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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40화 (40/227)

#040화

밤이 늦었다.

궁전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겼지만, 궁전을 둘러싼 아홉 탑 중 하나, 도서관 탑 안쪽은 줄곧 환하게 밝았다.

폐자재들을 가져와 만든 큰 모닥불은 만들어 습기를 날려 보내고 있었고, 그 불빛으로 레온나토스와 레밍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몇 시간 후면 해가 뜰 시각이었지만, 도서관 안의 기사들은 교대하는 몇몇 빼고는 꼬박 밤을 새우고 있었다.

“…저, 전하. 조금 쉬었다 하시지요. 이러다 몸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발커스가 다가와 말했다. 레온나토스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두 이 성에서 목숨까지 걸고 있는데, 고작 잠을 못 자는 게 대수인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몰라. 가져갈 수 있는 책이라면 최대한 가져가야지.”

“하지만….”

책은 무겁다. 말도 이끌고 오지 않았고 수레나 가방도 없는 터라 가져갈 수 있는 숫자도 한정되어있다.

게다가 언제 밖에서 싸워야 할지 모르는 이상 책을 짊어지는 건 그만큼의 위험을 동반하는 일.

다행히 이곳엔 한번 읽은 책의 내용을 모조리 기억하는 사서가 있다.

“수고라면 저기 레밍이 했겠지. 난 레밍이 외울 가치가 있는 책을 선별해내는 것뿐, 레밍이 하는 일에 비하면 미약해.”

레온이 잠시 지친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혹시나 탑 안의 불빛이 밖으로 보일지도 몰라, 책을 읽을 불빛은 도서관 중앙에 피워놓은 거대한 모닥불의 일렁이는 불빛뿐이었다.

“여긴 괜찮네, 발커스 경. 오래도록 수고해 주고 있는 기사들을 격려해주게.”

“…네, 그러겠습니다.”

발커스가 조금 힘없는 발걸음으로 물러나려던 그때.

“…미안하네.”

“전하?”

“아렌을 놓고 온 일, 자네의 잘못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네. 상황이 급박했을 테고 아렌이 강력하게 주장했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는 초조해서 자네에게 심한 말을 해버렸어.”

“…아닙니다. 저 역시 그 당시 일을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누구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후회란 걸 하는 법이고.”

레온나토스는 다시 눈을 감았고, 발커스는 레온이 쉴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떠났다.

되도록 조용한 걸음걸이로.

*****

“이놈도 아니고, 저놈도 아니고….”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 어둠이 짙게 깔린 황궁의 복도를 노인 로데벡 아티스가 샅샅이 훑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어찌나 낡았는지 구멍이 숭숭 뚫려 곳곳에 맨살이 보였지만, 노인은 추위도 느끼지 않는 듯 밤새 활기찼다.

노인이 살피고 있는 건, 복도 곳곳에 널브러진 망자들의 잔해들이었다.

기사들의 칼에 베이거나 저들 스스로의 발에 짓이겨지거나. 복도에 남은 망자들의 잔해를 굳이 들춰가며 노인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역시 보이질 않아. 설마 무사히 도망간 건가? 그 무리를 상대로?”

“지금 뭘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노인은 아렌의 질문에 혼잣말하듯 답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수호자들이 그 꼬마를 물리쳤다면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왜 안보이지?”

노인은 초조했다.

그간 이 성을 노린 다른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성 어딘가 있을 보물을 노려 한몫할 생각이었던 강도들부터, 망한 왕국의 성을 차지해 새로운 왕국을 만들 생각에 부풀었던 아티스의 전 기사들까지.

이곳에 침입한 자들은 많았지만 모두 망자들의 벽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기사들의 강함은 여태껏 로데벡이 보지 못한 강함이었다.

로데벡이 멋대로 착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더러운 제국 놈들이 드디어 만월강 동쪽까지 넘보기 시작한 건가? 하지만,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절대 그렇게는 안되지!”

증오하는 침략자를 마주한 로데벡이지만, 그의 얼굴엔 지금껏 본 적 없는 생기가 묻어 있었다.

“그런 고수들이 꼬맹이 하나를 호위하다니. 대충 제국 졸부 나부랭이쯤 되는 줄 알았더니 혹시 어디 황족이거나, 그 측근쯤은 되나보군. 그렇다면 놈들은 아티스 재건에 좋은 교섭재료가 되겠어.”

“…저, 할아버지는 안 잘 거예요? 난 피곤한데.”

“피곤하면 어디 빈방 가서 자려무나. 난 녀석들의 흔적을 찾아야겠으니까.”

“….”

‘칫. 잠든 틈이라면 피리를 어떻게 훔쳐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음, 너 안 자냐?”

“전, 어두운 곳에서는 못 자요.”

“그래? 어지간히 좋은 집에서 자랐나보군. 밤까지 불을 밝히다니… 응?”

아렌을 돌아보던 노인의 시선이 문득 벽에서 멈췄다.

“…뭐지? 이런 흠집은 전에 없었는데.”

‘-아차.’

레밍이, 아렌이 레온나토스를 인도하기 위해 벽에 세겨놓은 화살표 중 하나였다.

복도엔 여전히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지만, 곧 새벽이 밝아오기에 하늘은 완연한 검은 색에서 어느새 조금 파란 빛을 띄고 있었다. 조금 더 뒤면 지평선 근처에서 붉은 여명이 나타나겠지.

어둠에 완전히 적응된 눈으로 바닥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진 노인의 눈에 기어이 걸려들고 만 모양이었다.

“…흠집이 왜요? 이런 낡은 성에선 흔한 것 아니에요?”

“무슨 소리. 이 성안의 것이라면, 난 어떤 작은 흠집도 다 기억하고 있어. 분명 며칠 전에는 이런 흠집이 없었어.”

화살표는 중간중간, 복도의 갈림길마다 어느 한쪽을 향해 그려져 있었다.

이 표식이 누군가를 인도하는 것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호오라. 이런 식으로 합류하셨다?”

“….”

‘…결국 들켰나.’

노인이 레온나토스 일행의 흔적을 촘촘히 찾고 있지 않았다면, 혹은 날이 밝아오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흔적. 하지만 노인은 기어코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화살표를 따라 아홉 탑 중 하나인 도서관 탑에 도착한 레밍.

“…설마하니 이런 곳에 있다니. 살아남았다면 얼른 도망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업신여겨진 것 같군.”

도서관 안으로 연결된 문틈 아래에선 희미한 붉은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밤새 불을 켜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던 모양.

로데벡은 허리춤의 피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만만찮은 놈들이니 역시 보통 방법으론 안 되겠지.”

노인은 굳게 닫혀있는 도서관의 문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날이 아주 조금 더 밝아졌고, 아렌의 눈에도 사물들이 좀 더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이 입고 있던 다 해져있는 옷은, 자세히 보면 온갖 문양과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왕족의 복식이었다.

아마도 왕국이 망하고 30년 동안, 한 번도 벗지 않은 옷 같았다.

그가 무슨 심정으로 그 옷을 입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왕국을 망친 주범들은 여전히 왕궁 안에 있었다.

노인은 아렌이 옆에 있는 것도 잊은 것처럼 사납게 말했다.

“어디, 수호자들의 능력이 그것뿐이라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지. 여기까지 온 손님인데 환영 인사를 해줘야겠지?”

‘-흠.’

아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로데벡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이, 곧 습격이 있으리라는 걸 미리 그들에게 알리는 것.

다른 하나는-

‘기사단. 당신들이 미끼가 좀 되어줘야겠어.’

아렌은, 망자들의 습격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

어느새 날이 밝았고, 도서관 안은 조용한 가운데 분주했다.

곳곳의 문을 기사들이 교대로 감시하는 가운데, 레온나토스와 레밍, 발커스가 밤을 새워가며 도서관의 책을 거의 이 잡듯 뒤졌기 때문이다.

대체로 기억할 만한 책을 아렌과 발커스가 고르고, 한번 읽은 책은 대강 기억할 수 있는 레밍에게 골라진 책을 넘기는 형식.

덕분에 이 왕국의 역사와 흑옥, 그중에서도 만월강을 따라 머나먼 북쪽인 ‘밟지 못하는 땅’에서 나온 흑옥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레밍이 이 정도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라면 이 성을 나가고도 찬찬히 책의 필사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밤을 새워가며 책장을 넘겼던 레오나토스가, 눈을 부비며 문득 물었다.

“후, 역시 힘들군. 레밍, 자네는 괜찮나? 너무 눈을 혹사한 것 아닌가?”

“피곤합니다만, 문제없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제 평소 업무와도 닮았으니까요. 그보다 언제 수몰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책들을 세상에 다시 남기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는걸요.”

“…아렌도 여기 있었더라면. 분명 이곳을 좋아했을 텐데.”

“….”

좌중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이제 발커스 경에 대한 성토의 분위기는 잠시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었다.

스스로 아렌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침묵보다는 낫다. 발커스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아까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아렌 공이 이상한 것을 말했습니다.”

“아렌이? 이상하다니, 뭐가 말인가?”

“실은 망자들의 흐름에 집어 삼켜질 위기가 전에도 있었는데, 그때도 아렌 공이 말한 대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때 아렌 공이 말하길, ‘순간 번뜩인 게 있었다’라고 했지요.”

“…번뜩였다?”

“설마, 계시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요. 현자 솔티르도 아니고, 하하.”

“….”

더글라스의 농담이었지만,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솔티르. 제국이 아직 왕국이던 시절, 건국왕 브륀할트 1세의 곁에 있던 현자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남은 수많은 전설들이 있었고, 계시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미래 예지라. 아렌이 정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군.”

“…그렇게 진지하게 듣지 마시지요, 전하. 그저 농담한 거였습니다.”

“…아니. 잠시만.”

건국왕과 일평생을 함께 했던 현자 솔티르의 자세한 뒷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공개되어 있지 않다. 소수의 황족들에게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올 뿐.

그리고, 레온나토스는 솔티르가 미래를 엿볼 때 썼던 도구가 매끈한 검은색 수정구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가의 창고에서 그것을 직접 본 적도 있었다.

‘…아니, 막연히 수정구라 불렀을 뿐, 재질은 수정이 아니었어. 맨들맨들했지만 투명하진 않았으니까. 재질은 오히려-’

흑옥. 노인이 사용하던 피리의 재질과 흡사했다.

신비로운 힘을 구사했던 두 인물이 사용한 도구가, 우연히 같은 재질일 가능성.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지금은 다른 단서가 없었다.

“-레밍. 지금까지 읽었던 내용 중에 ‘흑옥’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나?”

“흑옥, 말씀입니까?”

“그래. 흑옥, 또는 검은색 돌. 지금까지 읽었던 것들 중 그런 내용이….”

명을 내리던 레온나토스의 말이 잦아들었다.

레온 뿐 아니라, 레밍과 기사들 역시 긴장해 몸을 굳혔다.

순간, 도서관의 바닥이 일렁였기 때문이다.

이미 날이 밝았기에 도서관 안을 비추는 건 중앙의 모닥불보다, 도서관탑의 천장에 뚫린 채광창의 햇빛이 더 강했다.

탑 안 모두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환기구와 채광창 위를 지나가는 무언가가 빛을 막았다 다시 열었다를 반복했다.

“…저건 설마, 사람?”

중얼거린 더글라스.

그와 동시에.

-퍽석.

도서관 아래로 떨어진 사람의 형체는, 곧바로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곧이어 후두두, 탑 위의 열린 환기구를 통해 망자들이 차례차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돌바닥에 추락해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망자들의 추락은 멈추지 않았다.

“모두! 전하를 지켜라!”

목소리가 갈라져라 외치는 더글라스.

기사 몇몇은 추락하는 망자와 직격해 목숨을 잃었지만, 추락 자체가 그들의 목적은 아니었다.

추락은 사실은 실패에 가까웠다. 탑의 외벽을 기어 올라갔던 망자들은, 환기구를 통해 내벽으로 거미처럼 기어 내려왔다.

손톱이 까지고 거기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망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열, 스물, 서른.

도서관 탑의 외벽을 기어오르는 망자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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