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아티스 국의 왕자, 로데벡 아티스는 아홉 탑의 궁전에서 바깥을 내려다봤다.
대륙에서 아름답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 아트레움이 내려다보였지만 그의 눈에 서리는 건 짙은 절망 뿐이었다.
“…이럴수가. 셰오덴의 광견들이 기어이!”
아티스 국토를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젖줄인 만월강.
대륙에서 1, 2위를 다툴 만큼 압도적인 수량(水量)을 자랑하지만, 강은 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범람한다.
하지만 아티스 국은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선조들이 관리해온 정교한 치수 시설을 통해 수량을 관리해왔고, 치수 시설은 지속해서 보수되고 유지되어왔다.
국경을 넘어 밀물처럼 진격해온 제국군이 가장 먼저 한 것도, 바로 만월강의 치수시설을 전부 파괴하는 것이었다.
아티스 군도 그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강물은 금새 넘쳐흘러 평원을 적셨고, 범람이 시작되자 국토의 1/4가 물에 잠기고 말았다.
아홉 탑의 궁전을 동심원으로 감싸고 도는 여덟 줄기의 해자 역시도, 평소보다 수위가 두배 이상은 올랐다.
이제 궁 안에 남은 건 몇번의 전투 이후 그야말로 부스러기만 남은 패잔병들과, 피난 갈 곳 없이 성에 모여든 아트레움의 시민들 뿐.
반면, 아트레움의 밖에는 제국이 자랑하는 2만의 철기병이 도열해 있었다.
“…아직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로데벡은 절망하지 않았다.
해자와 해자 사이의 섬을 건널 수 있는 모든 다리를 끊고, 해자를 끼고 싸운다면 제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물론, 그사이 잔존 병력과 시민들의 희생 역시 뒤따르겠지만.
“모든 다리를 부수고 해자를 끼고 싸운다면, 가능하다. 최후의 한 명까지 전부 싸운다면…”
로데벡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뭘 하고 있느냐.”
로데벡은 퍼뜩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
아티스 국의 국왕, 빌헬렌 아티스였다.
로데벡은 외쳤다.
“어머니,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리를 무너뜨리고 방어선을 구축하면 쇠를 뒤집어쓴 저들의 말은 해자를 단 하나도 넘지 못할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아트레움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겁니다!”
아들의 절박한 말에도 빌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린 항복할 거다.”
“어머니!”
“네 말대로 모든 다리를 부수고 국민을 내몰면 저들을 막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병사도 백성도 없는, 고작 텅 비어있는 성 하나뿐이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빌헬렌의 뒤로 위병들이 다가왔다.
왕국의 제일가는 고수이면서, 정작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도 털끝 하나 더럽혀지지 않은 정예병들.
로데벡은 그들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도시 전체를 난공불락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굳이 밖에서 회전한 장군들의 무능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싸울 여력이 있는데도 항복하는 것은 굴종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해서 무엇이 남는단 말이냐.”
“나라가 남지요.”
빌헬렌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네, 그렇습니다. 태고로부터 이어져온 이 왕도와 왕궁, 그리고 왕의 혈통이 있는 한 아티스는 언제든 재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왕도와 왕궁을 저버린다니, 아니 될 말입니다!”
“…네 말대로 그것들을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면 누가 나라를 유지한단 말이냐. 이미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참이다. 저들도 죄 없는 국민들을 공격하지는 않겠다고 하더구나.”
로데벡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어머니! 그건 매국입니다!”
“매국이라. 내 생각은 다르다만.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어. 아무래도 넌, 잠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위병.”
왕자의 양옆까지 와 있던 근위병들이 로데벡을 양옆에서 단단히 붙잡았다.
“왕자를 지하 감옥… 아니, 왕실의 창고에 잠깐 가두어라.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만이라도.”
위병은 왕자를 끌고 갔다.
끌려가는 동안에도 로데벡은 지치지 않고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의 이름은 매국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재고해주십시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망국의 왕은, 역사에 기록될 일은 없으니. 협정이 끝나고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내 묘비에 백성들의 이름까지 같이 새기진 않겠다.”
“어머니!”
쾅!
로데벡은 성의 상층부, 왕가의 보물만을 보관하는 왕실 창고에 갇혔다.
“이건 매국입니다! 백성들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길 원할 겁니다! 어머니!”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는 로데벡. 당연하지만, 두꺼운 나무 문은 주먹으로 친 것 정도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로데벡은 창고 안에 보관된 보검을 뽑아 나무 문에 내리쳤다.
몇 번을 반복했을 때.
“왕자님. 그만두시지요.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왕자님을 내보내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셨습니다. 계속하신다면 저희도 힘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
창고 앞을 지키는 위병들의 말.
문을 부숴 위병들과 대치할 용기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왕자는 쥐고 있던 검을 문에 내던졌다.
그 뒤에도 항의의 의미로 은촛대와 이전 군주의 왕관, 보석과 장신구를 차례로 문에 집어 던졌다.
손에 잡히는 것들을 집어던지던 왕자는 창고에 고이 보관되어있던 흑옥 피리를 던지려다, 이내 포기하고 피리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어머니.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로데벡 왕자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세계관에서, 대대로 이어진 왕국을 왕이 포기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설령 망한다고 하더라도, 군주된 자로서 끝까지 싸워야만 했다. 어떤 영웅담도, 왕국의 역사에도 그런 기록만이 전해져 내려오니까.
로데벡은 우연히 손에 그러쥔 피리를 꼭 붙잡은 채, 오열했다.
“아트레움의 모든 자들이 힘을 합치면 왕궁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게 그들의 의무입니다! 그리하면 왕궁은 절대 함락당하지 않습니다!”
-쩌억!
순간 흑옥 피리에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쩌적, 갈라졌다.
얼음을 정으로 두드려 깨는 듯한, 아주 날카로운 두통과 함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직감과 함께, 로데벡은 점점 더 심해지는 두통 속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으으.”
왕자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벽에 걸려있던 양초는 뿌리까지 전부 타들어 가 촛농이 바닥에 흐른 채 굳어 있었고, 주위엔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그건 창고 안도, 문틈 너머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거기 밖에 아무도 없느냐!”
“…….”
정적만이 창고 안을 지배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불안한 이미지가 로데벡의 머릿속을 수놓았다.
“여봐라! 왕자 로데벡 아티스다! 내 말이 들린다면 제발 날 꺼내다오! 얼른!”
하지만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적은 더 큰 불안을 낳을 뿐이다.
로데벡은 창고에 있던 보검으로 나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자신을 말리는 근위병도 없으니 이제 거리낄 것도 없다.
왕자는 시간을 들여 어렵사리 나무 문에 기다란 틈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비집고 빠져나왔다.
문밖은, 이미 어둑한 밤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반나절인지 며칠인지도 모르겠다. 배 속은 텅 비어있었고, 너무 굶어서 오히려 배가 고프지 않고 아팠다.
“…어머니? 근위대장? 집사장? 아무나 대답 좀 해!”
복도 밖에서 간신히 타다 만 횃불을 발견해 불을 붙인 로데벡.
어둠 속에서 밝힌 복도는, 어쩐지 흐릿했다.
“…이건, 안개?”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로데벡은 안개 낀 어둠을 지났다. 로데벡은 일찍이 이런 안개를 아트레움에서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사람이 보였다.
어딘가 아픈 듯, 비틀비틀 걷는 궁인들.
단지 일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로데벡은 안심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모두 어떻게 되었느냐!”
“…….”
하지만, 로데벡의 부름을 받은 궁인은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자 아무리 둔한 사람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이봐?”
돌아본 궁인은 초점 없이 텅 빈 눈을 한 채 정처 없이 흘러가듯 걸어갈 뿐.
거기서부터 로데벡의 목적이 바뀌었다.
아무나 사람을 찾는 것에서, 제정신인 사람을 찾는 것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어딘가 정신을 빼놓은 듯 있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왕궁 한복판에서 제국군의 복장을 한 병사도 발견했다.
“네까짓 놈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제국군 변사에 주먹을 날린 로데벡. 병사는 픽, 쓰러졌지만 곧 다시 비척이며 일어섰다.
“헉, 헉… 별것도 아닌 놈들이 감히.”
제국병을 친 것으로 약간의 만족감을 얻은 로데벡은 성 밖으로 나갔다.
거기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안개에 사로잡힌 채 배회하고 있었다.
텅 빈 눈을 한 채, 궁인과 평민, 귀족과 제국군마저도 예외는 없었다.
망연한 눈으로 안개를 바라보던 로데벡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스몄다.
“…지켜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로데벡은 외쳤다.
“봐라! 왕궁은 이렇게 무사하다! 셰오덴의 광견들이 함부로 할 곳은 아니지!”
로데벡은 왕궁 밖에서, 마치 성문을 지키듯 배회하는 자들의 얼굴을 면면히 살폈다.
그중에는 아티스 국의 국왕, 빌헬렌 아티스도 있었다.
로데벡은 빌헬렌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보십시오! 모든 자들이 합심해 성을 지키는 모습을요! 이제 안개가 걷히고, 사람들도 정신 차리면 모두 예전과 마찬가지입니다!”
로데벡의 신이 난 목소리는 자욱한 안개 속 너머 멀리까지 퍼졌다. 그리고.
성을 둘러싼 안개는 30년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전하! 몰려옵니다!”
더글라스가 다급히 외쳤다.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좁은 복도. 그리고 너무 밀집돼 어깨로 벽을 긁다시피하며 밀려오는 백 단위의 망자들.
기사들만으로는 저들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
망자들의 기세를 막기 위해 기사 몇이 멈춰 섰지만, 망자들의 흐름에 단숨에 집어 삼켜진 뒤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망자들의 발아래에서 수도 없이 발에 치이고 밟히는 끔찍한 소리만 울려 퍼질 뿐.
“큭! 그 노인은-”
“이미 도망간 뒤입니다! 우리라도!”
하지만 망자들이 한 방향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글라스는 답답함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그 영감탱이는 대체 누구입니까!”
“아마도, 남아있던 아티스의 왕족일 거다.”
“…그렇다면 여기가 자신의 안방이나 마찬가지겠군요. 저흰 셋으로 나뉘어 약해졌고요.”
“그래. 하지만 희소식도 있다. 이 왕궁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적어도 한 명은 진상을 알고 있다는 점이지.”
“네. 그리고 그 한 명은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죠.”
“하하.”
더글라스의 자조 섞인 한탄에 레온나토스 역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