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성에 들어온 기사는 모두 셋으로 갈라졌고, 레밍과 레밍을 지키는 기사들은 왕궁의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레밍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황자 레온나토스와 점술가 아렌에 비하면, 레밍은 이름 없는 사서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어차피 누군가를 호위해야 한다면 그자가 중요 인물인 편이 오히려 지킬 보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밍은 비서관 아렌이 추천한, 아직 레온나토스의 가신조차도 아닌 일개 사서일 뿐.
지켜야 할 대상의 권위가 서 있지 않다 보니, 기사들의 사기 역시 낮았다.
‘…여차할 땐 그냥 버리고 가는 것도….’
레밍과 동행한 기사단의 부단장 라스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레밍과 기사들은 복도를 지나, 넓은 홀로 나왔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넓은 홀 안을 울렸다.
레밍이 말했다.
“아, 드디어 넓은 곳에 나왔군요. 다행히 이 주변에도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네. 그렇죠.”
레밍의 말에 대충 대답한 부단장은.
“…방금 뭐라고요?”
뒤늦게 고기를 돌리며 물었다.
레밍은, 여전히 안대를 한 상태였다.
눈을 가리고 있는데 주변 형세와 망자의 유무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
기색으로 라스의 의문을 눈치챈 듯, 레밍은 멋쩍게 웃었다.
“오랫동안 눈을 가린 채 살아보니, 눈을 쓰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더군요. 소리의 반향으로 대략적인 구조를 느낄 수 있고, 망자들이라도 숨은 쉬고 몸을 뒤척이니까요.”
“…….”
레밍의 말처럼 복도를 지나 도착한 홀은, 망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
굳이 레밍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곳이라면 기사들도 곤두섰던 신경을 잠시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레밍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망자들을 마주치지 않은 건 이상합니다. 마치,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만 같아요.”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저희의 최우선 목표는 도서관을 찾는 겁니다.”
“아, 그거라면…”
레밍은 홀과 연결된 여덟 방향으로 연결된 통로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아마도 저쪽일 겁니다.”
“…왜죠?”
“저쪽에서부터 오래된 책 냄새가 나거든요. 습기 찬 책의 냄새는 비교적 선명하죠.
“…….”
레밍의 말이 맞는지, 라스 역시 코를 킁킁거리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라스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라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괴물은 괴물을 알아본다, 이건가.’
비서관 아렌의 점술 실력은 해가 사라지는 것마저 예견하는 것으로 이미 유명하고, 주정뱅이로만 유명했던 더글라스 역시 아렌의 추천 이후엔 황궁을 대표하는 최고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었다.
아렌을 곁에 둔 뒤부터 레온나토스 또한 이전과 달리 황권에 대한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오고 있으니.
눈이 불편한 사서가 이번 임무에 따라올 때까지만 해도 단지 연줄로 뽑힌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레밍은 아직 책 앞에 서지도 않았음에도 기사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한 능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더글라스 경 역시 아렌 공이 추천한 기사였지. …어라?’
부단장 라스의 머리 속에서 어떤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려 하기 직전.
순간 레밍의 귀가 쫑긋거렸다.
“…라스. 방금 들었어요?”
“들었냐니, 뭐가요?”
“방금 피리같은 소리요.”
“피리 소리?”
라스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하다는 레밍 역시 이런 실수를 하는가,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해주려는 찰나.
“…발소리?!”
“쉿!”
지금까지 조용했던 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림과 동시에.
홀과 연결된 여덟방향 복도에서 망자의 무리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기사들은 숨을 죽였고, 망자들은 줄을 맞추거나 제식을 갖추진 않았지만, 명백히 한쪽 복도로 몰려가고 있었다.
레밍이 중얼거렸다.
“…피리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고 있어요.”
“정말, 피리 소리가 들린 겁니까? 전 그런 걸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물론 피리 소리가 레밍의 민감한 귀에만 들릴 만큼 아주 희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돌아다니는 망자들 또한 피리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레밍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 것 같아요.”
“…?”
“소리라고 해서, 꼭 들려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레밍에게, 기사들은 머리에 물음표만 띄울 뿐이다.
*****
“…….”
“…….”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는,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노인과 동행했다.
처음엔 어리숙한 듯,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의 노인이었지만 복도를 지나면 지날수록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이 성에서, 혼자만 입을 가리지 않고 멀쩡한 노인. 이질감은 확실하다.
“뭣하나, 어서들 오게. 도서관은 궁전을 둘러싼 아홉 탑 중 하나에 있지.”
궁전을 둘러싼 아홉 개의 탑은, 지지대도 없이 허공에 한 줄로 놓인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말이 복도일 뿐, 사실상 벽과 천장이 있는 다리나 마찬가지.
어떻게 지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저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한가닥 연결되었을 뿐인 복도의 가슴 높이로 뚫린 창으로는 습기 어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앞서가던 노인은, 문득 말했다.
“자네들은, 이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노인, 로데벡의 질문에 레온나토스는 조심스레 답했다.
“부끄럽지만 상식 수준으로밖에 모릅니다.”
“말해보겠나?”
“제국이 대확장 전쟁으로 병력을 서쪽으로 돌린 사이, 아티스 국은 동쪽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병력을 추스른 제국군의 반격으로 아티스 국은 그대로 수도까지 함락당했다고-”
“제국에선 그리 가르치나? 얼마 안 되는 상식조차 처참하군.”
노인은 거친 숨을 뱉어내듯 말했다.
“하긴, 그게 승자들의 기억법이겠지. 똑똑히 기억하네만, 전쟁은 반격이 아니라 제국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네. 단숨에 만월강 상류를 점령해 치수를 망가뜨렸고, 운 좋게 전쟁을 피한 사람들도 심각한 기근에 죽어갔지. 물론 승자인 자네들은 이걸 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
“자네들의 목적은 알고 있네. 자네들, 결국 이 성을 정복하러 온 것 아닌가?”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전혀-”
“하지만 그럴 수 없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더글라스는 노인과 황자의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레온나토스는 아까 넘어갔던 노인의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로데벡 오라넬.
분명 신경 쓰였지만, 왜인지는 몰랐다.
황자로서 레온나토스는 제국 안팎의 유력자들의 성 씨를 대부분 외워뒀지만, ‘오라넬’이라는 성씨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레온은, 생각의 방향을 사교가 아닌 역사로 옮겼다.
아티스와 역사.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가니 하나의 기억이 잡혔다.
생각에 잠겨있던 레온나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명을 쓰셨군요. 어르신.”
레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오라넬’은 성씨가 아니라 이름이었어요. 아티스 국의 초대 국왕이 ‘오라넬 아티스’였으니. 굳이 초대 왕의 이름을 성씨로 썼다는 건, 어르신은 아마-”
“흥, 꽤나 아는 게 많은 아이군.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나라는 망했어도, 이 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어.”
멸망한 아티스 국의 왕족 로데벡 오라넬, 본명 로데벡 아티스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피리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흑옥으로 만들어진 피리. 악기로는 일상적이지 않은 재료인 만큼 눈에 확 띄는 소재다.
모두 검은색이라 눈에는 잘 띄지 않았지만, 피리에는 세로로 된 가느다란 흠집이 나 있었다.
“…어르신?”
후욱!
레온나토스가 부른 것과 로데벡이 피리를 힘껏 분 것은 거의 동시.
그리고, 흑옥으로 된 피리에서 난 소리는 김빠진 바람 부는 소리뿐이었다.
“…노인장. 지금 뭘 한겁니까? 그런 고장난 피리로는 연주도 못할 텐데요.”
더글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의 노인이 뭔가 할 줄 알았지만, 역시 치매가 온 건가 생각되는 행동.
하지만, 레온은 불안한 예감만 들었다.
“…그게 아니야. 더글라스 경.”
“네?”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만이 소리인 건 아니지.”
다독(多讀)한 레온나토스는 알고 있었다.
어떤 소리 들은 동물들만 들을 수 있고 사람은 들을 수 없다고.
실제로 사냥에서 개를 부를 때 쓰는 피리의 소리는 너무 가느다래서 사람이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아마 노인의 피리 역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노인이 피리로 무엇을 불렀는지, 그건 금방 드러났다.
…두두두두.
돌로 된 복도에서 미약한 진동소리가 울려퍼졌다.
수십, 수백이나 되는 발소리가 한 곳을 향해 달려오는, 질감마저 느껴지는 듯한 소리.
“어이, 노인장! 이건 대체-”
잠시 복도 건너편에 정신이 팔린 더글라스가 황급히 노인을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복도 끝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있었다.
노인은 복도 옆의 나무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닫고 나면, 황자들에게는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뭉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소란스럽군. 알아서 잘 해보게.”
-쿵.
노인이 들어간 문은 굳게 닫혔다.
*****
아렌과 발커스, 그리고 기사들은 지나간 망자들의 뒤를 쫓았다.
바닥에 인주자국처럼 이어진 붉은 발자국들이 얼마 가지 않아 희미해졌다.
연거푸 바닥에 도장을 찍으며 발에 묻은 피가 점차 닦여나갔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보다도 사방에서 합류한 망자들의 발자국이 피 묻은 발자국을 밟아 지워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망자들이 지나간 흔적만으로도 백은 훌쩍 넘는 숫자. 발커스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봐요, 아렌 공. 역시 계속 따라가는 것, 무리 아닐까요? 이대로 가다간…”
“가다간?”
뻔뻔하게 되물은 아렌에게 발커스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언제 다시 포위될지 모른다고요!”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요?”
“네?”
아렌은 아래로 이어진 발자국을 가리켰다. 갓 만들어진 발자국들은, 이미 복도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 어지러이 엉켜 있었다. 곳곳에 쓰러진 채 밟힌 시체들이 널려있는 건 덤이다.
“망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서 한 곳으로 향하고 있어요. 반면 우리는 세 무리로 흩어져 있죠. 제대로 합류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태라고요. 하물며 지금 망자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욱신.
“으윽…”
아렌은 말하다 말고 신음을 흘리며 오른팔을 끌어안았다.
“…아렌 공?”
“다친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 쑤실 뿐이에요.”
아렌은 흑옥 반지를 낀 오른손 검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성에 들어오고 난 후 왼손 검지에 통증이 느껴지자, 혹시나 싶어 반지를 바꿔서 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간헐적으로 오른손 검지가 통증이 느껴졌다.
특별히 반지가 꽉 끼거나 눌리는 것도 아니다. 손가락의 통증은 분명 흑옥 반지 때문이었다.
‘…뭔가, 반지에 영향을 주고 있나?’
사람을 홀리는 안개를 내뿜는, 멸망한 왕국의 폐허가 된 성.
하지만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니, 성안은 생각보다도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속적으로 청소라도 하는 듯.
‘망자들을 무언가가 움직였어. 그건 틀림없는데, 그게 뭐지? 성의 의지? 아니면 사람인가? 만약 망자들을 조종한 게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이 성안에 거주하면서, 모종의 수단으로 망자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사람의 목적이 무엇일까.
결코 좋은 목적은 아닐 것이다.
‘하, 설마하니 망한 왕국에 대한 복수심은 아니겠지.’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아렌은 대충 정답을 맞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