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다리 너머의 안개를 실눈으로 응시하던 노인은 이내 발을 돌렸다.
“흠,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하긴 지금은 성안의 녀석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지.”
사람을 홀리는 안개 속에서,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말하는 노인.
그가 이번 사건의 원흉이거나, 적어도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대로 보낼 순 없지.’
아렌은 웃통을 벗고 다리 아래에서, 코를 훌쩍이며 기어 올라왔다.
“흑흑… 여기 어디야?”
“응, 누구냐?”
뒤돌아본 노인. 아랜은 혼신의 연기력으로 말했다.
“흑흑… 할아버지, 여기 대체 어디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죠?”
최대한 울먹이는 목소리를 연기했지만, 원래라면 젖어있어야 할 아렌의 눈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혹시나 바짝 마른 눈을 들킬까 봐, 아렌은 얼른 눈물을 훔치는 척 손등으로 가렸다.
“아이가 어찌 여기까지 혼자 온 거지?”
“부모님 따라 안개 속으로 들어왔어요. 이리로 지나가는 게 더 빠르다면서 절대 마스크를 벗지 말라 하셨는데, 어느새 어디론가 가시더니… 흑!”
“…저런. 쯧쯔.”
노인의 목소리에 일말의 동정심이 서렸다. 사람의 심중을 파악할 수 있는 아렌은 그 노인의 동정심이 진심임을 간파했다.
‘일단은, 통한 건가?’
아마도 이 사태의 원흉일 노인과 직접 접촉하는 건 아렌으로서도 큰 모험이었지만, 아직은 성공이라 평가해도 될 것 같았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여겼기에 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아렌의 겉모습은 열 살짜리 꼬마 아이일 뿐. 거기에 웃통까지 벗은 채 흠뻑 젖어 훌쩍이는 후줄근한 아이를 의심하고 경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아렌이 이전에 아이를 연기해본 적은 없지만, 애초에 점술가는 항상 무슨 ‘척’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의미심장한 점괘인 ‘척’, 무언가를 감지하고 예견하는 ‘척’, 상대방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척’.
그렇다면, 길잃은 아이인 ‘척’을 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당장은 통한 모양이지만,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몰라.’
물어볼 것들은 많다. 하지만 아렌이 궁금한 것을 줄줄이 물어봤자, 곧이곧대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겠지.
하지만, 점술가는 상대의 표정이나 눈짓 같은 비언어적인 수단에서 더욱 많은 정보를 얻어낸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러 온 건데, 그 원흉인 듯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미안한 이야기지만, 네 부모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어디, 그렇게 떨어져 있지 말고 가까이 오겠느냐?”
노인이 한걸음 다가왔고, 아렌은 얼른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싫어요! 다가오지 말아요.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막 달라붙지 말라 했단 말이에요.”
‘당장 적의는 보이지 않지만, 혹시 생각이 바뀌어 달려들기라도 하면 난 당해내지 못해.’
“아, 아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데-”
“전혀 못 믿겠어요. 왜 할아버지만 마스크를 안 썼어요? 부모님은 마스크를 꼭꼭 쓰라고 말씀하시던데.”
“그, 그건…”
“할아버지, 나쁜 사람 맞죠?”
아렌의 추궁에 노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잉, 아티스의 백성을 홀대할 수도 없고… 실은 말이다, 꼬마야. 할아버지는 이 성의 수호자란다.”
“흑흑, 수호자요?”
아렌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럼 우리 엄마는… 이제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아니,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거짓말.’
우는 척하면서, 아렌은 노인의 표정을 읽었다.
눈과 표정. 몸짓과 기색을 읽으면 그가 지금 하는 말의 허와 실을 분간해내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야. 안개에 한 번 홀리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거나, 있더라도 이 노인은 그 방법을 몰라.’
이 노인이 성과 도시를 둘러싼 안개의 실마리라는 건 확실했다.
문제는, 아렌이 그 실마리, 노인을 확보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
‘레온 황자가 단련할 때 나도 좀 더 열심히 배워뒀더라면…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나.’
아렌이 회귀한 후 지금까지 단련만 했어도 노인을 제압할 실력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온갖 음모가 몰아치는 제국의 황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으로 검을 익혀두는 게 유리할 것이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렌의 생각도 모른 채 노인은 아렌을 앞에 두고 연신 중얼거렸다.
“흐음… 이런 꼬마를 수호자로 만들어봤자 딱히 쓸 데도 없을 거고…”
한참을 고민하던 노인은, 고개를 들고 성 바깥쪽을 가리켰다.
“네 부모를 만나면 꼭 나가라 전해두마.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수중다리가 나오거든? 네 어깨까지 올 거다. 거기서 일직선으로 쭉 나가면 도시 밖이야.”
“…싫어요. 여기 어디 있는 거죠? 좀 더 찾아볼래요.”
‘분명 기회가 올 거야.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아렌이 노인과 육박전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순간을 노려 기습한다면 또 모른다.
아렌은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맘대로 하려무나. 그 책임은 네가 지는 거지만”
아무리 마스크를 껴도 언젠가는 안개가 몸속으로 침투한다.
아이의 동행을 허락해줬다는 건 곧, 아이가 안개에 홀려도 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네가 부모님을 찾아도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부모님에게 부과된 업무는, 아티스의 국민으로서 무척 보람되고 신성한 일이거든.”
‘-허.’
아렌은 기가 참을 느꼈다.
‘-진실이다.’
노인은, 정말 진심으로 그리 느끼고 있었으니까.
*****
벽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더듬더듬 나아간 레온나토스와 근위기사 더글라스.
그들은 이윽고 레밍이 찾은 도서관 바로 앞까지 다다랐고, 그 앞에서 기사단장 발커스와 다른 기사들도 만났다.
“아, 발커스 경. 무사했군.”
“전하. 무사히 탈출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문밖의 망자들을 치워준 것, 역시 자네들이었지? 자네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네.”
“…….”
레온의 치하가 있었지만 발커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보다 전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밖은 위험합니다.”
기사들이 나무 문을 두드렸고, 잠시 뒤 낡았지만, 아직 튼튼한 문이 열렸다.
문 안, 도서관 안에 고여있던 따듯하고 메마른 공기가 훅 빠져나왔다.
바깥의 서늘하고 습기 찬 공기와는 사뭇 다른 훈훈한 기운이었다.
“…과연, 동굴에서처럼 불로 안개를 날려버리는 것인가.”
레온나토스가 감탄했다.
왕궁을 둘러싼 아홉 개의 탑. 그중 하나가 통째로 도서관이었고, 각 층의 바닥마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어 그 구멍 위로 탑의 꼭대기와 맞닿은 천장이 보였다.
그 아래에서 피운 거대한 모닥불은, 뚫려있는 중앙부를 통과해 탑 지붕의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항상 안대를 하고 있던 젊은 사서, 레밍은 모닥불 옆에서 하염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레밍! 자네가 무사한 걸 보니 기쁘군!”
“전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곳에서라면 마스크를 벗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혹 증상이 진행된 기사님들도 불 가까이 오시지요.”
그러고 보니 먼저 와 있던 기사들은 모두 입을 가렸던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
레온나토스를 모시던 기사들도 뒤늦게 젖은 마스크를 말리며, 비로소 탑 안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레온도 마스크를 벗으며 감탄했다.
“휴, 그나저나 이렇게 큰 불을 피웠는데 용케 안에 연기가 들어차지 않는군.”
“책은 습기의 가장 큰 적이지요. 도서관만큼 습도조절과 환기에 공을 들이는 건물은 또 없습니다. 아렌 공의 제안이었습니다만, 좋은 통찰이었습니다. 밖으로 통한 문들은 모두 닫고 기사님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즉, 조용히 문만 지키고 있다면 적어도 도서관 안은 안전하다는 뜻이다.
안개까지 걷어냈으니, 이 안에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엔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물론, 기사들에겐 끼니를 두어 번 정도 때울 식량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 아렌은 어디 있지? 여기 다른 층에 있나?”
“…….”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레온. 그러자 발커스의 입이 더 바짝 말랐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일.
발커스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아렌 공은… 혼자서 망자들을 유인했습니다. 전하 앞으로 몰려든 망자들을 끌어내던 그때였습니다.”
“…….”
훈훈했던 도서관 안의 공기가 단숨에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네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혼자 미끼가 되겠다는 걸 넙죽?”
“아렌 공의 강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혼자인 편이 더 낫다고, 잽싸고 은밀하게 다니려면 그편이-”
“내가 자네들을 아렌 곁에 붙여놓은 건, 그를 지키라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입장이 반대가 되었군. 자네들을 지킨 아렌이 기사인가, 보호받은 자네들이 기사인가.”
“…….”
발커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황자는 경멸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근위기사인 더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진정하시지요. 발커스 경이 너무 당황해 실수한 모양입니다. 물론,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끔찍한 실수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타를 잠깐 피하고 싶었을까.
발커스는 둘의 말을 눈을 질끈 감은 채 감내하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눈을 떴을 때, 거기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레온의 경멸 섞인 시선이 있었다.
“발커스 경은, 아렌이 무사하기만을 비는 게 좋을 거요. 만약 그가 어떻게 된다면-”
“…….”
꿀꺽.
발커스 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숨을 죽였다.
“-그때는, 어떤 명령을 내리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발커스는 처음에 그렇게 얕봤던 레온나토스에게 꼼짝없이 잡혀 살게 되었다.
물론 이것 역시 아렌의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복도를 걸어가는 노인과, 노인을 뒤따르는 건장한 체격의 망자들 넷. 그리고 그들을 멀찍이 따라가는 아렌.
어두워서 보이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노인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렌이 물었다.
“흑흑, 지금 뭘 하고 있어요?”
“이 성 어딘가에 아직 침입자들이 남아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자들을 찾는 거란다.”
“그 사람들이 뭘 잘못했는데요?”
“용서 못 하지. 이 아티스가 누구 때문에 멸망했는데. 그런데 감히 더러운 발로 이 궁전을 더럽혀?”
서서히 격앙되는 노인.
“기사 놈들은 사로잡아서 내 휘하의 수호자로 둬야겠고, 그 꼬마 놈은 언젠가 진군할 때 선봉으로 세워야겠어. 제국에 본보기로 말이다.”
“…진군이요?”
“그래. 제국만 사라지면 찬란했던 아티스 왕국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분명해! 진군의 시기가 멀지 않았다!”
‘…아이고.’
노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과대망상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당연하지만 제국이 망하든 말든 과거의 아티스 왕국은 돌아오지 않는다.
몇백, 몇천 모은 망자의 무리로 제국의 국경기지조차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망자같은 흉흉한 소문이 제국에 퍼져서 좋을 것 없겠지. 괜한 피가 흐르는 것도 사양이고.’
아렌은 노인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흑옥 피리를 바라봤다.
피리는 검은색이었지만, 아주 약간의 빛을 받아도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저 피리만, 어떻게 빼앗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