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38화 (38/227)

#038화

아렌과 발커스는 복도 끝에서, 반대쪽 끝을 보고 소곤거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발커스?”

“역시 저 안에 있는 거겠죠, 제기랄.”

복도를 가득 메운 망자들, 간신히 그들 너머 보이는 복도 끝에는 튼튼해 보이는 나무 문이 있었다.

선두의 망자들이 줄곧 나무 문을 두드리고, 긁어댔지만 나무 문을 부러뜨리기엔 역부족이다.

“아니, 왜 하필 막다른 곳이냐고….”

산 넘어 산, 발커스는 탄식했다.

아렌과 같이 있는 스물도 안 되는 기사들로 백이 훨씬 넘는 망자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겁을 먹을 수 있고 포기할 줄도 아는 보통 사람이 상대라면 또 다르겠지만 상대는 맨손이라도, 팔이 잘리더라도 묵묵히 다가오는 망자들이니까.

‘결국, 유인해내는 수밖에 없나?’

저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선, 방 안쪽보다 더 큰 인기척이 필요했다.

아렌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재료들은 많았다.

황자와 기사들이 도망가면서 죽인 망자들이 복도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아렌은 허벅지부터 잘린 다리에서 크고 묵직한 신발을 벗겨냈다.

발커스는 불길한 생각에 되물었다.

“…아렌 공? 뭘 하는 겁니까?”

“편지요. 전하가 이걸 보실지는 솔직히 도박이지만.”

“……?”

아렌은 다시 단검으로 그나마 깨끗한 망자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바닥에 충분히 흐른 그들의 피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벽의 화살표를 따라가 도서관으로 가시오]

그제야 발커스도 아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망자들을, 유인해낸다고? 우리들이?’

말리고 싶었지만, 말릴 근거도 없었다.

“아렌 공, 진심이에요?”

“전 항상 진심인데요?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죠? 저러다 전하가 돌아가시면 우리도 좋은 꼴은 못 보겠죠.”

“그래서, 황자 대신 우리가 대신 먹잇감이 된다고요? 게다가 그 맹인 사서가 정말 도서관을 찾았는지 어떤지도 모르는데.”

“그건 괜찮아요. 설령 도서관을 못 찾았더라도 레밍들과는 합류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만 망자들을 잘 따돌리면 문제없어요.”

“거참, 쉽게 말하시네. 결국 황자님 목숨은 소중하니까 대신 값싼 우리 목숨을 내던진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방법이 있어요?”

“…….”

아렌의 말에 발커스는 침묵했다.

발커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이미, 선택권은 없다는 걸.

지금까지 기사들은 점괘대로 황자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하지만 실은, 그 점괘 따위는 무의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토 바깥까지 나온 임무에서, 레온나토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의 보호를 맡은 기사단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제국으로 복귀하면 참수형, 복귀하지 않더라도 갈 곳은 변변한 지붕 하나 없는 황무지, 옛 아티스 영토뿐이다.

“…젠장할. 그래서 이제 어쩐답니까?”

“우선은, 이러죠.”

아렌은 천으로 싸맨 신발을 망자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천장에 닿을 듯 말듯,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신발은 퍽, 대열 중간에 있는 망자의 뒤통수를 때리며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렌은 외쳤다.

“와아악!”

그와 동시에 하나둘, 뒤를 돌아보는 망자들.

자포자기한 듯 발커스도 외쳤다.

“빌어먹을… 야! 여기 맛있는 식사가 배달왔다고!”

“발커스. 그런다고 망자들이 더 달려들까요?”

“몰라요.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아렌과 발커스, 다른 기사들까지 도발에 합세하자 뒤쪽의 소란에 망자들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원래 쫓던 목표인 황자를 놓쳤으니 뒤쪽에서의 새로운 소란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처사.

망자들은 하나둘,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가장 앞에서 나무 문을 긁던 망자들까지, 전부.

아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몇은 남을 줄 알았는데, 전부 다 따라온다고?’

성안에 있던 망자들이 전부 몰려온 것도 그렇고, 안개에 홀린 망자들은 객체라기보다 군체의 일원에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발커스는 다급히 외쳤다.

“젠장! 아렌 공 당신이 안내해요! 미래를 보든 점을 치든, 살려만 달라고!”

“나라고 뾰족한 수 있겠어요? 달려야죠 뭐.”

물론, 기사들과 무작정 달리는 것이 아렌의 계획은 아니다.

고함만으로 문을 긁던 망자들을 전부 따라오게 했다면, 굳이 기사들 여럿이 저들을 끌고 다니는 것보다 몸이 작고 날랜 이가 끌고 다니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

아렌은 달리면서 말했다.

“발커스. 망자들이 떨어지면 화살표를 찾아 전하와 합류해요.”

“네? 그럼 아렌 공은 어쩌려고요!”

“저 혼자 녀석들을 끌고 도망칠게요.”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닙니까?”

“저도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근데 왜-”

“제 몸집이 더 작으니까. 망자들이 못 들어갈 틈새에도 잘 들어갈 테고, 따돌리기도 더 쉬울 거예요. 망자들 몰래 숨기도 좋고요.”

“…….”

발커스는 망설였다.

아무리 신통한 말을 하는 점술가라지만, 아렌은 고작 열 살.

사람이 미쳐 날뛰는 이런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게 하는 건 기사로서, 어른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아렌 공. 하지만 그러면-”

“너무 신경쓸 필요 없어요. 사실 아까부터 손끝이 저리죠?”

“…….”

그 말대로였다. 발커스는 이미 꽤 전부터 손끝이 저리기 시작했다. 빨리 안개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자칫 이 성에 영영 속박당한 망자 중 일원이 될지도 몰랐다.

발커스 말고도 기사 중 그런 자가 꽤 많았다.

“그래도, 기사 하나 정도는 호위로 데려가시죠?”

“덩치 커다랗고 갑옷이 달그락거리는 사람을 몰고 다니라고요? 나 혼자면 훨씬 조용하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더 이상은 발커스도 설득해내지 못했다.

마침 탑 아래를 원형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그 옆쪽으로 성안까지 이어진 좁은 복도가 나왔다.

망자들은 지금도 적당한 간격을 둔 채 둘을 따라오고 있었다.

“성안으로 가요. 얼른요, 발커스.”

“젠장. 꼭 살아서 봅시다. 이대로 죽은 꼴을 보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거 같으니까.”

기사들은 갈림길에서 성으로 향하는 공중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렌은 아래로 이어진 계단 앞에 서서 망자들을 기다렸다.

탑의 복도는 외벽을 따라 조금 굽어 있었기에, 망자들은 기사들이 복도 안으로 들어가는 걸 가까스로 보지 못했다.

다시금 망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아렌은 외쳤다.

“와악! 여기야!”

고래고래 소리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하는 아렌.

다행히 아렌의 정성에 힘입어, 망자들의 무리는 기사들이 아닌 아렌을 향했다.

성공적이었지만, 지금 아렌은 지켜줄 사람 하나 없는 혼자다.

아렌은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작은 몸이니 숨을 데가 더 많고 안전하다, 라.’

발커스를 향해 한 말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갑옷 때문에 그리 빠르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기사들보다야 아렌 하나가 더 빠르고 조용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력하기만 할 뿐.

특히나 성안에서 만난 망자들은 바깥의 망자와 달리 꽤 재빠른 움직임을 보여줬으니까.

방심은 금물이었다.

‘또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이런 음침한 곳에서.’

하지만, 끝까지 이어져있을 것 같았던 계단은 중간 부분이 끊어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아렌은 바로 옆에 뚫린 작은 창을 봤다.

창은 아렌처럼 몸이 작은 아이 하나 정도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고, 그 아래로는 10미터도 넘는 높이였다.

그나마 탑 아랫부분은 수몰되어 단단한 바닥이 아니라 수면이 있었지만, 그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이상 무섭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렌은 이미 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한번 목이 잘려본 사람한테 이정도야…”

무섭긴 하지만, 못 뛰어내릴 정도는 아니다.

아렌의 몸은 좁은 창문을 겨우 비집고 빠져나왔고.

따라온 망자의 손아귀가 아렌의 발목을 낚아채기 직전.

아렌의 자그마한 몸은 수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대략 20년 전.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이 새내기 궁인으로서 레온나토스를 모시게 되었을 무렵.

그 당시 아렌은 단지 점이 취미인 소심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고, 식중독으로 한번 죽다 살아난 레온나토스 역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방에서만 지냈다.

그렇게 황궁 안에서 살지만, 황궁 바깥의 소식은 거의 접하지 못하는 나날.

제4 황자 가웨인이 기사단과 함께 동쪽 국경의 자그마한 소란을 정리하러 갔다는 소식 역시 소문을 좋아하는 궁인에게 억지로 들은 내용이었다.

‘글쎄, 가웨인 전하가 돌아왔을 때 그렇게 위풍당당했던 기사단이 절반으로 줄었다니까?’

‘국경의 별것 아닌 사건이라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이야. 전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황제 폐하 역시 국경에서 있었던 일은 금구에 붙이시더라고.’

‘흐음…’

‘가웨인 전하는 갑자기 미신에 관심을 가지시고 말야… 아렌. 왜 그러냐? 갑자기 멀어지고?’

‘높으신 분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전 빠질게요.’

‘야, 인마!’

*****

퍼뜩, 아렌은 눈을 떴다.

몸은 온통 젖어있었고, 그건 입을 가린 마스크도 마찬가지.

뒤쪽에 망자들을 달고 내려온 탑의 아랫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고, 아렌은 어린아이나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창으로 겨우 빠져나와 물속에 떨어졌다.

겨우 헤엄쳐 나와 해자의 기슭에 도착한 아렌은, 아무래도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주위에 왜 아무도 없지?’

아렌은 그대로 머리를 땅에 댔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돌다리 아래.

너무 힘들었기에 아렌은 이대로 잠깐 다리 아래 으슥한 곳에서 숨 좀 돌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망자들은 당분간 탑 가장 아래에서 헤매고 있을 터.

황자들이 제때 방을 나오고 발커스들과도 합류했다면 대강의 문제들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렌 역시 도서관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이래서야.”

오랫동안 달려 지칠대로 지친 몸에, 흠뻑 젖어 찰싹 달라붙은 옷들. 그리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 마스크까지.

아렌의 몸은 쉽사리 움직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손에 낀 흑옥 반지에서도 계속 통증이 느껴졌다.

어째, 점점 아파 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깐만 빼놓을까? …아니.’

그럴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살짝 금이 갔을 뿐, 아직 반지로서의 끼고 있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라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아렌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아렌은 사실 반지를 빼놓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의 꿈 같은 두 번째 삶이, 없던 것이 될까 봐.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아야야! 점점 아파온다는 거, 착각이 아니야!’

통증은 점점 거세졌고.

저벅저벅.

잠시 후, 망자들의 터덜대는 발소리와는 달리 명백히 의지를 가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아렌은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발소리로 보아 갑옷을 차려입은 건장한 기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소리는 아렌이 숨어있는 바로 위, 다리 앞에서 멈췄다.

“허, 참 이상도 하지. 어쩐지 피리가 두근댄다 해서 따라와 봤더니만, 아무도 없잖아?”

“…….”

‘피리?’

듣고 예사로 넘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아렌은 망자들이 대거 이동하기 직전 ‘피리’ 소리를 들었다던 레밍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리 위로 빼꼼 얼굴을 내민 아렌.

다리 위에는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친 노인이 있었고, 그 노인의 허리춤에는 검은색 피리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증거는커녕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쩐지 아렌은 알 것 같았다.

‘…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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