰디나는 그를 얕잡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아렌의 영혼의 색깔을 본 뒤였기 때문일까.

덕분에 아렌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전 딱히, 절 위해 대신 점술을 봐달라 말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세리엔 전하께서 어느 정원에 드시는지 확인하라고-”

“네. 하지만 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이죠?”

“몰디나가 적은 쪽지는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밖에서 밀봉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제가 적은 쪽지와 동시에 확인하는 거지요. 개봉하기 전에는 저도 황녀님도 확인할 수 없도록. 만약 저와 몰디나가 적은 내용이 같고, 둘의 점괘가 같았다면 저와 몰디나 모두 제대로 된 점술가임이 증명되지요. 점술 전체에 대한 세리엔 전하의 불신도 풀릴 거고요.”

“…….”

“아무리 세리엔 전하를 위한 것이라 해도, 실력 없는 돌팔이라 여겨지는 건 싫으시겠죠?”

분명 그럴 것이다. 특히나 정말 실력 있는 점술가였다면 더더욱.

한참을 고민하던 몰디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가 쓴 내용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말, 정말이죠?”

*****

아렌은 몰디나가 쓴 쪽지를 받아들고 황궁으로 도착했다.

촛농을 녹여 몰디나의 인장을 찍었기에 멋대로 개봉할 수도 없었다.

봉투도 두꺼운 종이로 되어있어 햇빛에 비춰보는 것도 안 되니 보안은 충분했다.

황궁에 도착한 후, 다른 곳보다도 아렌은 가장 먼저 세리엔을 찾았다.

“…뭐야? 오늘이 벌써 점보는 날인가?”

“아뇨. 하지만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전해줄 것? 나한테?”

아렌은 받아온 밀봉된 쪽지를 세리엔에게 건넸다.

세리엔의 표정이 급히 어두워졌다.

“이건….”

“실은 전하와 헤어진 뒤 그 시녀가 궁금해져 찾아갔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번 내기까지 말씀드리게 되었죠. 그러자 그분이 쪽지 하나를 적어 주시더군요.”

“설마 이건-”

“네. 일주일 뒤 전하께서 어느 정원으로 갈지 적은 쪽지겠지요. 당일에 같이 열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이건 제가 갖고 있으면 꼭 봐버릴 것만 같으니, 전하께서 갖고 계셔주시죠.”

아렌은 몰디나의 쪽지를 세리엔에게 건냈다. 안의 내용이 궁금한지, 인장으로 힐끔힐끔 시선이 가는 세리엔.

아렌은 그녀에게 대고 말했다.

“안의 내용을, 먼저 보시면 안됩니다.”

“아, 알고 있어!”

“절대, 절대 안 됩니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야?”

세리엔은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아렌은 이미 어떻게 될지 결과를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3일 뒤.

아렌이 밀봉한 쪽지를 들고 세리엔을 찾아갔다.

하지만 어쩐지, 세리안은 힐끔거리다가도 아렌과 눈이 마주치면 피했다.

아렌은 속으로 슬그머니 미소지었다.

‘걸려들었군.’

“세리엔 전하. 몰디나가 남긴 쪽지를, 읽어보셨군요.”

“뭐, 뭐?!”

세리엔은 펄쩍 뛰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절대-”

“장미꽃-”

“…!”

“-정원은, 아니군요. 아니고. 수국은… 그냥 제가 좋아하는 꽃이나 불러봤어요. 유채꽃이나 원추리, 동백도 있는데….”

아렌은 황궁에 있는 정원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아렌이 하나씩 부를 때마다 그걸 듣는 세리엔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 반응으로, 아렌은 쪽지를 읽지 않아도 몰디나가 무엇을 적었는지 알 수 있었다.

‘-원추리. 몰디나가 적었던 건 원추리 정원이었군.’

그리고, 미리 알게 된 예언을 깨트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일주일 뒤, 예언대로 하지 않기 위해 세리엔은 절대 원추리 정원에 가지 않겠지.

“전하께는 죄송하지만, 내기의 규칙을 바꿔야겠군요.”

“뭐라고? 지금 규칙을 바꾼다는 건-”

“전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혹시나 전하께서 내기에서 이겨도, 뒷맛이 남겠지요.”

“…….”

세리엔이 몰디나의 쪽지를 봤다는 증거 자체는 어디에도 없다. 세리엔이 안면몰수하고 우긴다면 아렌으로서도 방법은 없으니.

하지만 아렌이 황녀로서의 자존심을 정면에서 건드린 이상 그녀로서도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전하께서 방문하겠다 마음먹은 정원의 이름을, 미리 쪽지에 적어두는 겁니다. 그리고 전 그 정원의 이름을 맞추는 거지요.”

“…그게, 전의 내기와 뭐가 다르단 거야?”

“아주 많이 다르지요. 방금만 하더라도, 전하께선 몰디나의 쪽지를 보았기에 의식적으로 몰디나가 점친 정원으로 향하지 않으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종이에 적어놓은 글귀는 바꿀 수 없지요. 도중에 마음이 바뀌더라도요.”

“…….”

‘그리고, 내가 알아맞히기도 좋지.’

황녀가 방문할 정원을 며칠전에 미리 맞추기란 어렵다. 아렌이 아무리 사람의 속내를 읽을 수 있어도, 당일에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까지는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황녀가 자신이 방문할 정원의 이름을 미리 적어놓으면, 변덕으로 아렌의 ‘점괘’가 어긋날 염려는 없다. 남은 건, 아렌이 하던 대로 속내를 떠보며 종이에 적은 정원을 유추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경우 몰디나의 점괘는 저절로 빗나가게 되며 아렌의 점괘만 맞게 된다. 궁에서 쫒겨난 진짜 점술가, 몰디나의 복권은 요원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아렌의 의도였다.

‘실력 있는 점술가가 궁 안에 둘이나 있으면 안 되지.’

그런데, 의문도 있었다.

몰디나가 점괘에서 느꼈다는 황궁을 에워싼 먹구름은, 분명 아렌이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몰디나는 그 먹구름의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점을 치지 않아서라기엔, 몰디나는 한번 보는 것만으로 아렌의 속에 서른 살 남자가 들어있는 걸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황궁에 있는 것 자체가 흉조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렌이 황궁 밖, 몰디나의 앞에 있을 때는 흉조를 못알아 본 것이 말이 된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있다.

‘그럼, 어느 쪽에 흉조라는 거지? 나한테? 아니면 황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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