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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4화 (44/227)

#044화

올 때보다 조금 숫자가 줄은, 40여 명의 기사들이 황폐해진 만월강 동쪽을 달렸다.

가장 선두에는 어리지만 능숙하게 말을 모는 레온나토스 황자.

그리고 비슷한 나이면서 그에 못지 않게 말을 모는 가신, 아렌도 있었다.

“야, 아렌. 아침엔 뭐가 그리 답답해 산책을 나갔던 거야? 피곤하지도 않았냐?”

“….”

아렌이 잠시 납치되었음을 전혀 모르는 더글라스.

물론 기사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트레움에서의 고된 여정 직후였기에 기사들도 완전히 골아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납치 대상이 정말 레온나토스였다면 쉽게 되지 않았을 거다.

어디까지나 기사들이 호위할 대상은 레온나토스였고, 아렌은 훨씬 후순위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아렌. 다음부턴 기사 한둘이라도 대동하고 나가도록. 아직 안개가 완전히 안전한지도 모르는데, 너무 경솔했어.”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솔직히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지만, 아예 없던 일로 할 거면 차라리 눈치조차 못 채는 편이 나았다.

기사들은 황무지가 된 습지를 다시 거슬러 국경 요새에 도착했다.

고작 며칠 만이었지만, 기사들이 출발할 때를 기억하고 있던 초소 경비병들은 적잖이 놀랐다.

“…저, 인원은 이게 전부입니까? 출발할 때는 분명 50이 넘었는데 왜 지금은-”

“그건 자네에게 설명할 문제가 아니야. 아니면 자넨, 황제 폐하보다도 먼저 내게 보고를 받고 싶은 건가?”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만월강 동쪽에서 있었던 일은 최대한 함구하는 편이 좋았다. 괜한 소문으로 만월강 동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그곳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는 이상 더더욱.

이제 만월강 서부에 더 볼 일은 없었지만, 떠나는 길 마지막에 이곳의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야 했다.

만월강 서부의 주인, 보엘 벤팅크 후작의 저택 앞에는 이미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엘 벤팅크 공.”

“소식을 듣고 마중 나가던 길이었습니다. 전하.”

“미안하군. 황급히 수도로 돌아가고 싶으니, 자네의 대접도 다음에 즐겨야겠어.”

“물론입니다, 전하. 부디 다음 기회엔 이곳 만월강 유역을 듬뿍 만끽하셨으면 좋겠군요.”

원래 아티스 왕국의 귀족이었다가, 전쟁 초기에 제국에 전향한 자.

그때는 보엘도 아직 어렸겠지만.

레온나토스는 물었다.

“보엘 벤팅크 후작. 아티스 수도의 안개에 대해, 자네는 알고 있었나? 자넨 아티스 출신의 귀화인이 아닌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굵은 땀을 흘리면서도, 보엘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국에서는 명백히 정보를 통제하고 있지만, 지금껏 옛 아티스의 땅에서 새 나라가 건설되고 있지 않은 것은. 아티스의 땅을 흐리는 안개 때문이지요.”

“…자네를 책망하려는 건 아니네만. 알고 있었다면 자네로선 그들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나?”

아렌은 보엘 벤팅크의 눈을 바라봤다.

달관한 눈이었다.

“글쎄요.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희 가문조차 제국의 거대함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개인일 뿐이지요. 아티스에서 투항한 자가, 아티스의 유민들을 지원한다는 게 제국에 알려지면 어떤 말이 돌지는 뻔하지요.”

“하지만-”

“비겁하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저희 손안에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입니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운영을 명 받은 영지나, 그곳의 영지민들같은 자들 말입니다.”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실례했군.”

“전하를 모시게 되어서 즐거웠습니다. 부디 다음 방문에는 더 장성한 모습으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보엘은, 아렌이 꼭 다시 올 것처럼 말했다.

레온과 아렌이 탄 마차는 다시 길을 달렸고, 이따금 거칠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레온의 시선은 온통 마차의 창문 너머로 고정되어있었다.

완벽히 관리된 수로와 그 사이로 놓인 황금빛 밭들. 올 때는 그 풍경이 마냥 아름답기만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렌은 줄곧 말이 없는 레온나토스에게 물었다.

“…뭘 생각하십니까, 전하.”

“난 원래 황권에 전혀 생각이 없었어, 아렌.”

“네. 알고 있습니다.”

“황제 따윈 누구든 하고픈 자가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난 되어야 할 자도, 되고싶은 자도 아니었으니까.”

“네.”

“하지만, 내가 만월강 동쪽에서 보고 겪은 것은, 황자들 중 나만이 아는 것이지. 이제야 비로소, 내가 황제가 된 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느낀 것 같아. 그간 제국은 다른 곳에 칼을 드리워 영향력과 영토를 넓혀가는 데만 노력했을 뿐. 제국의 과거가 팽창을 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팽창의 끝에 소외된 자들을 보살필 것이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전하.”

국경 밖에서의 일들은 레온나토스에게도 감명 깊었던 사건들인 모양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부디 앞으로도 내 힘이 되어다오. 아렌. 그리고, 레밍.”

“물론 그러겠습니다, 전하.”

아렌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화, 황송하옵니다, 전하.”

자신은 호명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레밍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하지만 감격한 채 고개를 숙였다.

어린 황자와 회귀한 점쟁이, 반 맹인 사서를 태운 마차는 황금빛 밭 사이를 막힘없이 달려갔다.

*****

마차는 열흘간 쉴 새 없이 달려 황도에 도착했다.

여독을 추스를 새도 없이, 레온나토스는 곧바로 황제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도시를 둘러싼 안개가, 사라졌다?”

황궁 내원 깊은 곳의 알현장.

그곳에서 황제는 두 명의 금면병과 같이 레온나토스의 보고를 받았다.

어전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의자 앞에는 얼굴을 가리는 차양이 드리워져 누가 황제인지 레온나토스는 알지 못하는 구조였다.

“정확히는, 안개에 섞여 있던 사람을 홀리던 무언가입니다. 도시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합니다만, 더이상 사람들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폐하.”

레온나토스가 국경 너머의 유민들, 황폐해진 풍경과 사람을 홀리는 수도의 안개에 대해 모두 가감 없이 전달할 때, 혹시 믿지 않으면 어떡하느냐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한번도 레온나토스의 말을 끊지 않은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레온나토스는 짐작했다.

‘-역시, 아버지께서도 옛 아티스 영토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고 계셨던 거야.’

그간 있었던 보고를 마친 아렌은 긴 심호흡을 한 뒤 고했다.

“-전하.”

“무어냐.”

“만월강 서쪽과 동쪽, 모두 과거 손꼽히는 곡창지였습니다. 하지만 서쪽과 달리 지금 동쪽은 황무지일 뿐입니다. 지금 제국이 손을 뻗는다면 만월강 동쪽은 수백만의 입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황제는 레온의 말에 심드렁하게 답할 뿐이었다.

레온나토스는 한마디 더 얹었다.

“무엇보다, 만월강 동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국의 과오이기도 합니다.”

“과오라? 어느 부분이 과오인가?”

레온나토스의 눈에 황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레온은 황제가 지금 조용히 화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웃고 있거나.

“제국은 과거의 대확장 전쟁으로 아티스의 서부를 온전히 차지했다. 그리고 만월강을 기준으로 그 동부까지는 취하지 않았지. 그 덕에, 제국은 동부에까지 해안선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것입니다. 동으로 해안선을 두고 있다면, 어업이나 무역으로 얼마나 큰 부를 창출할지-”

“그리고, 국경선도 더 넓어지겠지.”

“…….”

나란히 놓인 황자 셋에 앉은 황제와 두 금면병. 누가 말하는지도 모를 셋 중 하나는 레온에게 담담히 고하듯 말했다.

“제국엔 적이 많다. 서쪽의 도국 연합도 그중 하나지. 만약 제국이 동부에 해안선을 두고 있었다면, 도국 연합은 남쪽으로 빙 둘러 동부 해안선을 칠 수 있게 된다. 그건 제국에 큰 족쇄가 될 것이다.”

그때쯤 되어서야 레온은 깨달았다.

옛 아티스의 영토, 대륙의 동부 해안이 제국의 영역이었다면 제국의 방어선은 해안선을 따라 길게, 기약없이 늘어서게 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딘가의 대규모 해상병력이 지금의 동부 해안에 상륙해도, 그들이 마주할 건 진군하기도 어려운 질척한 땅에 약탈할 것도 없는 황무지뿐이다.

그들이 옛 아티스 땅을 힘겹게 가로지르는 동안, 제국이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건 만월강 동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합리이기도 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황자.”

“그건-”

“그러한 결정은 짐의 선친, 황자 네 조부가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난 그 뜻을 받아들였지. 만약 황자의 뜻이 다르다면, 네가 할 일은 하나다.”

“…….”

황태자, 나아가 황제가 되어서 제국의 기조를 바꾸는 것.

“-그렇군요. 유념하겠습니다.”

레온나토스는 평소처럼 예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왔다.

평소와 같이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황제의 말이었지만, 오늘은 가면 속 그의 진심이 조금이나마 느껴진 것 같았다.

*****

알현을 마치고 내원 밖으로 나왔을 때.

레온은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꽤나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며칠 만에 아주 늠름해져서 돌아왔구나.”

“-테오드릭 형님.”

제9 황자, 테오드릭이었다.

“네가 여기 없던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

“형님이 직접 말입니까. 사람을 쓰지 그러셨습니까.”

테오는 피식 웃었다.

“이런 곳에서 누굴 믿는단 말이냐.”

“…하긴 그렇군요.”

“네가 궁금해할 것 같은 것 먼저 알려주마. 저번 어전회견이 끝난 후 가웨인 형님과 고드프리 형님에 대한 조사가 계속됐다.”

“네,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고드프리 형님이 대륙 북쪽 끝의 수도원으로 떠났다. 사실상 유배나 마찬가지라더군.”

“그럼 고드프리 형님이….”

“아무리 황족이라 한들 죄를 피할 순 없으니까. …가웨인 형님만은 예외인 모양이지만 아무튼, 조사결과가 발표될 리는 없겠지만 정황상 고드프리 형님이 범인이었다, 는 걸로 봐도 무리는 없을 거다.”

“…….”

“뭐, 스스로 가책할 필요는 없을 거다. 넌 그저 가웨인 형님과 고드프리 형님 사이의 신경전에 낀 것 뿐이니-”

“스스로 가책하지 않습니다.”

레온나토스는 말했다.

“단지, 절 노린 것이 돌멘이라면 그것이 돌멘의 과잉 충성인지, 고드프리 형님의 지시였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예전에는 선뜻 이런 말을 하기 쉽지 않았지만, 전 황제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이전보다 더 절실히.”

“…달라졌구나. 너.”

아무런 야심도 없이, 황궁 구석에서 책만 읽으려 하던 황자가 어떻게 해야 이런 강단을 가지게 되는지 테오드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어쩐지 그 원인인 것 같은 녀석은 하나 알고 있었다.

테오드릭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오늘은 그 건방진 녀석이 안보이는데. 녀석은 어디 있지?”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레온나토스는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았다.

“아렌 말씀이군요. 아렌이라면 지금쯤 연무장에 있을 겁니다.”

“…연무장?”

“네. 어쩐 일인지 아티스에서 돌아오자마자 검을 배우겠다고 하더군요.”

“그 나이에 점만 잘 봐도 충분하지, 검까지 익히겠다고? 노력이 가상하군. 사범으로 몇 명 소개해 줄까?”

“아니요. 그래서 더글라스 경에게 부탁했습니다.”

“…….”

테오드릭의 말이 멎었다.

별것 아니어 보이지만,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더글라스는 레온나토스의 근위기사이자 검술 사범.

황궁에서 황자와 같은 스승을 둔 사이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너, 대체 그 녀석을 어떻게 키울 생각이냐?”

“키워? 제가요?”

레온나토스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길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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