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아렌과 발커스, 기사들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하나로 모인 망자들의 발자국을 뒤쫒았다.
복도 곳곳에서 본류에 합류하는 다른 망자들의 발자국을 볼 때마다 발커스는 전율했다.
“이 발자국 끝에 대체 얼마나 모여있는 거야? 저 숫자랑 다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죠?”
“모르죠. 하지만 마음은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에요.”
“…젠장할.”
아렌의 대답에 발커스는 욕지기를 뱉었지만, 다행인 점은 망자들이 한 방향으로 몰려간 덕에 주변에 다른 망자들이 있을 위협은 덜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 망자들이 완전히 몰린 곳에 몰려가고 있긴 했지만, 덕분에 기사들은 주변을 살필 여유도 더 생겼다.
복도를 지나, 성 중앙에 있는 거대한 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레밍. 여기 있었어요?”
“아, 아렌이군요.”
홀의 구석, 기사들에 보호되고 있는 레밍이 있었다.
세 갈래로 나뉘었던 기사단 중 둘이 합쳐졌고, 기사들은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아렌과 레밍은 서로 있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망자들이 저쪽으로 갔다고요?”
“네. 그런데 아렌, 뭔가 이상했어요.”
“이상했다뇨?”
생각해 보면 지금 성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이했다.
하지만, 레밍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피리 소리라고요?”
“네. 너무 가느다랗고 희미했지만, 귀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밝은 편이라 자부해요. 그 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 지나 망자들이 한 줄로 몰려가더군요.”
무언가가, 모종의 방법으로 망자들을 조종한다는 건 아렌도 예상한 바였다.
만약 레밍이 들은 게 착각이 아니라면, 그 수단은 피리일 수 있다.
“혹시 그거 말고도 더 느껴지는 건 없어요?”
“…이건 확실하지는 않지만.”
레밍은 거대한 홀, 팔방으로 연결된 복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도서관은 아마도 저쪽일 거예요. 어렴풋이 고서에 쌓인 먼지 냄새와, 습기 머금은 종이의 냄새가 나거든요.”
“정말이에요?”
“아마도.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것 같다’ 정도지만요.”
“…….”
아렌이 레밍을 천거한 건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하는 능력 때문이지, 눈이 불편해진 대신 예민해진 다른 감각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술가로서 레밍의 기색을 살펴봤을 때 레밍에게선 어떤한 기만도 느낄 수 없었다.
적어도, 레밍 스스로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감각에 대한 확고한 신뢰도 겸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믿어볼 수밖에 없나?’
기사들의 당장 급선무는, 이 성 어딘가에 있을 황자를 찾는 것.
하지만, 황자를 찾은 다음에는?
기사들은 이미 안개에 많이 노출된 상태다.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물러나면 기사들은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안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궁전에 접근하지 못한다던 이곳의 원주민들과 아티스 해방 전선처럼.
‘…만약 성안의 망자들이 모두 한곳으로 몰려갔다면 도서관 안은 텅 비었을 거야.’
처음엔 단지 동쪽 국경에서 레온나토스를 도와 공을 세워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트레움과 아홉 탑의 궁전에 들어서고 나니, 아렌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아렌의 목표는, 이곳을 둘러싼 현상들의 원인을 밝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레밍의 말대로 저쪽에 도서관이 있다면, 먼저 그곳으로 가 안쪽을 확보해주세요. 지금이라면 망자들도 모두 빠져있을 거고, 도서관을 확보한 후 입구만 막는다면 망자들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우리더러 도서관 안에서 농성이라고요?”
“정확히는 레밍과 레밍을 지키던 기사님들이 수고해주셔야죠. 우리는 전하를 쫓고요.”
발커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기껏 합류한 기사들이 다시 흩어지는 것도 모험인데, 괜한 짓이 아니냐는 듯한 표정.
“꼭 그럴 필요 있습니까? 지금은 합류한 다음, 전하를 찾으면 곧바로 이곳을 나가는 게-”
“하지만 지금 물러나면 다음엔 더 들어오기 힘들 거에요. 아무리 마스크를 썼다고 한들 우리 역시 안개에 노출되었으니까. 무언가 단서를 찾으려면 지금밖에 없어요.”
“바로 그 안개가 문제 아닙니까? 우린 이미 안개에 오랫동안 있었다고요. 언제 신호가 올지 모르는데 농성까지 한다면…”
물론 아렌도 대책은 있었다.
“방법은 있어요. 레밍과 같이 간 기사님들은, 도서관 안에서 밖으로 통한 모든 입구를 막은 다음 불을 피워주세요. 가능한 큰불을.”
“…불을요?”
뜻밖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의아해졌고, 특히 책을 목숨처럼 아끼는 레밍의 표정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아렌이 부연했다.
“물론, 책을 태우라는 말은 아니에요. 책장이나 책상, 의자 등 태울 건 많으니까요. 아티스 해방전선이 동굴 입구 앞에서 불을 피워 안개를 몰아냈던 것처럼, 도서관 안에 큰 불을 지핀다면 어느 정도 안개를 몰아낼 수 있어요.”
물론 오래 가는 수법은 아니다. 밖으로 난 창도 없이 밀폐된 곳이라면 점점 연기가 들어찰 거고, 더는 태울 것이 없어도 문제, 불똥이 주변의 책에 옮겨붙어도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 안개에 홀리는 일만큼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마냥 대책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 발커스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요?”
“물론 황자님을 구해야죠. 그리고 발자국을 쫓아가는 동안, 벽에 표식을 해야 해요. 표식은… 줄을 두 번 그은 화살표로 하죠.”
“표시? 어차피 바닥에 흔적이 선명한데, 길 헷갈릴 일은 없지 않을까요?”
발커스의 당연한 의문.
아렌은 답했다.
“이건, 우릴 위한 표식이 아니에요.”
“……?”
“자, 계속 따라가죠.”
망자들의 발자국은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더니, 좁고 기다란 복도에 이르렀다.
복도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바닥과 천장, 벽이 있었지만 창밖은 허공이었다.
멀리서 보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한 가느다란 실처럼 늘어져 있는 돌로 지은 복도.
대체 어떻게 지은 구조물인지, 아렌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충돌했군.”
발커스가 욕지기를 겨우 참으며 말했다.
공중 복도의 바닥에는 여기저기 잘리고 찔린 고깃덩어리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팔과 다리, 개중에는 익숙한 갑옷과 기억에 있는 얼굴들의 잔해도 있었다.
수도 없이 발에 짓밟혀 갑옷 곳곳이 우그러지고, 터진 복부에서 비져나온 장기는 아직 선홍색으로 신선했다.
“…우웁!”
예전 동료의 참혹한 광경에 몇몇 기사들은 창밖으로 토악질을 했고, 토사물은 허공의 거센 바람을 맞아 공중에서 흩어졌다.
복도의 광경에 눈을 찌푸린 건 아렌도 마찬가지지만, 살필 건 살펴야 한다.
아렌은 시체가 어지러이 놓인 복도를 살폈다.
“여기에 황자님 시신은 없어요. 얼른 가죠.”
“…아렌 공 심장은 무슨 강철로 만들어졌습니까?”
“설마요. 저도 참고 보는 건데요.”
아렌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참혹한 광경인 건 맞지만, 목이 잘린 상태로 머리 없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보다 참혹하지는 않다.
이 복도에서 죽은 기사의 숫자는 셋. 아렌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는, 성과 탑 사이를 잇고 있었다. 이 복도 말고도 탑과 궁전, 혹은 탑과 탑 사이를 이은 다른 공중 복도가 위아래로 어지러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렌이 말했다.
“복도는 탑으로 이어져 있어요.”
“그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궁전과 그 둘러싼 아홉 개의 탑은 서로 나누어져 있어요. 우리는 먼저 궁전 안을 탐색하기로 했고요. 왜 탑으로 향한 걸까요?”
“…….”
“하긴, 그것도 가보면 알겠죠.”
아렌과 기사들은 공중 위 좁은 복도를 지나, 망자 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탑 안으로 들어갔다.
*****
“헉, 헉… 다친 사람은?!”
“…두 명이 다치고 네 명이 실종입니다.”
황자 레온나토스에게 근위기사 더글라스가 간략하게 보고하곤 숨을 돌렸다.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망자들에 쫓겨 무작정 달려 들어온 방 안.
두꺼운 나무문은 아직도 튼튼했고,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을 덧대어 놓아 망자들로부터 보호했다.
지금도 문밖에는 몇 명인지 모를 망자들이 나무 문을 긁어대고 있었지만, 날붙이도, 망치도 없는 그들이 가구로 보강된 문을 열기는 힘들 것이다.
안개 속에서 마스크를 낀 채 전속으로 달린 기사들은 겨우 안전한 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첫째. 바깥의 망자들로 인해 기사들 본인도 밖을 나갈 수 없다는 점.
둘째. 이곳에 언제까지고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점.
특히 두 번째 문제가 심각했다. 가지고 온 식량이 별로 없다는 것마저도 지금은 부수적인 이유다.
“…더글라스 님. 손끝이 저려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저도…”
입을 마스크로 꽁꽁 가려놓았지만, 격한 운동으로 숨을 깊이 몰아쉰 결과, 중독 초기 증상을 보이는 기사들이 많았다.
이들을 한시 빨리 안개가 없는 지역으로 보내지 않으면, 기사들 또한 망자들 중 일원이 되고 말 것이다.
드륵, 드르륵!
하지만 지금도 밖에선 망자들의 손톱이 나무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수많은 망자들을 뚫고 무사히 탈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까진가.”
레온나토스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레온나토스도, 조금씩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걱정할까 미리 밝히지 않았을 뿐.
“미안하네. 내 욕심으로 자네들까지 위험에 끌어들인 꼴이 되어버렸어.”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글라스는 먹먹한 표정으로 레온을 보더니, 아무렇게나 허리에 걸쳤던 검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벌써 수도 없는 망자들을 베어 날이 무뎌지고 곳곳에 이까지 나가 있었지만, 지금부터 그보다 몇 배는 더 일해줘야 했다.
“더글라스? 지금 뭘 하는 거지?”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열겠습니다. 전하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부디 무사히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더글라스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들 역시 죽기는 싫다. 레온나토스를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도 레온이 다치면 자신들 절반이 죽는다는 점괘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몸을 사린다 해서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죽음이 정해졌다면, 기사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죽음이 개죽음만은 아니길 바랐다.
갑자기 결사대의 분위기가 흐르자 레온나토스가 말리고 나섰다.
“아니, 모두 그럴 필요 없네. 여기서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도움을-”
“외람되오나 전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탈출할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우리뿐 아니라 성 어딘가 있을 다른 기사들 역시 언제까지고 안개 속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 기사들 몇이 안개에 홀리고 난 뒤에는 이미 늦고 맙니다.”
“더글라스, 자네들…”
“모두, 준비됐나?”
기사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했다.
천천히, 문 앞에 세워둔 가구들을 전부 치운 기사들.
한순간 문이 부서지며 망자들이 쏟아져 들어올까 가슴 졸였지만, 어째선지 지금 문밖의 망자들은 조용했다.
기사들의 행태도 가지각색이었다.
천으로 검 손잡이와 손을 묶는 기사부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기사, 지나친 긴장으로 표정이 완전히 기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기사 중 가장 고수인 더글라스가 당연하다는 듯 선두를 맡았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단숨에 열어젖힌 문.
더글라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디갔지?”
묘하게 조용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문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자들 수백이 몰려들었던 흔적은 바닥과 벽에 남아있었다.
손톱이 벗겨질 때까지 나무 문을 긁어, 나무 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나무 문 앞에는 천으로 싸인 누군가의 신발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레온나토스는 신발을 싸맨 천을 풀었다.
“이건…”
별다른 근거는 없지만, 레온나토스는 이것이 누구의 안배인지 곧바로 알 것 같았다.
“…아렌이구나.”
천에는, 황급히 갈겨쓴 글씨가 적혀있었다.
[벽의 화살표를 따라가 도서관으로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