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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1화 (41/227)

#041화

까마득한 높이의 탑에서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망자들.

추락의 충격으로 뼈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론,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이 망자들의 목적은 아니었다.

탑의 외벽을 기어 올라갔던 망자들은, 지붕에 달린 환기구를 통해 탑의 안쪽 벽에 붙어 다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잠시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고, 실패한 망자들이 줄줄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망자들이 성공적으로 탑 아래로 기어 내려왔다.

더이상, 도서관 탑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모두! 전하를 최우선으로 모셔라! 나머지는 나와 같이 활로를 뚫는다!”

더글라스가 외치며 앞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를 발커스가 뒤따랐다.

발커스가 외쳤다.

“아래층은 침수되어서 나갈 수 없습니다! 성과 연결된 통로로 돌아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발커스 경!”

하지만, 성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건 복잡한 미로 안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꼴이었다.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을 망자들은 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앞으로의 격전을 각오하며 더글라스는 벌컥, 성과 연결된 복도의 문을 열었다.

“…어? 아무도 없어?”

그리고,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기사들은 텅 빈 성의 복도를 달렸다. 이미 지체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꺼림칙할 정도로, 성안의 망자들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적었다.

이따금 길목을 막은 것처럼 수십 명이 갈림길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긴 했지만, 기사단이 반대쪽 길을 고르는 동안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마치 기사들을 어느 곳으로 유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거 안 좋은데.’

내색하진 않았지만, 더글라스의 손엔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정말 나갈 수 있을까?’

왕궁의 좁고 긴 복도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장기처럼 느껴졌다.

더글라스는 기사로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근위기사가 되고 나서, 황궁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고수들이 대련을 신청했지만, 더글라스를 아슬아슬한 선까지 몰아붙인 실력자는 세 손가락에 꼽았으니까.

적이 단순한 인간이었다면 위기감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아렌이 있었더라면.’

상대가 명확한 적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를 꺼림칙한 존재일수록 용한 점술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설령 점을 보지 않더라도, 신통한 예견을 연거푸 제시한 아렌이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사들의 사기는 올라갈 것이다.

망자들이 곳곳을 틀어막아 외길이나 다름없는 복도를 지나, 기사들은 드디어 성 밖으로 이어진 정문에 도착했다.

“전하! 성문입니다! 어서!”

기사들이 반쯤 부서진 성문 너머로 나갔을 때.

그들은, 이미 반쯤은 예상했던 광경과 직접 마주했다.

“…그러면 그렇지.”

발커스의 중얼거림.

밖에는 빽빽하게 모여든 망자들의 무리가 성문을 반원 모양으로 완전히 에워싼 뒤였다.

“…….”

“…….”

-정적.

수적으로, 진형으로도 완전히 우위를 점한 망자들이었지만 곧바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기사들을 둘러싼 반원 모양은, 기사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오면서 뒤쪽까지 에워싸 완전히 원형으로 포위한 형태가 되었다.

기사들이 스스로 움직인다기보다, 포위망이 움직임에 따라 떠밀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원형의 포위진은 성문과 해자 사이의 넓은 공터에서 멈췄다.

이것 역시 노인의 뜻이라면, 분명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터.

더글라스는 노인을 찾아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멎었고,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찾았나, 더글라스 경?”

“…네. 그 노인입니다.”

키가 작은 레온나토스에겐 망자의 벽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반면 건장한 체격의 더글라스에게는 소수의 망자와 멀찍이 떨어진 작은 꼬마와 함께 있는 노인이 똑똑히 보였다.

“좋은 구경거리겠지요. 이쪽이 잘 보이는 특등석에 우리를 안내한 모양이니. 호위들까지 아주-”

노인에게 시선을 보내던 더글라스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지, 더글라스?”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눈을 비볐다 다시 뜬 더글라스는 자신이 본 것이 맞다는 것을 확신하곤 기쁨 반, 당혹 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렌이, 왜 저기 있죠?”

*****

“보이느냐? 저게 바로 제국의 이리떼들이지. 염치도 없이 예까지 기어들어 온 파렴치한 놈들.”

노인, 로데벡 아티스는 성문 밖으로 나온 기사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엔, 아렌이 따라와 있었다.

“하지만, 이 성을 점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 아닌가요?”

“보통은 그리 생각하겠지만 놈들은 한놈 한놈이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분명 정예 중의 정예인 놈들이다. 봐라.”

노인이 피리를 불었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을 둘러쌌던 망자들은 일제히 손톱과 어금니를 앞세워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망자의 무리에 집어 삼켜질 것 같던 기사들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흘렀음에도 곧잘 버텨내고 있었다.

“봐라. 제법이지 않냐?”

“…그렇군요.”

‘빨리 저 피리를 빼앗아야 해.’

피리로 망자들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또 다른 명령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아렌은 초조한 감정을 가까스로 숨기며 물었다.

“성안이었다면 저들을 처리하기 훨씬 쉬웠을 것 같은데, 왜 성 밖으로 내보낸 거죠?”

“그야, 저놈들의 피를 성안에 흘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설마, 저 중에 우리 부모님도 계신 건가요? 저 수호자들 중에요.”

“…그건.”

아렌은 노인이 쉽게 답하지 못할 질문을 해 당황하게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밤새 온 성을 돌아다녔지만,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역시 저기 어딘가에 계신 건가요?”

“…글쎄다. 그보다 조금만 더 참으면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게다. 저놈들 중 몇몇은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수호자로 편입시키는 거야!”

“어쩐지, 손끝이 저려요.”

“그런 다음 제국의 갑옷을 벗기고, 대신 잔뜩 녹이 슨 아티스의 갑옷을 입히는 거지! 정말 재밌을 거야!”

“…….”

“그 꼬마 귀족 놈! 그놈도 사로잡아 제국으로의 진군에 선봉으로 삼아야지. 아니면 산 채로 깃발 위에 꽂아줘도 되고. 놈들에게 좋은 경고장이 될 거다!”

“…….”

“왜 대답이 없냐, 꼬마야.”

이윽고 뒤를 돌아본 노인.

거기에는, 마스크도 벗은 채 풀린 눈으로 비척거리는 꼬마, 아렌이 서 있었다.

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쯧쯔… 그러니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 말했는데.”

노인의 말투는 올 게 왔다는 투였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대하듯 얼른 아렌에게서 눈을 돌렸다.

“…….”

그리고, 어떤 경향성도 없는 듯 비척비척 움직이던 아렌은, 조용하지만 조용히, 착실히 노인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걸음 가까이 가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네 걸음 다가가면 세 걸음 물러나는 식으로.

‘…지금이라도 뛰어들까? 하지만 그건 실패하면 뒤가 없는데.’

아렌은 애가 탔다.

기사들을 위해서도 피리를 빼앗아야 했지만, 마스크를 벗은 채 숨을 참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괜히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노인의 의심을 사면 곤란하기에 벗었지만, 앞으로 수십 초도 숨을 참고 있기 힘들 것 같았다.

다행히, 이제 뛰어들면 2초 안에 노인에게 닿을 만큼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아렌의 손이 노인의 허리춤을 향해 뻗었다.

피리를 손에 넣으려는 찰나.

-욱신.

“으윽!”

왼손 검지의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버린 아렌.

부자연스런운 인기척에 노인은 허리의 피리를 손으로 감싸며 얼른 물러났다. 노인과 아렌의 거리가 꽤나 멀어졌다.

“뭐냐, 너. 수호자라도 된 줄 알았더니, 그건 다 연기였냐? 그렇다는 건 너 역시도 저놈들과 한패라는 거군.”

“…쿨럭!”

이미 들통난 이상 망자를 연기하는 건 소용없다. 아렌은 얼른 마스크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급하게 쓰느라 마스크 틈새로 짙은 안개를 다소 들이마셔 버렸다. 아렌은 곧바로 손가락 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다고 당신의 나라가 돌아올 것 같아요? 당신이 30년간 비축해놓은 힘조차 제국의 국경경비대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할 거라고요. 지금 제국을 자극하면 오히려 아티스의 유민들이 힘들어질 뿐이에요.”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말하는 노인. 하지만, 아렌은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거짓말이야.’

“자, 봐라! 망국의 왕자이던 내게 허락된 이 힘을. 제국의 정예들마저 이 힘엔 꼼짝도 못해. 이 힘으로 제국에 복수하고 말겠다!”

“…아름답다고요?”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뭐냐? 그 태도는?”

“사실은 당신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요?”

“…뭐라고?”

망자인 척하던 아렌의 연극이 벗겨졌고, 사람은 무방비한 사람에게 자신의 적나라한 속내를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약점투성이가 된 아렌에게, 로데벡 아티스 역시 자신의 속내를 훤히 드러내 보였다.

숙련된 점술가인 아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실은, 당신도 후회하고 있지 않나요?”

“대체 무슨-”

“제 말이 맞을 텐데요? 방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어요. 방금 제 말에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자주 하는 동작이죠. 고개를 젓는 것과 끄덕이는 것의 중간쯤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 역시 떳떳지 못한 경우에 자주 보이죠.”

“…….”

“사실은 당신도 후회하고 있군요. 지금 보는 광경을 말이죠. 하지만 이건 당신이 만든 광경이에요. 더 악화시키는 것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모두 당신이고요.”

“감히 네가 뭘 안다고!”

노인은 아렌을 향해 다가오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외쳤다.

평소라면 노인의 곁을 지켰을 망자들도 지금은 혹시나 포위망을 벗어날 기사들을 주의하고 있는 상태.

아무리 아렌이 어린아이라지만 피리를 빼앗는 것이 목적인 자에게 자진해서 다가갈 필요는 없다.

“알 수 있죠. 사실 전 점술가거든요. 카드도 없이 미래를 보는 건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있어요. 가령…”

아렌은 최대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성을 둘러싼 안개가, 실은 당신의 소중한 것도 앗아간 것 아닌가요?”

“…….”

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안개는 왕국이 멸망한 다음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그럴듯하게 말하면 누구나 혹할 수 있는 그런 적당한 말.

하지만, 노인 로데벡 아티스에게 그 말은 아렌의 의도 이상으로 잘 들어맞았다.

성이 안개에 휩싸인 최초의 날. 항복을 준비 중이던 궁인들과 장군, 그리고 왕인 자신의 어머니까지 전부 안개에 사로잡혀 버린 날.

항상 총명하며 빛나던 눈은 안개에 사로잡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주시할 뿐이었다.

어느덧 로데벡의 나이가 그 무렵의 어머니보다 많아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로데벡을 괴롭혔다.

그리고.

로데벡의 의식이 반강제로 과거로 여행을 떠났을 때.

아렌은 몸을 날렸다.

*****

쭉 뻗은 손이 피리를 낚아챈 후, 아렌의 몸은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노인은 뒤늦게 반응했지만, 이미 아렌은 저만치 물러난 뒤.

로데벡과 직접 맞붙으면 승산이 없겠지만, 술래잡기라면 자신있었다.

아렌은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노인은 쫓아가지 못했다.

피리를 빼앗긴 노인은 그대로, 구부정한 나무가 쓰러지듯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피, 피리를…”

방금 전까지의 생기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로데벡.

그의 피부에선 고약한 냄새가 나는 회색 진액들이 점점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당신, 죽는 거예요? 피리를 빼앗은 것만으로?”

이미, 기사들을 둘러쌌던 망자들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하지만 빽빽하게 모여들어 멈춰선 망자들은 일종의 벽이었기에, 기사들이 아렌에게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 듯했다.

“주… 죽다니. 그렇지, 않아. 아티스를 재건할 때까지 나는-”

그것이 노인의 진지한 꿈이라는 것은 잘 전달됐다.

그리고, 그것이 허황된 꿈이라는 것 역시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티스는 재건될 테니까.”

“……?”

노인의 몸에선 지금도 실시간으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가 살아날 거라는 가망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의 로데벡에게라면, 아렌은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미래에서 되돌아왔어요. 실은 서른 살이 넘었죠. 물론 당신이 보기엔 여전히 새파랗게 젊겠지만.”

“…….”

쓰러진 로데벡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절대 곧이곧대로 믿을 말은 아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아요? 당신도 원래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나요?”

아렌은 왼손에 낀 반지를 보이며 말했다.

반지에 살짝 간 실금을 보자 로데벡은 비로소 모든 걸 이해한 듯했다.

“…너도, 이 축복을.”

“글쎄,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네요. 지금 당신 모습을 보니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노인의 엎어진 몸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체액이 새어 나왔다. 그가 살아날 거라는 가정은 무의미했다.

아렌은 죽어가는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는 약속드리죠. 전 레온나토스를 황제로 만들 겁니다. 그를 통해 만월강 동쪽도 다시 부흥시킬 거고요. 아티스의 옛 영토는 다시 옛날의 영화를 되찾을 겁니다.”

“…그건.”

노인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흐으읍.

로데벡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쪼그라든 입에선 마지막 입김이 새어나갔다.

그리고.

빠각!

아렌이 쥐고 있던, 흑옥 피리는 마치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두 동강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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