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동공이 비어있는 눈 수십쌍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젠장할.”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좁은 복도에선 십수 명이나 되는 기사가 검을 휘두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저쪽은 이성을 잃은 맨손의 집단. 지형의 이점은 오히려 기사들에게 있다.
물론, 저들이 한쪽에서만 달려든다는 전제 하에서.
“…발커스. 소란이 커지면 뒤쪽 복도에서도 언제 저들이 나타날지 몰라요.”
“나도 안다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망자들은 저들끼리 뒤엉키고 깔아뭉개면서도 끈질기게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마치 무수한 손과 발이 달린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이윽고, 기사들과 망자들의 전열이 맞붙었다.
-서걱.
기사들의 검은 망자들의 팔을 가지치기하듯 베어 넘겼다.
후두둑, 피와 함께 바닥에 잘려 나뒹구는 팔과 손가락들.
복도 안은 금방 진한 피 냄새가 자욱해졌다.
팔을 잃은 망자들. 기사들은 저항 없이 깊이 검을 찔러넣어 망자들의 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들이 엎어지자 뒤쪽의 망자가 앞 망자의 등을 밟고 덤벼들었다.
“…….”
몇 번 호흡할 만큼 짧은 찰나 스물 이상의 망자를 쓰러뜨렸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망자가 뒤에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들의 말이 일제히 줄었다. 말을 나눌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지만, 어쩌면 지금이 자신들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유쾌한 예감 때문이었다.
기사들과 동행했을 뿐, 전력이 되지 못하는 아렌은 그저 기사들에 방해되지 않도록 가장 뒤쪽에서 멀찍이 서 있었다.
혹여나 뒤쪽에서 다가오는 망자가 없는지, 이따금 뒤쪽을 확인하면서.
아렌 역시 복도를 가득 메운 망자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더럽게도 많군.’
성안에서 설마하니 이만큼의 망자들을 상대해야 할 줄은 몰랐다.
아렌은 지금이라도 기사 몇만을 미끼로 남겨두고, 나머지만 도망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렌의 머릿속에 문득 한 의문이 스쳤다.
‘…그런데, 왜 한 곳에만 저렇게 모여있는 거지?’
안개에 홀린 자들이 옛 왕궁을 지키려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애초에 사람을 홀리는 안개가 이상하기에 처음엔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망자들이 성 곳곳에 흩어져있는 게 아니라, 마치 한쪽 길목을 지키듯 모여있는 건 그냥 넘길만한 일이 아니다.
마치, 인위적인 무언가가 개입한 듯한 상황.
그리고, 이변은 한순간이었다.
움찔.
한순간, 모든 망자들의 행동이 일시에 멎었다가 일제히 다시 움직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망자들을 코앞에서 일일이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뒤에서 망자의 무리 전체를 시야에 담고 있는 아렌이기에 알아챌 수 있는 이변이었다.
망자들의 행동 역시 묘하게 달라졌다.
이전엔 기사들을 무리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앞으로 뻗은 손 역시 명백한 공격 의사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목적 없이 손을 뻗으며 앞으로 걸어올 뿐.
마치, 무슨 지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망자들의 급류를 막는 데 급급한 기사들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단지 눈앞에 있는 망자의 살을 갈라, 더 넓고 짙은 피의 강을 만들어내는 데 급급할 뿐.
‘…이대로는 끝이 없어.’
이미 기사들은 물러설 수 없다.
뒤돌아 도망친다 해도 망자들의 물결에 몇몇은 휩쓸려갈 테고, 설령 그들이 공격적이지 않아도 수많은 발아래 짓밟혀 구르면 무사할 수 없다.
아렌은 기사단장을 불렀다.
“발커스!”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지금 해야만 하는 이야기에요!”
“그게 대체 뭐길래!”
“옆으로 비켜야 해요!”
“…….”
순간 발커스의 맥이 탁 풀렸고, 빈틈없었던 검놀림 역시 순간 느슨해졌다.
양 옆에 있는 기사가 발커스의 빈틈을 보완했고, 그 사이 발커스는 아예 뒤로 물러났다.
허공에 검을 뿌리자 날에 흥건했던 핏물이 촤악 흩뿌려졌다.
“아렌 공! 내가 잘못 들었나? 벽 옆으로 비켜서자고 들은 것 같은데요!”
“제대로 들었네요.”
“미쳤어요? 지금 자살하자는 겁니까? 옆으로 비켜서면, 저놈들이 얌전히 지나가 주기라도 한답니까?”
“아마도요.”
발커스는 초조한 듯 전열을 곁눈질했다. 기사들은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른다.
“그 근거는요? 이 난리통에 점괘를 본 것 같지도 않은데.”
“지금은 한 발자국 뒤에서, 기사님들보다 더 많은 걸 봤다 정도로만 얘기해두죠.”
“지금, 전혀 설득 안 되는 거 알죠?”
“그럼 반대로, 이대로 계속 싸우면 무사할 수 있나요?”
“…….”
발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막 피를 털어낸 발커스의 검이었지만, 여전히 진득한 피와 기름이 묻어있었고 검날은 무뎌져 있었다.
기사들의 검도 마찬가지.
검의 예리함이 사라진 그 순간, 기사들의 운명도 거기서 끝이다.
“처음엔 우리가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옆으로 비키려면 여력이 있는 지금 뿐이에요!”
“그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냥 뒤로 쭉 달리면-”
“언제까지요? 망자들의 목적지까지요? 기약 없이 달리다 우리가 지치기라도 한다면 끝이에요.”
아렌의 말. 그리고 전열에서 다급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도망가든 전열을 도와주든, 얼른 결정해요!”
“…젠장할!”
발커스가 외쳤다.
아렌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발커스와 아렌의 입장은 점술자와 피술자의 관계.
그리고 한번 정립된 관계는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아렌이 위, 발커스가 아래인 관계. 먼젓번 점괘를 내리면서 정립된 관계는 지금 역시 유효했다.
발커스가 외쳤다.
“모두, 벽 양쪽으로 바짝 붙어!”
“……?”
지금도 필사적으로 망자의 벽을 갈아내며 버티고 있던 기사들이 의아해했다.
발커스는 한 번 더 외쳤다.
“이건 내 뜻이 아니라 비서관 아렌 공의 뜻이다!”
“…….”
그제야 옆 벽으로 바짝 붙는 기사들.
아렌의 이름은 기사들에겐 이미 발커스보다도 더 권위가 서 있었다.
싸우다 말고 조금씩 복도 옆으로 비켜 서는 기사들.
그리고 아렌의 말대로, 실제로 망자들은 기사들을 무시한 채 복도를 빼곡히 메우며 지나갔다.
망자들의 급류는 한동안 이어졌고, 그 행렬에 휩쓸릴 뻔한 기사도 몇 있었지만 가까스로 버텨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오래 버텨 체력이 떨어졌다면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지나가고 난 후, 복도에는 수많은 발에 짓이겨져 곤죽이 된 망자의 잔해와 기사들이 베어낸 손발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망자들이 지나간 복도엔 피를 인주 삼아, 발을 도장 삼아 찍힌 수많은 발자국이 카펫처럼 늘어서 있었다.
“…정말 지나갔어. 왜지?”
아렌의 말대로 따르면서도 반신반의했던 발커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렌을 돌아봤다.
“아렌 공은 어떻게 아신 거죠? 이번엔 점을 친 것도 아니잖습니까.”
사실대로 얘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아렌 자신도 제대로 모를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은 이상했다. 아렌은 적당히 퉁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뭔가 갑자기 번뜩였다, 정도로 이야기하죠.”
작은 것을 눈치챘다는 뜻이었지만 발커스는 아렌의 말을 오해했다.
‘…계시까지 본다고? 그건 마치-’
“…….”
꿀꺽.
긴장해 마른침을 삼킨 발커스와는 별개로, 아렌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향하던 망자들이 한순간 움찔, 하며 경직되던 순간을.
그건 마치,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따라가 보면 알게 된다.
아렌은 복도 너머로 이어진 핏빛 발자국을 바라봤다.
“이 발자국, 쫓아가 볼까요?”
*****
궁전의 입구에서 오른쪽 복도로 향한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 그리고 17인의 기사는 한동안 아무 저항도 없이 나아갔다.
아렌들과 마찬가지로, 예상외로 조용한 궁전의 모습에 기이함마저 느끼고 있을 때쯤.
기사들은 결국 제자리에 멈춰야만 했다.
“…….”
눈앞의 기이한 광경을 보며, 더글라스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하겠죠?”
“이것이 이상하지 않다면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 오히려 묻고 싶군.”
황자가 맞닥뜨린 건, 복도 한중간에 누워 늘어지도록 자는 노인이었다.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았기에 순간 망자인가도 했지만, 적어도 성 밖에서 마주친 망자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드르렁!
“…….”
“…….”
이런 식으로, 시원하게 코까지 고는 사람이 망자일 리 없으니.
노인은 이제는 형체를 알아보는 것도 버거울 만큼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한가지 옷만 수십 년을 입으면 그렇게 될까 싶을 만큼 거의 넝마 조각에 가까웠고 머리털과 수염 역시 정리하지 않아 온통 산발이었다.
굳이 다른 외형이 아니더라도, 왕궁 안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수상함이 도를 넘었다.
레온나토스의 눈짓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더글라스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검집 끝으로 노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여기, 이보쇼, 노인장.”
“…음냐음냐, 응? 자네들은 누구신가? 도적들이신가? 딱히 훔쳐 갈 건 없을 텐데?”
“도적이라니,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왜 여기 있지?”
“그야. 여기가 내 집이니 그렇지. 설마하니 지나가는 나그네인가? 그렇다면 환영해드리지.”
“…….”
“…….”
생각지도 못한 내용의 대답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거적때기를 망토처럼 뒤집어쓴 더벅머리의 노인은 구멍난 옷 안으로 몸을 긁으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누구요?”
“우리는 제국의 녹을 받는 병사들이고, 나는 기사 더글라스. 그리고 여기 계신 이분은-”
순간 고개를 젓는 레온나토스. 더글라스는 말했다.
“-그냥 적당히 높으신 분이시지. 그러니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추길 바라겠소.”
“…제국이라니, 셰오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중얼거린 노인.
대확장 전쟁을 통해 왕국이 제국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륙에 제국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셰오덴이란 국명은 거의 사어가 되다시피 했고, ‘제국’이라는 단어가 곧 나라를 뜻하는 말이 된지 벌써 수십 년.
눈앞의 노인은 생각보다도 더 오랫동안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건지 모른다.
아니면, 만월강 동쪽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것일지도.
“…그나저나, 여기까지 이렇게 많이 찾아오다니. 입을 막고 있어도 여긴 위험해. 돌아가는 길이라면 안내해줄 수 있는데.”
“아니, 그것보다 어르신께선 어떻게 멀쩡하실 수 있습니까? 입을 가리지 않고선 누구도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내가 더 궁금할 따름이지. 이따금 여기 들어오는 녀석들은 전부 얼마 못 버티고 눈깔을 뒤집는단 말씀이야. 처음엔 나도 입을 가렸는데, 답답해서 벗은 게 벌써 언제였더라?”
“…….”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해도, 본인이 모른다는데 추궁해봤자 소용없다. 대신 레온은 다른 것을 물었다.
“어르신. 혹시 이 성안에 도서관이 있습니까?”
“도서관? 아, 있지. 아홉 탑 중 하나가 통째로 도서관인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신다면 부디,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마뜩잖은 듯 눈썹을 찡그리던 노인은, 이내 구부정한 몸을 일으켰다.
“제국 사람이니 씀씀이도 크겠지. 변변찮은 사례면 각오하쇼.”
노인은, 뒤에 제국의 황자와 기사들을 주렁주렁 이끈 채 성의 복도를 어슬렁대며 걸었다.
마치 이곳이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양.
‘…하긴, 여기가 본인 집이라면 당연하겠지.’
속으로 쓰게 웃은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어르신. 그런데 여기 있으면 망자들이 공격하지는 않습니까?”
“망자? 아, 그 눈 까뒤집은 것들? 이곳의 주인한테 왜 공격하겠나?”
“…….”
노인만이 특별한 건지, 무언가 노인에게만 다르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레온이 쩔쩔매는 사이, 반대로 노인이 물었다.
“보아하니 꽤나 높은 사람이라고?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 이런 실례를.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전 레온이라고 합니다.”
“레온, 레온이라. 좋은 이름이군.”
“저, 그러는 어르신은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로데벡. 로데벡 오라넬일세.”
“네. 잘 부탁드립니다. 로데벡 어르신.”
예의를 차리면서도, 레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데벡… 오라넬? 어디서 들은 성이지?’
어렴풋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레온은 노인의 비틀거리는 발걸음 뒤를 기사들과 함께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