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아렌은 예전의 꿈을 꿨다.
“-미안하다, 아렌. 하지만 산맥 북쪽에서의 삶보다는, 따듯한 이곳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더 나을 거야.”
이젠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아렌의 어머니. 자식을 노예로 팔아넘기면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말은 핑계는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산맥 너머, 밟지 못하는 땅에 비하면 어디든 천국일 테니.
기억 속의 자신, 어린 아렌은 주변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어쩔 수 없다. 그때의 아렌은 지금처럼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앉지 않은 순진한 어린아이였으니까.
아렌을 노예 상인에게 맡기고 떠나가던 어머니는 문득 아렌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 반지를 소중히 간직하거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 반지에 대고 빌렴. 정말 간절하다면 반지가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비로소 생각이 났다.
‘목이 잘릴 때, 난 무슨 생각을 했었지?’
*****
꿈 속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정신이 멀쩡해도, 꿈을 꿈이라 인식하는 게 버겁다.
하지만 아렌의 정신은 이미 완전히 수면 위로 부상해, 방금 전까지가 꿈이었다는 것도 완벽히 인지하고 있었다.
‘…유랑민의 본거지도 얼어붙은 산맥 북쪽, 밟지 못하는 땅 초입부. 아티스의 흑옥 신앙에서 섬겨진 돌도 북쪽에서 온 흑옥. 힘을 가진 돌은 북쪽의 흑옥으로 한정지어도 무방할지도.’
지금까지 잊고 있던, 어머니가 해줬던 말을 곱씹으면서 아레은 피식 웃었다.
‘바라는 것이라… 그래봤자 과거로 돌아온 것 뿐인데요, 어머니.’
한번 겪어본 미래이기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는 말은 반만 맞다.
지금처럼, 아렌이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장소에 온 순간 그 이점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먼젓번 삶에서 얻었던 기술과 담력으로 지금까지는 어찌 해쳐 나가긴 했지만…
아렌은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시야가 어둡다. 캄캄한 밤은 아니다. 입김은 어딘가에 갇혀 볼과 귀, 이마까지 따듯하게 덥혀줬으니까.
‘두건을 씌운 건가? 여기가 어딘지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아렌은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좁은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느끼는 특유의 분위기를, 아렌은 지금 느낀 것이다.
십중팔구 아티스 해방 전선의 일원이겠지.
‘그렇다면-’
아렌은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인 도박을 걸었다.
“이것 좀 벗겨주겠어, 핀?”
“…….”
앞에 있는 건 해방전선의 부두목, 핀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해방전선 인원 중에선 가장 아렌과 안면이 있었고, 또 아렌에게도 관심을 보였으니까.
넘겨짚었는데 핀이 아니었더라도, 아렌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 애초에 아직 쌓아 올린 권위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방금의 넘겨짚음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아렌이 하는 말에는 단번에 권위가 생겨난다.
“…것 참 이상하군. 나인 걸 어떻게 알았지?”
핀은 아렌의 두건을 풀어주며 툴툴댔다.
예상대로, 눈앞의 감시자는 핀이었다. 아렌은 핀의 물음을 무시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점점 돌아오는 시야 속에서, 핀은 퍽 신기하다는 듯 아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해. 지금쯤 네가 없어졌다는 걸 알겠지만, 아직은 잠깐 주변을 살피러 나와 같이 나갔다, 정도로 알고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더 이상 얼버무리긴 힘들어지겠지.”
“흐음….”
“그보다, 어떻게 앞에 내가 있는지 알았냐니까?”
아렌이 별다른 위험부담 없이 걸어본 도박에, 핀은 꽤나 잘 걸려든 모양이었다.
‘이걸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
“별것 아냐. 사실 이런 때 내 감은 꽤나 잘 들어맞는 편이거든.”
“…감이라고?”
“그래. 예를 들어볼까? 가령, 넌 지금 날 잡아 가둔 것을 후회하고 있어. 대략 3 대 7… 물론 후회가 7이지. 아닌가?”
“…….”
낡은 나무판자를 대충 짜서 만든 듯한 오두막 안. 어느새 동굴 밖으로 옮겨졌는지 판자 틈새에선 신선한 바깥 공기의 냄새가 났다.
그곳의 의자에 단단히 묶인 아렌에게, 핀은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
“…사실은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두목에게도 이런 건 자살행위라고 말해 뒀지만, 두목이 워낙 완고해서 설득하기 쉽지 않아. 너한테는, 면목이 없어.”
핀이 고개를 숙였다.
두목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짓에 의한 정중한 사과.
하지만, 아렌을 속이기는 무리였다.
‘내게 악감정은 없지만, 뭔가를 원하고는 있어. 본의가 아니긴 하지만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태도라…’
아렌은 물었다.
“말해 두겠지만, 날 사로잡은 이유가 무엇이든 제국과 협상하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까.”
아렌의 말은 당연하다. 애초에 아렌은 제국의 황자가 아니었으니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아렌의 말을, 핀은 또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 물론 그렇겠지. 제국쯤 되는 곳의 황제라면 친자식도 매정하게 버릴 것 같긴 해.”
“…….”
“하지만 두목한테는 통하지 않겠지. 네 말대로 두목은 너를 이용해 제국과 교섭하고 싶어해. 만월강 동부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아티스의 이름 아래 일정한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으로.”
“그게 통할 거라곤 너도 생각하지 않잖아? 그러니 여기 혼자 온 거고. 아냐?”
“…역시 족집게로군. 황자보단 점쟁이가 더 어울리겠어.”
“…….”
순간 아렌은 숨을 죽였지만, 겉으로 티를 내는 건 가까스로 참았다.
“황자 네 말대로, 이건 우리 목을 스스로 죄는 길이 될 뿐이야. 우리만 죽으면 다행이지만, 제국이 그동안 무관심했던 만월강 동부까지 취하려 한다면? 경제력도 군사력도 없는 아티스의 유민들은 철저히 당할 거고 고통은 가중되겠지. 난 절대 그 꼴은 볼 수 없어.”
“그렇군. 하지만 두목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내게 하고픈 말이 있는 것은 맞지?”
“…두목은 사라진 나라, 아티스의 이름을 다시 올려두고 싶은 모양이야. 우리 조직 이름도 ‘아티스 해방전선’이고. 하지만 난 그깟 이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기를 원해.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
그 말은 곧, 만월강 동부 전체가 제국령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렌은 한결 더 편하게 말했다.
“제국이라면 만월강 동쪽을 능히 바꿀 수 있어. 그건 제국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그런 조건이라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핀은 묶인 밧줄을 풀기 위해 아렌의 뒤로 갔다.
“곧 두목이 올 거니까 그 전에 도망쳐.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줘. 이 땅엔 널 공격하고 가둔 사람도 있지만, 널 풀어준 사람도 산다는 걸.”
“…그래. 명심하지.”
매듭은 너무 짱짱하게 묶여있어 잘 풀리지 않았다.
초조한 핀이 단도로 밧줄을 끊어버리려던 찰나였다.
“둘이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던데. 어디 나도 좀 들려주겠어?”
“…두목.”
아티스 해방전선의 두목, 파투스였다.
파투스는 핀의 배신에도 화내지 않고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아렌과 핀을 앞에 둔 채 자리에 빈 자리에 앉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 황자. 하지만 우리로서도 입장이 있어. 이 땅의 미래를 위해선, 너를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하겠지?”
“…너희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날 잡아둬도 너희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해.”
아렌은 태연하게 말했다.
방의 천장까지 정수리가 닿을 정도로 거구인 파투스. 그 덩치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지만, 아렌은 위축되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것이 나의 무기 이건 확실해.’
아렌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하지만, 내 무기가 그것밖에 없나?’
아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가령, 겉보기에는 열 살인 어린 외모,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황궁의 사정에 빠삭한 성인이라는 부조화가 가져다주는 존재감.
표정과 기색만으로 상대의 생각을 대략 짚어낼 수 있는 눈.
과장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자신을 보통 사람이 아닌, 영험한 무언가로 나타내는 실력까지.
이것들이, 아렌의 진정한 무기였다.
파투스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따위,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아렌은 ‘비범한 황자’를 계속 연기했다.
“지금 초조한 건 이해한다, 파투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신 다음번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이봐. 뚫린 입이라고 너무 지껄이면 위험하다는 걸-”
“하지만 그 조급함이 옳은 판단을 방해하고 있어. 어쩔 수 없겠지. 네가 태어나고 자란 땅은 줄곧 이런 모습이었을 테니까. 그걸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일 테니 무리를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입 닥쳐! 이 땅을 이렇게 만든 건 너희들이잖아!”
“그렇지. 이 땅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우리고.”
“…….”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파투스. 누구를 아군으로 두고 누구를 적으로 둘지. 나와 제국은 네 편이 될 수도 있어. 앞으로 할 결정에 따라. …그래.”
“어, 어?”
“지금 한 그 생각이 맞아.”
“…….”
파투스는 조금씩 아렌의 말에 넘어오고 있었고, 그것을 읽은 아렌이 재빨리 말했다.
파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 역시도 지금 이 땅의 모습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돌아가면 황제 폐하께 개선 방안을 말씀드려볼 생각이지. 설령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황권을 쥐게 되면 꼭 추진할 거고.”
“…….”
아렌이 방금 한 말에는 ‘누가’ 황권을 잡을 것인지가 교묘하게 빠져 있었다.
이미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긴 파투스는, 처음 오두막 안에 들어올 때의 기세가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너희 말과 달리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사람을 홀린다면? 그래서 제국이 만월강 동쪽에 여전히 관심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래도 방법은 있어. 안개를 없애면 되니까.”
“…안개를 없애?”
“우린 만월강 서부에서 왔어. 거기도 다소 안개가 끼긴 하지만, 동부처럼 자욱하지는 않지. 조사해보니 만월강 동부가 범람으로 습지대가 되고 난 이후부터 안개가 심해졌다더군. 그렇다면, 범람을 줄이고 동부의 치수를 시작하면 안개도 자연히 줄어들게 될거야.”
‘…그리고, 아트레움 수로의 수위가 낮아지면 성 아래 묻혀있다는 흑옥들도 물에 잠기지 않을 테고.’
분명 나라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는 대공사가 되겠지만, 만월강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가지기 위해선 기꺼이 감수할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날 납치한 것으론 할 수 없어. 제국은 그리 녹록치 않으니까. 내 생사는 고려치 않고, 치수공사를 하는 대신 병력을 파견하겠지. 이미 황폐해진 만월강 동쪽을 파괴하기에 차고 넘치는 병력을 말야.”
첫 번째 삶에서, 이곳에 파견되었던 가웨인 황자가 누구와 싸웠는지 아렌은 알지 못한다. 아트레움을 점령한 망자들이었는지, 여기 모인 아티스 해방전선이었는지. 혹은 다른 군벌 세력이었을 수도 있다.
제법 격전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고작 한 황자의 사병에 지나지 않는 병력만으로 국경에서의 소요사태는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제국이 직접 움직인다면 어떤 준비를 해도 당해낼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
아렌은 담담하게 사실을 고했고, 핀과 파투스는 나란히 침묵을 유지했다.
순간, 아렌은 느꼈다.
‘…이거, 꽤나 괜찮은데?’
아렌은 얼마 전 어전 회의 때를 떠올렸다.
두 명의 금면병이 가면을 쓴 채, 황제와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던 그 자리.
의자 앞에는 차양을 쳐 놓았기에 신료들은 누가 진짜 황제인지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체격은 거의 같다.
‘이 녀석들은 날 황자라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지만, 만약 레온나토스의 허락하에 내가 황자인 척한다면?’
그리되면 번거롭게 누군가의 입을 거치지 않고, 대역인 동안만큼은 자신이 생각하는 명령을 마음껏 내릴 수 있게 된다.
전에도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지만 이렇게 직접 겪어보고 나니 확실히 체감된다.
‘…가능해.’
제국의 국경 너머 작은 오두막 안에 묶인 채, 아렌은 좀 더 효율적인 흑막이 될 실마리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