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노인이 마지막 숨을 뱉은 후 사방이 고요해졌고.
기사들은 움직임을 멈춘 망자들을 가까스로 밀친 후 뒤늦게 아렌을 향해 달려왔다.
도착했을 때, 바닥에 고약한 점액을 뿌린 후 죽어있는 노인과 두동강 난 피리를 든 아렌이 보였다.
“아렌! 난 네가 무사할 줄 알았어! 이 질긴 놈아! 그런데 왜 그 늙은이 곁에 있었던 거야! 그 피리는 또 왜 부러진 거고! 설마 네가 영감을 때려눕힌 건-”
“더글라스, 한 번에 한 가지만 말하면 안 돼요?”
더글라스의 호들갑을 아렌이 막았다.
곧이어 더글라스보다 몇 걸음 뒤에 온 레온나토스가 도착했다.
“아렌!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그 노인은-”
“…네. 보시다시피 이미 의식이 없습니다.”
기사들이 왔을 때, 노인의 숨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레온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노인의 죽음이 아쉬워 한 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렇단 말인가. 아니, 아렌 널 책망하는 게 아니다. 노인이 죽지 않았다면 기사들의 더 큰 희생이 있었겠지. 하지만 노인에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는데….”
‘…그리고 노인에게 질문하는 건 나로선 피해야 하는 일이지.’
노인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아렌도 모른다. 애초에 아렌 역시 자신과 노인에게 주어진 힘이 정확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힘을 레온나토스가 상세히 알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렌의 힘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묘한 힘에 의한 것이어야 하지, 회귀한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지금껏 드리워졌던 후광도 사라지거니와 운신의 폭도 좁아지게 된다.
땅에 쓰러진 노인의 고약한 냄새에 코를 내리누르며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그런데, 아렌. 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아… 그냥 유언 같은 거였습니다.”
“유언? 무슨 유언이었지? 멀리서 보기에, 아렌 너도 이것저것 이야기해주는 것 같던데.”
물어보는 레온나토스의 표정은, 실로 복잡했다.
물론 로데벡이 그간 한 일은 악랄했지만,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레온나토스의 조국인 제국이 제공한 것이었으니까.
반면 답하는 아렌의 표정은 태연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죽기 싫다는, 죽어가는 자가 으레 하는 말들이죠. 저도 대강 답해주었습니다.”
“그런가? 잘했다. 하지만 결국 그 노인이 어떻게 이만한 사람들을 조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건가….”
노인이 죽자 피리는 깨졌고, 망자들은 돌처럼 굳었다. 비유가 아니라, 단단한 바닥에 던지면 깨질 듯한 조각상처럼.
안개에 홀렸던 자들은 그 순간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었으며, 이제는 되돌아올 방법이 없음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물론, 노인이 죽음으로서 자세한 연유를 들을 방법은 사라졌지만.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주변을 둘러싼 자욱한 안개는 여전했다. 하지만 수도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음산하고 불온한 기운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홀리는 안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안개가 되었다는 걸, 그곳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시일이 지나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성에 있는 기사들이 확인할 문제는 아니었다.
더글라스가 재촉했다.
“전하. 아직 이곳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얼른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망자들과의 대치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끝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사 일곱이 명을 달리했다.
어제 죽은 기사까지 도합 열 한 명.
“…돌아가자.”
어쩌면 이곳에서 밝혀낼 수 있는 비밀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레온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기사단에 희생을 강요했다.
이 이상은 무리였다.
“…노인에게 들은 길이 있습니다. 수위가 오른 해자들 아래로 물에 잠긴 다리가 남아있다고. 그리로 가시죠.”
아렌은 노인에게 들었던 대로 기사들을 안내했다.
정말로 수로 아래엔, 허리 높이까지 물에 잠겨있는 다리가 서 있었다.
다리는 오랜 세월 물에 잠겨있던 것치고 아직 굳건했고, 고리 모양의 섬을 빙 돌아갈 필요 없이 기사들은 일직선으로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도시를 빠져나가며 레온나토스는 작게 읊조렸다.
“…어쩌면. 침수된 곳을 줄이고 수로의 수위를 낮추면 이 도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말대로 아티스의 옛 수도 아트레움은 지난 30년간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수로나 다리 등, 도시의 기반 시설은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었다.
물론 긴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사람의 손길이 지속적으로 닿기만 한다면 옛 아티스 왕국의 수도 아트레움은 제국령 아트레움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다.
아렌은 생각했다.
‘내가 굳이 조종하지 않아도, 레온나토스를 황제로 세우면 아트레움을 발전시킬 거야. 이미 결심을 다진 모양이니까.’
어쩌면 그것이, 노인이 진정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죽은 사람의 속마음이야, 독심에 통달한 아렌조차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온통 젖은 옷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을 넘어, 기사단은 드디어 아트레움 외곽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분 나쁜 안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함께, 전투의 긴장과 피로가 갑자기 몰려든 기사들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마다 전투의 피로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 움직이지 않는 발을 타성적으로 움직이며, 아렌은 생각했다.
‘고대 아티스 인들은 북부에서 떠밀려온 흑옥을 신성시했어. 강인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노인이 가진 피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 내 반지도 그런 거겠지?’
실금이 간 반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렌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 한 켠에만 머무르게 할 뿐,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들이다.
‘혹시, 다른 것들이 더 있나?’
다시 과거로 돌아오게 된 아렌이 일종의 기연을 얻었듯, 아렌이나 아트레움 왕궁의 노인 같은 자들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렌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기사들은 아티스 해방전선이 모인 동굴에 도착했다.
실질적인 일수는 이틀도 채 흐르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마치 아주 오랜 시간을 동굴 밖에서 보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으… 드디어 몸 좀 쭉 뻗고 잘 수 있나!”
한 기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봤자, 저 안에 푹신한 침대 따윈 없지만.
기사들이 동굴의 입구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섰을 때, 동굴 앞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화들짝 놀랐다.
“어어, 이봐! 기사들, 기사들이 나타났다!”
단숨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
마치, 죽은 사람이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걸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부두목인 핀, 거구의 두목인 파투스까지 줄줄이 기사단을 맞이했다.
“세상에… 난 너희가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부두목 핀.
“무슨 소리를.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여기 있는데.”
다시 돌아온 것에 고무된 발커스가 호언했지만, 실상은 기사들도 모두 성한 것은 아니었다.
도합 열한 명이 명을 달리했고, 다친 사람들은 더 많다.
하지만 괴물같은 망자들 수백명들 사이에서 살아 돌아왔고, 성을 휘감고 있던 저주받은 안개에서 망자들을 해방시켰다.
전설에 나오는 영웅들이나 이뤄낼 법한 업적. 기사들이 고무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점괘대로였어. 절반은 물론, 몰살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이니.’
발커스는 새삼 아렌을 바라봤다.
말없이 긴 거리를 걸어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발커스의 눈에 아렌은 더이상 보통 꼬마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아렌은 발커스가 또다시 어떤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렌은 심드렁할 뿐이었다.
멋대로 착각하고 잘난 사람인 것처럼 대해주는 건 기꺼운 일이기에 가만히 있을 뿐이지만.
“여, 황자 나리. 무사했네?”
그리고 여기, 멋대로 착각하는 사람이 하나 더.
아렌에게 다가온 핀이 소곤대며 말했다.
“아직도 그 소리야? 어떻게 해야 알아듣겠어?”
“또또 그런다.”
실실대는 핀에게, 아렌은 레온나토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분이 제국 12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시거든.”
“아아, 그 설정 말이지? 걱정 마. 내 입은 무겁거든.”
“…….”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아렌은 그를 설득할 생각을 포기했다.
황자와 기사단을 맞은 두목 파투스는 짐짓 의외라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정말 댁들이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까? 당신들, 뭔가 해낸 눈치거든?”
“…그러지. 당신들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걸었던 발을 쉬게 하면서, 레온나노스 파투스에게 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알렸다.
사람을 홀리는 안개의 원인과 성을 지키는 듯 행동하던 망자들. 그리고 그것들을 조종하고 있던 노인의 죽음까지.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두목의 표정이 일순 굳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했지만, 어느새 다시 레온나토스의 말로 돌아와 경청하고 있었다.
“…검은 돌이라고? 그런 건 금시초문인데… 그 검은 돌이 저 안개를 만든 원인이라고?”
“아니면, 수몰된 후 환경이 바뀌어 자연스레 안개가 형성되게 되었고, 그 안개에 돌이 영향을 줬을 수도 있지. 물론, 믿기는 이야기는 아닐 거야.”
“아니. 믿도록 하지.”
파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딱히 순진한 인물이라서는 아니다.
“사람을 홀리는 안개가 있다는 것부터, 유령이니 귀신이니 온갖 말들이 나왔으니까. 사람이 벌인 짓이고, 그것이 해결됐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안 그래?”
좋은게 좋은 거라는 듯 말하는 파투스.
레온나토스는 이어 말했다.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난 곧바로 만월강 동부에 대한 지원을 말할 생각이다. 이곳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이상해. 만약 그 원인이 저 안개 때문이었다면, 이젠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어이, 황자. 그 말은, 여길 제국령으로 하시겠다, 그 말인가?”
아티스 해방전선의 두목 파투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제국과 아티스 사이의 전쟁이 있었던 것도 30년 전.
그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과거의 앙금도 이제는 반쯤 희석되어 날아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전쟁은 언제나 현재의 일이었고, 따로 떼어둘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끝나지 않았네. 하지만 하나 약속할 수 있는 건, 절대 자네들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위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겠어.”
해방전선 두목에게 확언하는 레온을, 아렌은 어쩔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이, 황자. 그렇게까지 말해도 되는 거야?’
아렌은 여전히 레온이 황제가 되기 충분한 재목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레온조차도 황실 내 실권이 없다면 그저 그런 수 많은 궁인들 중 하나일 뿐.
섣부른 약속은 도리어 화를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다.
“…흐음. 그럼, 당신들은 언제 돌아갈 생각이지?”
“너무 늦장 부릴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은 기사들을 쉬게 해주고 싶군. 하룻밤 여기서 묵고 갈까 하는데.”
“내일이라. 그럼 오늘 하루는 시간이 있다는 뜻인데.”
“……?”
파투스의 말은 의미심장했고.
그의 뜻을, 레온나토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따듯한 담요도 푹신한 침대도 없는 동굴 안.
하지만 피곤이 최고의 침구라도 되는 듯 기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깊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트레움에서의 하룻밤은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그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실컷 잠에 빠진 기사들.
동굴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스윽 일어섰다.
아마 이 동굴 안에서 가장 거구인 남자, 파투스였다.
파투스와 몸이 날렵해 보이는 몇몇은 천천히, 소리 내지 않고 황자가 있는 구역으로 다가왔다.
불이 아깝다고 병사들은 밖으로 보낸 초병을 제외하면 전혀 불을 밝혀두지 않았다.
파투스가 일어나 천천히 향하는 곳은 곤히 잠들어있는 기사들과 그사이 고이 잠든 황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만하지?”
“…….”
어둠 속에서 어린아이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렌이었다.
“오래 깨어있느라 고생한 건 이해하는데, 황자를 잡아가도 그쪽엔 아무 이득도 없어.”
“…황자를 잡아간다고?”
황자도 아닌 10살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평대하고 있었지만 파투스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모른척하는 거야? 말해두겠지만, 당장은 기사들이 곤히 잠들어있어도 약간의 소란만 일어도 금방 일어날 거야. 당신들이 손도 써보지 못한 아홉 탑의 궁전에서도 당당히 살아 돌아온 강자들이지. 이 동굴안을 피바다로 만들고 싶으면 그래도 돼.”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너무 연기에 몰입한 건가?”
“…응?”
“사실은 네가 황자라는 건, 이미 핀에게 들었다.”
“자, 잠깐만-”
와락. 뒤에서 덮쳐오는 누군가의 기운에 의해.
아렌은 털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