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망자라고? 지금 농담하나?’
하지만 대답하는 핀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저도 모르게, 아렌이 그 말을 경청하게 될 정도로.
“수도 주변의 안개에 오래 노출된 녀석들은, 무슨 꿈을 꾸는지 깊이 잠들어 깨지 않는단 말야. 그리고 왕궁 주변의 녀석들 중 몇몇은, 마치 왕궁을 지키기라도 하듯 다가오는 녀석들을 공격하지.”
“…그런 곳에 우릴 보내려 했다고? 아무 말도 없이?”
“아무 말도 없다니. 지금 말해줬잖아? 무력도 충분하고, 안개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지도 않았고. 잠입하는 데에는 너희만큼 적격이 없어.”
“그것부터 이상해. 너희나 우리나 천으로 입을 가리는 건 같은데 어째서 우리만 멀쩡하리라는 걸 아는 건데?”
“왜냐면, 내가 직접 해봤으니까.”
“…”
실제로 핀은 날랜 몇몇을 데리고 만월강을 건너, 만월강 서부에서 몇 주 묵으며 동부의 안개 독기를 빼낸 적 있다고 했다.
그 후 다시 강을 건너 궁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동부에서 충분히 독기를 빼낸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 버텼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여기서 나고 자란 이상 안개의 독기가 만성적으로 스며들어있었던 모양이지만 말야. 또 숫자가 너무 적어 궁전을 지키는 망자들을 뿌리칠 수도 없었고. 나도 슬슬 반응이 오는 것 같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
“우리가 안개에 노출된다면, 얼마 정도 지나야 홀리지?”
“그것까지는 몰라. 시험해본 적도 없고, 그럴 겨를도 없어서. 말했다시피 우리들은 마스크를 써도 오래 버틸 수 없어서 말야.”
즉, 기사단이 얼마나 노출되어야 홀리는지의 기준은 없는 것이다.
‘마스크를 벗는 순간 위험하다고 여기는 편이 낫다 이건가?’
“그걸, 나한테만 알려주는 이유는?”
“내가 모두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네가 직접 필요한 만큼 알려 주는게 나을 것 같아서. 네가 황자잖아?”
“…….”
“뭐야, 왜 그런 눈을 해? 아직도 황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거야? 하지만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냐. 모두가 네 눈치를 보던데? 저기 앉아있는 황자라는 녀석조차 말야.”
핀의 눈이 옹이구멍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말엔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실제로 일행의 결정 상당 부분은, 아렌에 의해 정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렌, 여기서 혼자 뭘 하냐. 해방전선의 핀이라고 했나? 우리 비서관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나?”
홀로 떨어져 있던 아렌에게 다가온 근위기사 더글라스.
마치 아렌을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핀과, 그의 오해가 더 깊어졌음을 느낀 아렌.
“용무는 방금 끝났어. 그럼 아렌, 난 확실히 전달했다? 알아서 잘 말해봐.”
멀어지는 핀.
“응? 저 녀석, 무슨 말했냐?”
“…네. 대충.”
망자에 대해 이야기하느냐, 하지 않느냐.
어느 쪽을 택하든 나름의 이유는 있다.
이쪽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망자들을 함부로 말했다가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문제.
반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궁전 안에서 갑자기 달려드는 망자에 당황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는 일이지.’
일행 전체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다.
결국 어느 정도로 공개하느냐를 선택하는 건 아렌의 몫이라는 것.
사람을 홀리는 안개도 무서운데, 홀린 자들중 일부가 왕궁을 보호하듯 행동한다는 건 더욱 소름 끼친다.
마치, 안개에 어떤 의식이라도 있는 듯하니까.
‘하지만, 차라리 다행일지도.’
아렌이라면, 이런 것을 유하게 다룰 수단이 있었으니까.
“더글라스. 모두 불러주시겠어요?”
“…어. 그러지.”
동굴 곳곳에 흩어진 일행을 불러모으러 간 더글라스와 역시 황자 아니냐는 듯 멀리서 눈을 빛내는 핀.
“핀,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좀 더 떨어지시죠.”
“…쳇.”
*****
레온나토스돠 더글라스, 레밍과 기사단을 대표해 발커스까지.
아렌을 포함한 다섯이 동굴의 으슥한 곳에 모였다.
여기라면 지금 나누는 말이 아티스 해방전선의 귀에 들어가지 않겠지.
우선, 중요한 이야기이니만큼 아렌은 핀에게서 들은 모든 사실들을 일행에게 공개했다.
“…그러니까 왕궁 근처에서 홀린 자들은 망자가 되어 마치 왕궁을 지키듯 행동한다, 이 말인가? 우리는 그들을 상대해야 하고?”
“네. 핀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우릴 속일 이유는 딱히 없으니 아마도 사실이겠죠.”
“해방전선 두목이라는 자가 왜 기사 절반만 데려가라고 했는지 알겠군. 숫자가 많아지면 손이 엉킬 수도 있어. 게다가…”
레온나토스는 한가지 가능성을 더 염려했다.
안개에 취하는 것이 단시 정신을 놓는 것뿐만 아니라, 아군을 적대하는 상황으로까지 간다면.
혹독한 훈련에 매일같이 단련된 자들이 한순간에 적으로 돌아서면 얼마나 까다로울지, 기사단장인 발커스는 알고도 남았다.
좌중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론, 아렌은 그 분위기를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다.
아렌은 카드를 펼쳤다.
“그러니, 점을 보겠습니다. 너무 신뢰하기보다, 일종의 위안이라 여기는게 나을 테지만요.”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아렌의 점을 경험했고, 점괘를 꽤나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
물론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점괘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나왔는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비난의 화살은 곧장 아렌을 향할 테니까.
특히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모르는 위험지역에 향하는 지금같은 경우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기를 높이는 게 우선이야.’
망자에 대해 숨기는 것도 애초에 논외. 망자에 대해 알리면서도 모두의 사기를 높여야 했다.
공교롭게도 지금 기사들은 아렌의 점괘에 대해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는 상태.
황자 레온나토스를 지키려는 이유 역시 아렌의 점괘 때문이니 말 다 했다.
‘덕분에, 일이 쉬워지겠어.’
마침 주변은 어둑하고, 광원은 더글라스가 들고 있는 횃불이 전부였다.
점괘에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한 장치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죠.”
충분히 섞은 카드 뭉치를 엎어놓은 다음, 아렌은 위에서부터 세 장을 엎은 채 동굴 바닥에 늘어놓았다.
카드를 바닥에 놓는 손길 역시 평소보다 좀 더 화려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주변 분위기 때문일까, 아렌의 점술은 동굴 속에서 한층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따로 빼낸 세 장의 카드를 뒤집은 아렌.
늘어선 세 카드는 각각 ‘늘어선 다섯개의 별’과 ‘개선하는 장군’, 그리고 ‘빛’ 카드였다.
“빛 카드는 또 보는군. 꽤나 드문 카드라 들었는데.”
이번에는 카드를 골라 뽑지 않았다. 자주 쓰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거니와 굳이 조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하는 점괘로 끌어낼 수 있으므로.
“우선 개별적으로 해석하겠습니다. 늘어선 다섯 개의 별은 넓은 시야와 질서, 고결함을 상징하지요. 개선하는 장군은 승리와 환희를, 빛 카드 역시 포괄적인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오오, 그렇다면!”
레온나토스 뿐 아니라 모인 다른 사람들 역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견 아렌의 예상대로였지만,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니다.
‘…아니야.’
처음 생각은 단순히, 좋은 내용의 점괘로 모두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카드가 연달아 나오자, 도리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점괘가 빗나갔을 때의 해로움, 은 지금 오히려 고려하지 않았다.
‘…모두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 이게 최선인가?’
아렌의 안에서 대답은 나왔다.
그렇지 않다.
“너무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앞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카드 세 장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일견 좋아 보이지만,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경계해야 할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그 말인즉?”
“가령 ‘개선하는 장군’은 앞서 말한 두 의미 외에도 자만한다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늘어선 다섯 개의 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결함은 많은 경우 긍정적인 요소이지만, 때로는 땅으로 내려와 흙탕물을 뒤집어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세 장으로 보는 점에서 모두 좋은 카드라면 오히려 경계해야 합니다.”
한순간 들뜰 뻔했던 공기가 삽시간에 다시 내려앉았다.
레온나토스는 고민했다.
“그렇다면 점괘의 뜻은… 자만하지 말며, 고결함을 멀리하라?”
“좋은 쪽의 해석이라면 질서를 유지한다면 종국에 승리해, 환한 빛과 함께일 수 있지요.”
“…역시 어느 쪽 해석인지는 모르나?”
“미래를 엿보는 데에 확실한 해답은 없지요. 세상 대부분의 일은 동전처럼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좋아.’
아렌의 계획 대로였다.
일행들은 긴장감의 끈을 놓지는 않은 채 그리 겁을 먹지는 않은, 최적의 마음가짐이 되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질서가 중요할 테니, 아렌의 점괘를 가슴속에 새긴다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트레움의 아홉 탑의 궁전의 상태뿐이었다.
*****
다음날. 해가 가장 높이 뜬 정오, 기사들은 다시 한번 아티스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 아트레움으로 향했다.
해방 전선의 안내원은 점점 더 영향을 받기에 도중에 돌아가야 했다.
밤중 만든 천 마스크로 입을 꽁꽁 싸맨 기사들. 말은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여러 사태에 대비해 말은 둔 채 행군했다.
왕국의 옛 수도가 보이는 언덕 위, 레온나토스는 저 멀리 반쯤 물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폐허로 변하다니.”
“네. 아름답군요. 동시에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요.”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도 아트레움은 동심원으로 흐르는 여러 겹의 수로와 그 사이의 고리 모양으로 분리된 섬, 섬 사이를 연결한 수십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다리 대부분은 무너져 있어, 왕궁이 있는 섬 한중간으로 들어가기는 그리 쉽지 않아보였다.
기사단장인 발커스도 난색을 표했다.
“…구조가 쉽지 않은데요. 수로를 몇 개씩이나 건너야 하는데, 다리 대부분이 끊겨있으니. 자칫하면 한칸 앞으로 건너기 위해 수로를 거의 반 바퀴 돌아야 할 수도 있어요.”
규모가 너무 크다는 점만 빼면, 미로나 마찬가지인 지형.
하지만 이미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다.
제방의 흔적에서 내려와 수도를 둘러싼 첫 번째 수로로 접근한 기사들.
천으로 입을 막지도 않은 채, 안개에 홀려 주변을 유유히 배회하는 유민들이 보였다.
“…….”
그들은 한껏 벌린 입을 숨기지도 않은 채, 흰자를 훤히 들어내며 주위를 비틀비틀 걸어 다녔다.
아직은 기사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꺼림칙하지만, 애써 여유로운 척 더글라스가 말했다.
“…재밌네. 들어가면 갈수록 저런 자들이 더 많다 이거지?”
“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쪽을 공격해오기 시작하겠죠.”
아렌의 대답.
그리고, 안개에 홀린 자들의 실체를 처음 제대로 본 기사들의 사기는 한껏 내려갔다.
“…저게 망자라고?”
“우리도 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기사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사람을 홀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섬 중앙에 있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의지로도 느껴졌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더글라스가 말했다.
“그거 말인데. 소문으론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망한 왕국의 궁전에 둥지를 틀었대.”
“더글라스 자네도? 난 다른 소문도 들었는데. 내가 들은 건, 수백 년동안 살아남은 마녀였어.”
더글라스와 레온나토스의 말.
그 의도를 알면서도 아렌은 불쑥 물었다.
“재밌네요. 용이니 마녀니. 그런 게 있다면 좋겠네요.”
더글라스는 피식 웃었다.
“해가 사라지는 걸 예견하는 녀석도 있는데 뭐가 없겠어?”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다.
실없는 소리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사들은 레온나토스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싸 보호한 채 왕궁을 향해 걸어갔다.
수로와 수로 사이, 반지 모양의 섬은 원래 그 폭이 50m는 족히 되었겠지만, 수로의 물이 불어 가장자리 몇 미터씩은 이미 물에 잠식된 뒤였다.
‘…전생에도 못 해 본 이런 모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어이없음을 느끼며 걸어간 아렌.
-욱신.
“……?”
어쩐지 왼손 검지가 조금 욱신거렸다.
‘…피곤한가?’
왼손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계속 나아가는 아렌.
왼손 검지엔, 흑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