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검 끝은 네 명치 높이에서 인중 높이 사이에 두는 게 나을 거야.”
“아니, 그건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사람의 정공법이죠. 아렌 공은 기습이나 변칙을 익히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필요한 건 주변 다른 호위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거니까.”
더글라스와 발커스. 두 기사가 동시에 달라붙어 아렌을 가르치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가르치는 건 알겠는데, 왜 발커스가?’
처음엔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발커스는 이내 의견을 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의견은 곳곳에서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가르침은 턱턱 막혔다.
“무슨 소리입니까, 발커스. 검을 배울 때 벌써 변칙부터 쓸 궁리를 하면 실력이 늘지 않아요.”
“더글라스 경이야말로 무골이시니, 무술에 재능이 없는 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시겠죠. 아렌 공이 검사가 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배우지도 않았는데 적성을 논하는 것도 희극이죠. 아렌에게선 어쩐지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진단 말입니다.”
“아렌 공이 범상치 않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그것과 무술의 적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죠.”
둘의 말이 오갈 때마다 아렌의 시선은 좌우로 오고 갔다.
“흐음, 흐음.”
그리고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렌.
문득 두 기사의 시선이 아렌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 묻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검을 배우려는 거지? 굳이 배울 필요 없지 않나?”
“그야, 배우지 않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
아렌은 아홉 탑의 궁전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그때 자신이, 노인을 무력으로 제압할 힘이 있었더라면.
그게 아니라도 온갖 음모가 도사리는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예전처럼 자신을 노린 누군가가 다가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가 강해진다면 황자의 대역 역할도 서슴없이 맡을 수 있겠지.’
재주가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렌의 입지는 더욱 올라가는 것이다.
“흐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글라스는 어쩐지 히죽히죽 웃었다.
“네가 서툴게나마 뭔가를 하려는 모습은, 보기 썩 나쁘지 않군. 항상 사람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더라니.”
“…제가 그런 식이었어요?”
옆에서 발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뭘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지을 때마저도 어쩐지 연기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재수 없긴 했죠.”
‘…난 전혀 몰랐는데.’
지금이라도 알게 된 이상, 아렌은 더욱 공들여 그들을 속이기로 결심하면서 말을 돌렸다.
“그렇군요, 그런데 발커스. 아티스에서 잃은 기사단의 인원은, 다시 충원할 건가요?”
“-아니요.”
아홉 탑의 궁전에서 잃은 제8 기사단원 11명. 그 빈자리를 다시 신입들로 채울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
결정할 사람은 레온나토스와 발커스였고, 레온은 발커스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발커스의 결정은, 충원없이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
“그들의 빈자리가 적지 않겠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두고두고 잊지 않게 하겠죠.”
모두 목숨을 걸고 겪은 강렬한 경험은,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좋은 접착제가 될 것이다. 발커스는 새로운 인원을 받아 그 경험을 희석시키는 것보다, 온전히 기사단의 양분으로 삼아 확실한 결속력을 얻는 것을 택했다.
아트레움에서의 일전을 겪은 기사단은 결속력도, 레온나토스에 대한 마음가짐도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 참.”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발커스가 말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기사단의 명칭을 지어주셨죠.”
지금까지는 제8 기사단이라 불렸을 뿐이지만, 드디어 기사단은 주인에 의해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흠흠, 발커스는 목을 가다듬은 후 조금 쑥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낮안개 기사단.”
“그거, 좋은 이름인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발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렌이 보기에, 발커스의 말과 표정에 다른 뜻은 없었다.
*****
“…끙, 죽는 줄 알았네.”
늦은 시간까지 한 훈련으로 온 몸의 근육이 저렸다.
“그 인간들, 생 초짜를 잡아놓고 어디까지 가르치려는 거야?”
해가 저물어 목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부득부득 대련을 자처하는 두 기사들에게서 아렌은 도망치다시피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가신으로서 일과 시간에 훈련을 하는 건 원래는 말이 안 되는 행동이지만, 레온나토스가 너그러이 허락해줬기에 가능했다.
바로 퇴근해도 될 시간이지만, 아렌은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레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레온의 처소 근처. 마침 레온은 황궁의 신료 중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전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슬쩍 아렌을 쳐다보고는 물러가는 궁인.
명백히, 아렌을 의식하고 있는 투였다.
“누군가 방문하셨군요. 누구셨습니까.”
“스커드 군무대신. 동부에서의 임무에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문안차 인사 왔다더군. 국경에서의 정세도 듣고 말야.”
“하지만 그건, 이런 자리에서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실상은 내게 눈도장을 찍는 데 더 목적이 있었다, 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자의식이 강한 거려나?”
“아뇨. 저도 폐하의 생각과 같습니다.”
고드프리 황자가 사실상 황권 경쟁에서 퇴출되었다, 는 소식은 아렌도 이미 들었다.
그리고 정황상 고드프리를 낙마시킨 것은 어전 회의에서 있었던 레온나토스의 연설.
그리고 그 직후 있었던 국경에서의 임무도, 레온나토스는 훌륭히 완수하고 돌아왔다. 비록 그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새로이 배정받은 기사단을 열 명 이상이나 잃었음에도 황제는 문책하지 않았고, 기사단의 사기 역시 드높았다.
원래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뒷 서열의 황자였던 레온나토스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점점 주목할만한 인물이 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군. 이제 내게 오는 부담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나, 평소에 내가 받던 것보다 너무 과한 관심을 받고 있으니.”
“이제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눈도장을 찍으러 오는 궁인, 신료들이 점점 많아질 테니까요. 앞으로 이쪽에서 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가신으로 들어오려는 자들 역시 분명히 생기겠지요. 그들을 옥과 석으로 구분하는 눈 없이는 황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습니다.”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그때는, 잘 부탁하네, 아렌.”
“설마 저한테 모든 인선을 위임하려는 건 아니시겠죠.”
“벌써 반쯤은 그렇지 않나? 더글라스도, 레밍도 자네가 천거한 자들이지. 그들의 덕을 이미 톡톡히 보았는데. 게다가 내가 황권 경쟁이라니, 사실상 아렌 네가 부추긴 거나 다름없지 않나?”
“제가요? 전 보잘것없는 시종일 뿐인데요.”
후후후,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서로 웃기 시작했다.
명석한 레온나토스를 완전히 속여넘기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생긴다.
이럴 땐 오히려, 일정부분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전 단지, 황자님의 운명을 알아보고 조금 등을 떠밀어드린 것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전하께서 타고나신 운명 때문이겠지요.”
“내겐 바로 그 등떠밀림이 필요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겨우 주변의 눈에 드는 단계가 되었을 뿐. 유력한 주자까지는 아니다.
레온나토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고 있어, 아렌.”
*****
아렌은 침소에 누웠다.
황궁의 궁인 거주구에 마련된 자신의 독방.
고작 10살의 나이에는 과분할 만큼 넓은 방이었지만, 정작 아렌은 익숙하게 그 방을 사용했다.
그 방은 다름 아닌, 자신이 첫 번째 삶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그 방이었으니까.
‘…그리고 여길 떠나 새집에 가자마자 잡혀들어갔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그때, 자신은 누명당해 죽었다.
다시 되돌아온 지금,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는 남아있지만 정작 누가 자신을 무고했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첫번째 삶에서 아렌의 아내였다가 배신한 아라흐네였다. 이번에도 아라흐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누군가 아라흐네에게 접근해온다면 바로 그 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도, 가정일 뿐이지만.’
황궁의 푹신한 침대는 실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아렌은 푹신한 침대에 빠져들듯 잠이 들었지만, 달콤한 수면은 잠시뿐이었다.
“-이봐.”
“…으음?”
잠결에 눈을 뜬 아렌. 어둠 속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만월강 서쪽, 보엘 벤팅크 후작의 저택에서와 실로 비슷한 기시감.
아니, 심지어 침입한 사람도 같았다.
“…핀?”
“너, 정말 황자가 아니었잖아? 세상에….”
“…당신이 왜 여기 있지?”
아무리 궁의 고용인들만의 거처라지만 엄연히 황궁 안에 있다.
황궁 안과 밖은, 그 경비의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
“당신들을 그냥 보내놓고, 우리는 멀리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잖아? 그래서 몸이 가장 날랜 내가 아티스 해방전선을 대표해서 여기 잠입해 들어온 거지.”
‘아니, 그냥 몸이 날랜 수준이 아니잖아.’
황궁의 경비마저 돌파할 정도면 일류 도둑이나 암살자 수준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납득이 되는 면도 있었다.
만월강의 삼엄한 경비를 예사로 넘고, 망자들이 우글대는 아티스 궁전에도 수도 없이 들락날락할 정도라면 궁전의 외곽 경비까지는 어찌어찌 넘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아니면 내가 황자가 아니라 실망했어?”
“-아니. 우리한테 약조한 말만 거짓말이 아니면 전혀 상관없지만.”
“그거라면, ‘진짜’ 황자이신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니 걱정 안 해도 돼. 물론, 전하께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만한 위치에 계셔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왠지, 뭔가 요구하는 듯한 말인데?”
그 말대로. 아렌은 당당하게 말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시기 합당하신 분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장성하지 못하시지.”
“아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
핀은 어른용 침대에 대비되어 더욱 작아 보이는 아렌을 보며 어이없이 말했다.
아렌은 핀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덕분에, 전하 주변에는 항상 인재가 모자라지. 그야말로 손발이 모자라 이빨까지 빌려 써야 할 정도로.”
그제야, 핀은 아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듯 웃었다.
“-아항. 그러니까, 너 나더러 그 전하를 섬기라 그거냐?”
“마음속 깊은 충성심까지 바라는 건 아냐. 레온나토스 전하가 황제가 되는 것. 그게 너와 아티스 해방전선에도 좋은 것 아닌가?”
“확실히, 그건 맞지만….”
“잘 생각해봐. 해방전선의 두목이라면 다르겠지만, 너라면 아티스 인으로서 제국에서 일하는데 별 거리낌도 없잖아?”
“…….”
“잘 생각해봐. 너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테니까. 그럼 잘자고.”
“…뭐?”
“난 자야 해. 내일도 출근해야 하거든. 밤에 바쁜 너와는 달리.”
이젠 아예 핀을 밤손님 취급하는 아렌이었다.
물론 아렌에게 보인 행태를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답은 3일 안에 들을게. 한밤 중, 여기에서. 밤에 몰래 잠입하는 게 특기니, 상관없지?”
“…너야말로 괜찮겠어? 내가 나쁜 맘이라도 먹는다면 어쩌려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뭐?”
순간.
핀의 등 뒤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옷 너머 날카로운 칼끝이 자신의 척추 바로 위를 지그시 누르는 감각.
살갗을 조금 뚫은 감촉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단검의 날카로움이라면, 찰나에 자신은 죽거나 불구가 될 거라고.
“죽일까, 아렌?”
아렌은 핀의 뒤쪽, 어둠 속에서 줄곧 숨죽이고 있었던 또 하나의 손님에게 손짓했다.
“죽이면 안돼, 멜로익. 아마도 레온 전하의 부하가 될 사람이니까.”
“알았어.”
황자 레온나토스의 암살시종이면서, 지금은 아렌 곁을 지키는 멜로익이었다.
생각보다도 손쉽게 궁전의 담을 넘을 수 있었기에 조금 맥이 빠졌던 핀은, 진정한 황궁의 깊이를 보게 된 것 같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