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7화 (47/227)

#047화

세리엔 제7 황녀는 점보는 걸 좋아한다.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어린 시절 레온나토스, 세리엔과 거의 소꿉친구 수준으로 붙어 다녔고, 그 원동력은 아렌이 보는 점괘 때문이었다.

비록 정말 미래를 예견하는 신통력은 없지만, 그 사람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점괘를 말해주는 능력은 예전부터도 탁월했기에, 세리엔은 마치 빠져들듯 아렌의 점괘를 즐겼다.

그 점을 이용하면 이번 생에서도 세리엔에 접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지금까지 아렌은 세리엔에게로의 접근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직 황권 경쟁의 전면에 나설 만한 역량을 채 갖추지도 않았는데 괜히 손을 뻗어봤자 황실의 경계만 살 뿐.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첫 번째 삶의 순수한 아렌이야 정말 다른 뜻이 없었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의 아렌은 심중이 시꺼멓다.

황실 다른 곳으로의 접촉은 레온나토스의 기반을 잘 다진, 최소한 몇 년 뒤에 하고 싶다는 게 아렌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레온 황자의 입지가,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라가고 있어.’

상승기류는 아무리 원한다 해도 쉽게 올라탈 수 없지만, 한번 타기 시작하면 쉽게 내리지도 못한다.

한번 상승기류에 올라탄 이상, 좋든 싫든 이제까지 보다는 더욱 많은 견제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기는 하나라도 더 많은 쪽이 옳다.

아렌은 세리엔 황녀를 찾아갔다. 어디까지나 우연을 가장해야 했지만, 세리엔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이미 아렌은 훤히 꿰고 있었다.

‘보나마나 장미 정원에 있겠지?’

아렌으로선 다가가기 껄끄러운 곳이었지만, 황족에게는 아닌 모양.

세리엔 황녀는 아무도 없는 장미 정원 한중간에 혼자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정돈된 이목구비.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미인이지만, 그녀의 나이가 차면 찰수록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걸 아렌은 알고 있었다.

마치, 꽃이 개화하는 것처럼.

큼흠, 아렌은 목을 한번 가다듬으며 기척을 냈다.

화들짝 돌아서는 세리엔.

“뭐야, 넌 누구지?”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꼭 여기 저 혼자인 줄만 알고 그만-”

“난 네가 누구냐고 물었어.”

첫 만남이라 그럴까, 세리엔의 태도가 어쩐지 꺼림칙하다.

뭔가 눈초리가 이상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레온나토스 전하의 비서관을 맡은-”

“아렌? 들어본 적 있어. 아무 용한 점술가라고 하던데?”

“그저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겸양을 떨면서, 아렌은 슬그머니 세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눈앞에 용하다는 점술가가 넙죽 다가왔는데, 이대로 보낼 셈은 아니겠지?’

하지만, 세리엔은 아렌이 점술가라는 걸 확인한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아렌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점술가를 혐오하기라도 하듯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정원사를 부르겠어.”

“…분부라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하오나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냐? 난 점쟁이들이, 치가 떨리도록 싫으니까.”

“…….”

‘어라?’

무언가가, 다시 어긋난 듯했다.

*****

“…네? 세리엔 황녀님이 점술가를 싫어하게 된 이유요?”

“그래. 너라면 원인을 알고 있을 거 아냐?”

아렌은 밀가루와 꿀을 섞어 구운 과자를 아라흐네에게 건네며 물었다.

“제가 이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하움.”

갑자기 물어보는 것이기에 조공의 의미도 담긴 선물을 한입 베어 문 아라흐네는 입안의 음식물과 함께 우물우물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렌 말대로 세리엔 전하는 점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곁에 점을 볼 줄 아는 시녀도 둘 정도였죠. 아렌이랑 비슷한데요?”

‘세리엔 곁에, 점을 볼 줄 아는 시녀가 있었다고?’

낯선 이야기였다. 물론 첫번째 삶에서 세리엔과 알게 된 건 지금보다도 조금 뒤. 곁에 있는 어쭙잖은 점술가보다 아렌을 택했다면 말은 된다.

“…그 시녀가 왜?”

“일전에 사냥 대회가 있었잖아요. 돌멘 전하가 돌아가셨던. 세리엔 전하께서 그 시녀에게 점을 봤다나 봐요. 시녀는 사냥대회가 무탈하게 잘 끝날 거라고 말했고요.”

“저런.”

그제야 대강의 윤곽이 잡혔다.

요는, 시녀에게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것이다.

일이 좋게 풀릴 거라고 단정하는 식의 점괘는 금물이었다. 점괘가 빗나갔을 경우 변명하기도 어렵고 적대감도 고스란히 받게 되니까.

물론 아렌도 생전 그런 식의 점괘를 해본 적 있었으니, 그 마음만큼은 잘 알았다.

‘황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던 거겠지. 웬만하면 무탈하게 넘어갈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냥대회는 피비린내 나는 결과로 끝났고, 시녀의 점괘 역시 성대하게 실패했다.

세리엔이 얼마나 실망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실망은 곧, 점술 전반에까지 퍼진 것이겠지.

그렇다면, 아렌이 할 일은 정해져있다.

‘한번 실망한 사람이 다시 믿게 되었을 때, 그 믿음이 훨씬 견고한 법이지.’

“아, 또 뭔가를 꾸미고 있네요. 맞죠?”

“…무슨 소리야?”

아렌은, 문외한인 아라흐네마저 곧바로 지적할 정도로 수상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렌은 다시 세리엔 황녀에게 접근했다.

세리엔은 황궁 깊은 곳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렌은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제12 황자의 비서관. 다소 접근이 제한된 곳 정도는 출입이 가능했다.

먼젓번 생을 통해 알고 있는 세리엔에 대한 정보까지 참고하면, 그녀의 뒤를 쫓는 건 생각보다도 간단했다.

“…뭐야, 너. 끈질기게 계속 따라온다?”

“우연히 제가 가는 곳마다 계신 것뿐이시죠.”

“씨이, 아닌 것 다 알아. 저리 가라니까?”

“…실례했습니다. 꼭 사과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전 단지-”

“네가 뭐라고 하든, 점이니 운세니 하는 건 이제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건 말짱 다 거짓말이니까! 점술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넌 왜 돌멘이 죽는다는 걸 몰랐지?”

“점술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나아갈 방향성만을 어림짐작해 보여주는 것뿐이니까요. 황녀님 말씀대로 세상에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 역시 바뀔 수 있지요.”

아렌은 점술가들이 흔히들 말하는 자기 변호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리고, 평소 점에 관심이 많았던 세리엔은 곧바로 아픈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네 말대로 예견한 미래가 바뀔 수 있다면, 점은 왜 필요한 거지? 너희가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는 말이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냐는 말이야.”

‘…그거야, 지당한 말씀.’

세리엔이 원론적으로 한 말은 의도치 않게 아렌의 정곡을 찔렀다.

“게다가, 내가 점술가를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싫다면 싫다는 거지, 왜 굳이 날 따라오는 거야? 앞으로 더 따라오면 위병을 부르겠어. 알겠어?”

이미 황녀 주변의 호위병들의 눈이 심상치 않다. 아렌의 정체가 거의 밝혀진 공인이기에 움직이지 않을 뿐, 언제라도 아렌을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다.

아렌은 기죽지 않고 말했다.

“황녀님께서 점술을 싫어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점술을 익힌 몸, 황녀님 말씀대로 사람을 현혹하기만 하는 술수는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되게 두는 것도 원치 않고요.”

아렌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이대로 황녀가 점술을 불신한 채로 둔다면, 황실 깊숙이 아렌의 손이 뻗는데 큰 장애물이 된다. 레온나토스와 세리엔을 매개로 점차 손을 뻗겠다는 계획 자체를 전면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아렌이 진지하게 말하자 세리엔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전히 점술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예전에 그랬듯, 점술이 누군가에게는 진지한 것일 수 있다는 점과 아렌이 일식마저 예언했다는 용한 점술가라는 점 모두가 반영된 결과였다.

“…알았어. 그러니까 너는, 증명하고 싶다는 거지?”

“…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시험을 보자. 네 점술로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를 맞추는 거야. 점술이 아니라면 네가 절대 몰랐을 정보들로. 내게 납득을 시켜준다면, 네 점술을 믿을게.”

“-좋습니다, 그러시죠.”

시험은 예상 밖이었지만, 허용의 범주 안이었다. 시험을 통해 아렌과 아렌의 점술을 믿어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조건이다.

‘아티스에서와는 달라. 황궁 안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고.’

세간의 다른 점술가와 달리 아렌의 점술은 정말 잘 들어맞는다.

점괘 때문이 아니라, 정말 미래를 보고 온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아렌은 세리엔 황녀가 내건 조건을 듣고 잠시 당황해야만 했다.

“난 일주일 뒤 황궁 안에 있는 열두 정원 중 한 곳으로 갈 거야, 내가 어느 곳에 갈까?”

“…….”

“기한은 3일 주겠어. 네가 쪽지에 밀봉해서 적어주면 정원에 다녀온 뒤 쪽지를 열어볼게. 그럼 되겠지? 아니면… 설마 이제 와서 안된다고 말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

“-물론입니다.”

아렌이 당당하게 대답한 만큼의 자신은 솔직히 자신은 없다. 언제 어떤 변덕이 튈지 모르는 1/12의 확률. 이건 실패하는 것이 당연했다.

“혹시 전하께서도 일주일 뒤 어느 정원에 갈지 미리 적고 밀봉해두신다면-”

“그럴리 있어? 내 변덕이나 변수까지도 점술은 파악한다는 거잖아? 너라면 내가 아는 한 가장 용한 점술가일 텐데, 너마저 이걸 알아맞히지 못하면 점술가도 역시 별 볼일 없는 거겠지.”

“…….”

해가 떨어지는 걸 예언하고, 주군인 레온나토스를 단숨에 부각시킨 실력있는 점술가.

최근 그렇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아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녀에게 한 점괘를 틀리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미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아렌은 옷 아래로 식은땀이 흐르는 글 느끼며, 황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요. 그럼, 3일 뒤에 뵙겠습니다.”

“어머. 난 점괘 빌미로 매일 찾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염치가 있나 봐?”

“정말 진지한 점일수록 사전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세리엔에게 기별한 후 물러서며, 아렌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세리엔을 점쳐줬던 시녀를 찾는 일이었다.

“대체, 그 여자는 점술을 어떻게 틀렸길래 이렇게 된 거야?!”

아렌은 황자의 비서관 신분을 이용해,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세리엔 황녀의 시녀를 수소문했다.

아직 황도를 떠나지 않고 수도의 뒷골목에 점판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렌은 지체하지 않았다.

*****

“어서 오세요, 손님이신가요?”

항상 질척이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황도 슬럼 지구의 거리.

세리엔 황녀의 점술가였다는 시녀는 그곳에 원뿔용 거처를 만들고 좌판을 열어놓고 있었다.

아렌은 무거운 천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후드를 눌러쓴 풍만한 여성이 앉아있었다.

“네. 점을 보러 왔습니다.”

“어머나. 이렇게 어린 분은 처음인데. 최선을 다하죠.”

시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고작 열살임에도 아렌이 손님으로 왔는데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 점술가로서 나쁘지 않은데.’

아렌은 시녀 앞에 앉았고, 시녀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수정구슬을 똑바로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아렌도 수정구술을 노려봤지만, 역시 아렌의 눈엔 별다른 것이 비치지 않았다.

‘역시, 사기 아냐? 세리엔을 오래 섬겼을 테니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만 가늠하면 되는데.’

아렌의 속에서 시녀의 중요도는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시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수정구슬에 눈을 비추며 말했다.

“…흠, 이상하군요.”

“이상하다니, 뭐가요? 전 아직 아무것도 여쭤보지 않았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점을 치기 전, 고객의 영혼을 엿보는 게 평소 습관이라서요.”

‘흠. 영혼이라. ‘그런’ 설정이라 이거지?’

“제 영혼이 어딘가 이상하단 말인가요?”

“영혼이, 이상하리만치 탁해요. 이제 열 살 남짓 같으신데, 영혼만큼은 마치 서른이 족히 넘은 남자가 들어 앉아있는 것 같거든요.”

“…그거 신기하네요.”

애써 태연한 척하는 아렌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뭐야, 정말 점술가였어? 제대로 미래를 보는?’

그 사실 자체로도 놀랐지만,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면 더욱 황당했다.

실제 능력이 있는 용한 점술가의 빈자리를, 입만 번드르르한 가짜가 채워야 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