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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33화 (33/227)

#033화

저벅저벅.

“…….”

저벅저벅.

“…….”

안개가 자욱한 고요한 공간을 기사들이 걸어갔다.

들리는 건 단단한 군화 밑창이 돌바닥을 박차는 소리뿐.

아티스 국의 수도 아트레움 중앙의 섬에 떠 있는 듯한 왕궁과, 왕궁을 몇 겹이나 둘러싼 고리 모양의 섬으로 이뤄져 있었다.

원래는 포장돌로 촘촘히 다듬어져 있었지만, 오래도록 방치되어 지금은 비집고 올라온 잡초가 포장돌을 밀어내어 엉망이었다.

습기 자욱한 공기에, 호흡을 방해하는 젖은 마스크까지.

그리 험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기사들의 숨은 꽤나 거칠어져 있었다.

더글라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후우, 아렌. 우리가 몇 개째 다리를 건넜지?”

“셋? 아니 넷이었나? 어쨌든 그정도에요.”

“그뿐이라고? 세상에…”

더글라스는 안개 너머, 저 멀리 희뿌연 그림자로만 우뚝 서 있는 왕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왕궁을 향해 직선으로 걸으면 금방 도달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이에는 몇 겹이나 되는 수로들이 가로막고 있다.

결국은 수로를 따라 빙빙 돌며, 조금씩 접근해갈 뿐.

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로 사이를 연결한 다리들 중 성한 것은 몇 없었고, 고리 모양의 섬 역시도 수로가 범람해 곳곳이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침수된 정도는 발목 높이부터 가슴 높이까지 수심이 다양했고, 때로는 연결된 길이 없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왕궁의 반대 방향, 바깥쪽 섬으로 가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자신의 결정으로 기사단들까지 대동하게 된 레온나토스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길이 왕궁으로 이어져있는 건 확실하겠지?”

“그럴 겁니다. 해방전선의 부두목 핀이 직접 왕궁까지 가봤다고 했으니까요. 몇 개월 전이었다니 그사이 길이 침수되었거나 다리가 무너진 게 아니라면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이리 멀리 돌아가서야…”

짙은 안개 속에서도 저 멀리 윤곽으로 보이는 왕궁을 두고, 그 주변만 빙글빙글 돌고 있으니 조바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개가 가장 옅은 시기인 정오도 지났고, 사방이 수로인 아트레움 안은 실로 사방이 자욱한 안개였다.

그리고, 이제는 길을 찾아가는 것만이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봐. 또 다가온다.”

“젠장. 끝이 없구만.”

으어어어, 입을 헤 벌린 채 침을 흘리며 다가오는 망자들.

하지만 그들은 무기도, 방어구도 없이 맨손이었다.

움직임도 느릿해, 온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발커스 옆에 있던 기사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가죽장갑을 낀 주먹으로 망자의 턱을 후려갈겼다.

-퍽. 망자는 한방에 고꾸라져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발커스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역시 전하께서는 먼저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앞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글쎄. 자네들끼리만 들어가 원하는 책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러하겠지만, 그럴 수 있나?”

“그건…”

“레밍이 책을 잘 안다지만, 혼자선 힘들 걸세. 레밍은 눈이 불편하니 더더욱 그렇지. 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많을 수록 좋을 거야. 마침, 나는 책에 대해 잘 알고.”

“…….”

“뭐가 걱정인가. 자네들의 믿음직한 호위가 있는데.”

레온나토스의 믿음이, 오히려 속이 타는 발커스였다.

황자의 몸에 실낱같은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기사단의 절반이 죽을 수 있다는 점괘는, 레온나토스의 호위의 난이도를 부쩍 높여버렸으니까.

그렇기에 기사들의 표정은 한층 더 비장했고, 아렌의 옆에 있던 더글라스가 소곤거렸다.

“솔직히 말해, 발커스라는 기사는 좀 뺀질거리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사과해야겠군. 저렇게 진심으로 전하를 지킬 줄이야.”

“그렇죠? 원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법이죠.”

아렌은 태연하게 말했다.

*****

그 후로도 기사들의 행군은 계속됐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다리를 건넌 것도 열 번이 넘자 횟수를 기억하는 것을 관뒀다.

수로와 수로 사이, 반지 모양의 섬을 몇 번이고 오가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안개 너머의 왕궁이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몇번은 더 섬을 건너가야 했지만. 기약 없는 행군이라 생각한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그리고, 망자들이 꽤나 본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전하! 어서 중앙으로!”

“모두, 전하를 지켜라!”

기사들은 더이상 주먹을 쓰지 않고, 그 대신 칼집을 씌운 검을 들었다.

아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사들이 칼집을 휘두를 때마다 다가오던 망자들이 픽픽 쓰러졌다.

다소 부상을 입었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젠장! 그러니 다가오지 말라고!”

적을 베는 데는 익숙하다. 하지만 안개에 홀려 조종당하는 망자들을 선뜻 베어버릴 마음은 누구도 들지 않았다.

기사단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은 어느새 스물을 넘어 서른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 문제되는 숫자는 아니지만.

더글라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발커스 경. 눈치챘습니까?”

“네. 바깥쪽 망자들보다 더 세고 빠르군요. 빌어먹을.”

움직임도 느릿하고 힘도 없었던 바깥쪽의 망자에 비하면, 안쪽의 망자는 걷는 속도도, 힘도 일반인 수준으로 보였다.

당장 문제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만약 저들의 힘과 속도가 더 빨라지고, 숫자가 많아진다면 어떨까.

닥쳐올 게 뻔한 미래에 기사들이 조바심을 느끼던 그때였다.

“-앗!”

망자들을 검집으로 후려치던 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물론, 망자의 공격이 기사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 수의 망자로는 기사의 갑옷을 절대 뚫지 못한다. 몇몇 노출된 부분은 있지만 그걸 떨칠 실력도 있다.

하지만.

“마스크가 벗겨졌어!”

다가오는 망자를 연거푸 쳐내는 사이 기사의 등 뒤에 망자 하나가 달라붙었고, 그를 떨쳐내려던 중 망자의 손가락에 마스크의 매듭이 풀린 것이다.

당황한 기사는 안개를 깊이 들이마셨다.

“-당장 숨을 멈춰!”

순식간에 달려온 더글라스가 몸을 부딪쳐 망자를 널리 날려 보내며 외쳤다.

뒤늦게 숨을 참은 기사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를 얼른 고쳐 썼다.

하지만, 이미 폐 안에 들어온 숨은 어쩔 수 없었다.

“어이, 괜찮아?!”

“…아직은 괜찮습니다, 더글라스 경.”

하지만 안개를 들이마신 기사의 손은 이미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렌은 핀의 말을 떠올렸다.

‘어쨌든, 들어가서도 예의주시해야 할 거야. 마스크를 대충 썼거나 안개에 잘 홀리는 체질이거나, 증상이 느껴지면 홀리기 전에 곧바로 나오라고.’

전조 증상은 몸의 말초 부분,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부터 저려오기 시작하는 것.

진행속도가 모두 같진 않을 테니, 저림 증상이 생긴 인원부터 먼저 돌아가기로 기사들과는 이미 합의해둔 상태였다.

아렌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기사님은 돌아가시죠. 혼자서 보낼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안 좋은 듯한 사람 두 분이 동행해주시고요.”

기사들 몇몇이 담담하게 손을 들었고, 밖으로 나갈 3인이 빠르게 결정됐다.

한번 안개에 홀려본 적 있었지만, 뭣도 모르고 홀렸던 예전과 지금은 다르다.

불안해할 법도 하지만, 남는 기사도 나가는 기사도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렌이 한 점괘 때문이었다.

“모두 침착하고 아렌의 점괘를 떠올리도록. 질서를 지키고, 담대하게 나아간다면 우리에게 별 탈은 없을 것이다.”

“…….”

기사들을 독려한 레온나토스 역시 아렌의 점괘에 꽤나 의지하는 모양새.

아렌은 마음이 복잡했다.

‘어쩌면 사기꾼은 내 적성에 안 맞을지도…’

기사들의 사기는 유지되었지만, 그들의 무한 신뢰는 그만큼 아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

이제 왕궁은 다리 몇번만 건너면 될 정도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동시에 안개는 더욱 짙고 무성해져 있었고, 은근히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사방에서 뿌려지는 피보라 때문이었다.

서걱.

사방에서 생살을 자르고 뼈를 끊는 소리가 이어졌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망자들. 기사들은 진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사로 이뤄진 두꺼운 벽 안에서 레온나토스는 표정을 굳혔다.

“미안하군… 어쩌면 나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핀은 한번 깊게 홀린 사람은 더는 되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지만, 맨손으로 달려드는 양민들을 죽이는 건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기에, 기사들은 마치 학살이라도 벌이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레온나토스의 몸에 혹여 생채기라도 날까 필사적인 건 매한가지.

혼란스러운 와중, 기사들은 왕궁으로 이어진 마지막 다리를 건넜다.

주위가 원형의 해자로 몇 겹이나 둘러진 왕궁, 아홉 탑의 궁전.

“…여기가.”

눈앞의 성을 보고 레온나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국의 황궁보다는 좁지만 안개로 인한 흐릿한 윤곽이 더해져 더 큰 위압감이 전해졌다.

마음 같아선 샅샅이 살펴보고 싶었지만, 기사들에게 그리 많은 시간은 없었다.

기사들과 아렌이 아홉 탑의 궁전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욱신.

‘…?’

아트레움 초입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왼손이 시큰거렸다.

순간 홀리는 초기 증상인 손저림인 줄 알았지만, 통증은 손끝이 아니라 정확히 반지를 낀 왼손 검지에만 있었다.

‘…왜지? 여태껏 이런 적 없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궁전을 향해 다가가면서 아렌은 반지를 슬쩍 벗어 검지 손톱 부근까지 내렸다.

그러자, 검지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끼자 시작되는 통증. 여태껏 반지로 인해 손가락이 아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연인가? 반지를 벗으면 괜찮으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

굳이 끼고 있을 필요도 없다. 잠시 벗고 있으면 그만.

하지만.

“…….”

아렌은 조용히 다시 반지를 끼었다. 검지의 통증은 미약하지만 지속해서 남아있었다.

‘마녀니 드래곤이니, 아까는 그저 농담으로 넘겼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렌은 한번 죽은 뒤 20년 전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허풍이나 사기,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겼을 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지.’

일곱 탑의 궁전, 열린 성문 근처엔 망자가 없었다.

그리고 성의 왼쪽과 오른쪽, 중앙 복도로 이어진 세 갈래의 길.

효율적인 수색을 위해 기사들은 셋으로 갈라지기로 했다.

하나로 뭉치면 수색의 효율이 급감하고, 두 갈래로 나뉘는 건 기사들이 극도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우선은 도서관이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집결지는 이곳 중앙 홀로 한다. 아무리 늦어도 1시간 뒤엔 이곳에 오도록.”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가 한 조, 레밍과 기사단 부단장이 한 조, 아렌과 기사단장 발커스가 한 조로 묶였다.

아렌과 같이 움직이게 된 발커스에게 아렌이 물었다.

“발커스, 괜찮겠어요? 전하 곁에 안 있어도?”

“하는 수 없죠. 이런 곳에선 나보다도 더글라스 경이 호위로 더 확실할 테니까. 기사를 지휘할 사람이 각 조당 하나는 있어야죠.”

반쯤 맹인인 레밍과 부단장의 조가 가장 전력이 약했고, 그들은 중앙 홀에 금방 올 수 있는 중앙 복도로 향했다.

“복도가 좁아요. 이런 곳에선 많은 숫자보다 지금 숫자가 딱 적당하겠죠.”

기사들은 열다섯 내외로 나뉘었고, 발커스와 아렌이 앞장섰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전 분명, 이 안에 망자들로 바글바글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죠?”

복도는 어두울 뿐 한적했다. 그대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았지만.

“…….”

“…….”

아렌과 발커스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서야만 했다.

발커스는 습한 공기에 걸맞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렌 공.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아요.”

복도 너머, 한곳에 우글우글 모인 망자들.

기사들에서 등을 돌린 채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자연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도열처럼도 느껴지는 움직임.

천천히, 기사들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긴장이 화가 되어, 누군가의 전투화 밑창이 습기를 머금은 바닥에 미끄러졌다.

-끼긱!

휘릭. 벽을 향한 수십 명의 망자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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