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다음날.
아렌과 함께 뻘쭘하게 서 있는 핀을 보고 황자 레온나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나토스는 아티스 해방전선과 아렌이 나눈 약조를 알고 있지 못하다.
“핀? 자네가 왜 여기에?”
“아무래도 전하를 만나 뵌 후 전하에게 감화된 모양입니다. 전하께 힘이 되고 싶다고 어제 찾아왔더군요.”
“어제? 어제 아렌은 온종일 훈련을 받지 않았나?”
“…좀 늦은 시간이긴 했지요.”
핀은 혹시 들키면 어떡하냐며 눈을 흘겼고, 아렌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처음엔 다소 당황한 레온나토스. 하지만 곧, 그럴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긴. 자네들에겐 제대로 말해주지 못한 것 같군. 내가 황제가 된다면, 소외된 아티스의 옛 영토, 만월강 동부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야.”
“방금 해주신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부디 이 한 몸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물론 핀도 모르지는 않았다. 방금 레온나토스가 한 말은, 제국이 아티스의 남은 옛 영토마저 재점령하려는 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핀은 이미 멸망한 ‘아티스’라는 나라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핀은 언제나 지금 살아있는 유민들이 우선이었고, 레온나토스의 약조가 사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음, 마음은 고맙지만, 자네를 어디에 둬야 할지….”
“그것 말입니다만, 전하.”
아렌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핀을 전하의 궁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밀정으로 쓰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밀정? 핀에게 그런 특기가 있었나?”
“혼자서 망자들이 우글대는 아티스 궁전으로 몇번이고 잠입한 자이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되기 위해선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일을 해줄 자도 필요합니다.”
“하긴, 벤팅크 후작의 저택에 잠입했던 것도 저 자였다지. 흠, 아렌 네가 그리 말한다면.”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들었다.
“좋다. 핀 자네를 내 직속 궁인으로 받아들이지. 당분간 말단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겠지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국 자국민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황궁 생활을 한 자도 아니지만, 그리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언제나 황자 주변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왔다 나가곤 했으니까.
정작 레온나토스는 모르지만, 아렌은 핀이 얼마나 잠입의 대가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핀, 행동거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 황궁 곳곳에는 ‘황제의 눈’이라 불리는 밀정들이 있으니. 딱히 은밀히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곳 어디든 거기에 있다고 여기는 게 좋을 거야.”
“황제의 눈이라… 혹시 그들이 단검으로 뒤를 노리기도 합니까?”
“뭐?”
“아, 아닙니다. 잊어주십시오.”
어젯밤 아렌의 처소에 침입했다 호된 경험을 했던 핀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아렌의 생각이 한 곳으로 미쳤다.
‘황제의 눈이라. 그러고 보니 아라흐네를 만나러 가지 않았군.’
핀의 교육은 평소엔 평범한 시녀인 멜로익이 맡기로 했다.
“…!”
무언의 눈빛으로 항의하는 핀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렌은 아라흐네에게 향했다.
아라흐네. 첫 번째 삶에서 자신의 아내였던 시녀.
하지만 30살이 되던 해, 아렌은 아라흐네에게만 말한 점괘의 내용이 유출되어 모함을 받아 죽임당했다.
다시 돌아와 아라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아렌은 반가움과 배신감이 뒤섞인 감정이 들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자 점차 덤덤해져갔다.
첫 번째 삶은 분명 아렌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은 마치 기나긴 꿈의 기억처럼 현재와 뚜렷이 구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다고, 누명을 쓰고 죽었던 걸 용서해줄 생각은 없지만.’
아라흐네가 주범은 아닐 것이다. 그녀를 이용한 누군가. 그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라도 아라흐네는 계속 곁에 둬야만 했다.
언젠가 같은 사람이, 그녀에게 똑같이 접근해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늦었잖아. 왜 이제 오지?”
황궁 외원의 으슥한 담벼락 아래.
멀리서 아라흐네가 다가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색 곱슬머리에 조금은 작은 눈.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말처럼, 성인일 때 만난 아라흐네는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도 검은 차양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아렌이 용인한 것도 그런 아라흐네의 성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아렌의 좋은 장기말일 뿐이지만.
“아렌은 비서관씩이나 되잖아요! 전 그냥 말단 하녀거든요? 나오고 싶다고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는 줄 알아요?”
제9 황자 테오드릭의 하녀이자, 비밀신분으로 ‘황제의 눈’이기도 한 아라흐네.
비단 아라흐네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아라흐네 말고도 이름모를 수 많은 시녀들이 황제의 눈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위에 보고하고 있으니까. 레온나토스 곁의 누군가도 황제의 눈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마도, 나라면 누군지 가려낼 수 있을 테지만.’
하지만 황제의 눈을 색출해내는 건 그만큼 각오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왜’ 황제의 눈을 가려냈는가와, ‘어떻게’ 황제의 눈을 가려냈는지를 상대가 궁금해할 테니까.
“여하튼, 그동안 특별했던 일 없어? 예전처럼 복채를 먼저 받지.”
“씨이. 아렌이 없는 동안 점괘 없이 있어 봤는데, 살만 하던데요? 그냥 점괘 안 받아도 되거든요, 난?”
“그래? 그거 유감이네. 아티스 왕궁의 도서관에서 그 지역 점성술을 익혀왔는데 말야. 흉조가 보여서 이건 꼭 알려줘야 할 것 같아 부른 건데 굳이 필요 없다면-”
“누가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아라흐네가 아렌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대체, 내 주변엔 왜 이렇게 흉조가 많아요?”
“황궁이잖아? 황궁의 권력자 옆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길조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어?”
“…….”
“알잖아? 이번에도 복채 먼저 받을게. 뭔가 해줄 이야기가 있는 것 아냐?”
아라흐네는 불만인 듯 볼을 불퉁였다.
언제나 아렌에게 먼저 말리는 것이 못내 불만이었지만, 아라흐네로서는 방법이 없다.
주도권을 쥐는 건 언제나 아렌이 먼저였고, 그건 바뀌지 않을 테니까.
“이제 여독은 좀 풀렸어요? 동부 국경에서 꽤나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뭐… 그래서 말해줄 내용이 뭐야.”
그 대목에서, 아라흐네는 조금 짓궂은 표정이 되었다.
“점술가는 자기 점괘는 모른다는게, 조금 안됐긴 하네요. 어쩌면 아렌, 당신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뭐?”
아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
‘대륙’의 패권을 쥔 곳은 누가 뭐라 해도 제국이다.
하지만, 제국에 대항마가 전혀 없냐면 그것은 아니다.
제국의 서쪽, 열아홉 도시 국가의 연합체 ‘도국연합’은 군사력이 아닌 새로운 무기, 재력으로 제국을 시시각각 압박해오고 있었고 남부의 신정국가 아트마 교국에서도 점점 포교가 강화되고 있는 형국.
특히 30년 전의 대확장 전쟁에서 제국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 성공했고, 동쪽의 왕국 아티스는 멸망시키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었다.
인접한 국가가 멸망하는 것을 본 도국연합과 교국은 제국을 경계하며 연합 전선을 짰기 때문이다.
제국으로서도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부담스럽다.
그리고, 국경 남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제국의 머리를 싸매게 하기 충분했다.
제국의 신료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자리에 맞지 않는 고성들이 오고 갔다.
“그러면 지금, 저 광신도들이 하는 말을 그냥 수용해주자는 말입니까! 제국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다시 전쟁을 주장하시는 겁니까? 대확장 전쟁 이후 30년밖에 흐르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대국은 대국으로서 배포를 보여야지요!”
“명백한 도발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배포라면, 제국은 그런 배포를 가질 필요 없습니다!”
군무대신과 외무대신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다른 신료들 역시 각각 한쪽을 지지하는 가운데 의견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단상 위 금면병들과 함께 앉아있던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나온 말들을 정리하지.”
“…….”
시장바닥 같았던 회의장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아트마 교국은 국경을 넘는 모든 상단에 대한 검문 검색을 요구하고 있다. 태양교 교단이 국경을 넘어 포교하는 일이 많아서라고 한다. 상단이 검색을 위해 모든 짐들을 풀고 다시 묶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건 사실상 제국과의 무역에 제재를 가한 것이나 다름없다, 맞나?”
“그러하옵니다, 폐하.”
“군무대신은 제국의 위력행사를 주장했고, 외무대신은 수용을 주장했지. 맞나?”
“그러하옵니다, 폐하.”
“만물 이치에 명확한 정답이 없듯, 두 주장 중 어느 것에도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황자들의 역량을 가늠하는 데 쓰고 싶군.”
“…….”
다시금 좌중이 고요해졌다.
동부 국경의 소요사태를 해결하는데 제12 황자를 보냈다 복귀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또다시 국가의 일에 황자를 쓴다니.
이렇게 일찍 후계자 선정에 서두를 나이가 아니었다. 황제의 나이는 40 중반. 적어도 20년은 더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
혹시 황제의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는 것인가.
신료들이 바짝 긴장했다.
“보낼 황자들은… 4황자. 그리고 9황자로 하겠다.”
“…가웨인 전하와 테오드릭 전하 말씀이시군요.”
둘 다 황자 중 무골로 손꼽히는 자들이었다.
아직 테오드릭은 나이가 다 차지 않았지만, 이미 기골이 장대해 장성하면 호리호리한 체격인 가웨인조차 능가할지도 모른다 여겨지고 있었다.
딱히 둘의 무력이 필요한 일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저 둘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군무대신이 은근하게 말했다.
“…또 다른 황자도 같이 보내심이 어떠한가 합니다. 최근 국경에서의 분쟁을 훌륭하게 해결한 황자가 계시지 않습니까.”
“12황자 말인가.”
레온나토스.
예전에는 존재감 없는 황자 중 하나에 불과했는데. 이런 곳에서 직접 이름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위상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제는 얼굴을 가린 차양막 뒤에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불편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12황자, 레온나토스는-”
*****
“…아트마 교국과의 교섭 대표로, 제4 황자 가웨인과 제9 황자 테오드릭이 선정되었다?”
아렌은 황궁 여기저기에 붙은 포고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아니었잖아? 아라흐네 고것이 감히, 잘못된 정보를 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아라흐네를 탓하는 건 아니었다.
아렌에게 말까지 했을 정도면, 꽤나 높은 선에서까지 레온나토스가 거론되었던 것은 사실일 터.
그렇다면, 더 높은 곳에서 레온나토스의 이름을 반려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아라흐네가 반쯤 확신할 만큼의 정보를 단칼에 거절할 위치의 인물.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자는 한 명 뿐이다.
‘황제가, 레온나토스를 반려시켰다. 왜지?’
단지 임무를 다녀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라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레온에 대한 황제의 다른 심중이 있다면, 그건 아렌으로선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문제였다.
앞으로 있을 레온의 거취에 대해, 아렌이 직접 알아두지 않으면 점술가로서의 면이 서지 않으니까.
‘아트마 교국과의 분쟁이라. 전에는 교섭역으로 가웨인만 뽑혔었는데. 지금은 테오드릭도 함께군. 무엇 때문이지?’
첫번째 삶과 달라진 부분은 많다.
제 13황자 돌멘의 죽음과, 제6 황자 고드프리의 유폐 아닌 유폐.
그리고 동부 국경으로 파견된 레온나토스.
이 중 어느 부분이 지금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렌은 알아야 했다.
‘정보 창구가 너무 부족해. 아라흐네도 결국은 시녀로서 알만한 정보 밖에 없으니. 황실 깊숙이, 정보원을 하나 더 만들어두고 싶은데.’
점찍어둔 사람은 이미 있었다.
황자의 비서관이 되고 난 후 행동이 좀 더 자유로워졌고, 이 입장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세리엔 황녀. 여전히 점술은 좋아하겠지?”
첫 번째 삶에서 유난히 아렌을 잘 따르던 황녀였지만, 가장 최근에 본 기억은 목이 잘리기 전, 아렌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던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 암살에 관여했다는 누명과는 달리,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의 점을 봐 주었다. 비록 비위를 맞춰 주었을지언정,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황가라는 무대 위에 있는 황족이라는 인형, 거기에 실을 연결하는 느낌으로.
아렌의 손이 점점 뻗쳐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