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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31화 (31/227)

#031화

‘선제 브륀할트 7세는 저 안개에 대해 알고 있나?’

제국에 의해 완벽히 치수되고 있는 만월강 서쪽의 안개는 동쪽만큼 심하지 않았고, 당연히 안개에 홀리는 사례도 없었다.

아트레움 주변의 안개가 사람을 홀리기 시작한 건 수도가 물에 잠긴 직후.

선제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기에 아트레움을 물에 잠기게 했는지, 혹은 안개에 피해가 발생해 그대로 국경을 만월강으로 후퇴시킨 것인지는 모른다.

정황상 브륀할트 7세가 안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건 무리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이쪽은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저들도 그것까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목. 이놈들이 그걸 알았다면 그렇게 얼빠진 채 안개를 들이마시진 않았을 거야.”

“후우, 알아주니 다행이군. 그런데 해방 전선, 이라 했나? 우리를 여기로 불러낸 이유가 있을 텐데?”

“물론이지.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렌도 궁금했다.

황자만이 목적이었다면, 방금 전이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안개에 취한 기사들을 전부 죽이고 황자만을 납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먼저 너희가 왜 여기로 왔는지 더 궁금한데.”

“우리의 목적은 국경의 소요사태를 해결하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우리 때문이라는 거군. 그 정도로 신경 쓰였나, 우리가? 지금까지는 사전 연습이었는데.”

“…….”

국경의 초소 하나를 홀랑 불태운 게 사전 연습이었다면, 호전적인 가웨인 황자가 들어왔다면 유혈사태를 피하지 못했을 거다. 실제로도 가웨인 황자는 이 국경에서 큰 교전을 연거푸 치르며 전공을 세웠으니까.

‘이 자들 입장에선 우리가 온 게 다행일지도.’

두목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황족이라면 안개의 비밀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듣지 못하겠군.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너희가 아홉 탑의 궁전으로 들어가 줬으면 한다.”

“…아홉 탑의 궁전?”

아홉 탑의 궁전. 아트레움의 중앙에 있는, 버려진 성의 이름이었다.

그곳에 왜 들어가냐보다도 자연스레 먼저 나오는 의문이 있었다.

“왜 우리지? 너희가 아니라?”

“우리에겐 힘들기 때문이지. 이 주변 사람들은 안개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고, 안개의 독성은 성에 다가갈수록 더 짙고 강해져. 우리가 아무리 싸매고 들어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지. 하지만 너희 외지인들은 다르다.”

“방금, 우리가 안개에 홀렸다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천으로 입을 막자마자 곧바로 회복했지. 우리라면 회복하는데 훨씬 시간이 더 필요했을 거다.”

“…….”

적어도 해방전선의 두목, 파투스의 말에 딱히 허점은 없어 보였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거기에서 찾아야 하는 건?”

“이 안개에 대한 단서. 아마 아티스의 왕족들은 지금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겠지. 책이나 문서나, 어떤 형태로든 단서가 남아있을 거다.”

“책!”

파투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밍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물론 안대 때문에 주위에 보이진 않았지만.

“왕국이 멸망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들도 같이 실전되어버렸다. 어째서 수도 근처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왕국의 도서관에 해답이 없다면 어디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겠지. 하지만 우리는 궁전에 접근할 수 없어. 안개가 가장 옅은 한낮에도 말야.”

“…궁전 안쪽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추측은 없어.”

“으음…”

레온나토스가 고민하던 그때.

기사단장 발커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이, 너희들 감히 너희들이 전하께 이래라 저래라-”

“맡도록 하지.”

“전하?!”

레온나토스의 결단은 빨랐다.

“미안하네, 발커스 경. 저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저 궁 안에 해답이 있다면 기꺼이 돕고 싶어. 저들이 겪는 고초는 선제 폐하, 내 조부님께서 행하신 일이니까. 또한 일이 해결된다면 저들도 국경에서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까.”

“전하. 하오나-”

기사들은 당황했다.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곳에 황자를 혼자 보낼 수도 없었다.

점괘대로라면, 황자가 다치면 자신들 역시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사들은 눈을 질끈 감았고, 발커스가 대표로 말했다.

“그럼, 저희들 중 누군가가 대표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오니-”

“아니, 내가 직접 가겠네.”

“전하! 아니 될 말씀입니다!”

“내 고집으로 시작한 일. 자네들만을 위험한 곳에 보내고 혼자 안전할 수는 없네.”

‘정론이군. 물론 아래 부하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자신의 주군이 저렇게 나서는 이상, 부하들 역시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물론, 레온나토스가 단지 이타적인 기분만으로 저러는 건 아니었다.

‘폐허가 된 옛 왕국의 수도. 그 안에 도사린 비밀이라니. 거기에 폐허가 된 도서관. 꽤 구미가 당기겠지.’

그리고, 여기 그런 자가 또 하나.

“저, 저도 보내주십시오!”

번쩍 손을 든 레밍.

그걸 본 파투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보아하니, 장님인가? 거긴 너 같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녹록한 곳이 아닐 텐데.”

“아니, 목적지가 도서관이라면 분명 레밍은 도움이 될 걸세.”

레온나토스가 레밍을 두둔했다.

‘아, 그렇지.’

아렌이 물었다.

“혹시 레밍이 기억하는 책 중에는 없어요? 아티스 수도의 비밀이요.”

레밍은 안대를 한 눈을 비스듬이 위로 향했다.

허공에서 투명한 책의 책장을 훑어보듯 하며, 서가의 장서 목록을 펼치듯 손가락을 연신 까딱이는 그.

“으음… 제 기억 속에는 없군요. 애초에 아티스 국에 대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아서, 제가 읽은 건 대략 스무 권 정도뿐입니다. 이 스무 권 안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트레움의 도서관에서도 그런 중요한 정보가 서가에 아무렇게나 꽂혀있지는 않을 겁니다. 원래 정말 중요한 책은 열람실에 두지 않는 법이죠.”

“-어때요?”

“…제국 놈들은 꺼림칙한 놈들뿐이군.”

파투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궁전으로 향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발커스도 자포자기한 듯 외쳤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전하가 가신다면 우리도 간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부두목인 핀.

“가보면 알겠지만, 그만한 인원을 운용할 만한 공간이 아니야. 기사들은 절반만 향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움찔.

핀의 말에 기사들의 몸이 일제히 굳었다.

아렌은 알 것 같았다.

‘내 점괘 때문이군.’

황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기사단의 절반이 죽는다, 는 점괘.

그리고 하필 우연히, 절반만 가는 게 낫겠다는 핀의 말.

아티스의 왕궁에서 무슨 일이 생겨 황자와 동행한 절반의 기사단이 몰살하는 그림이 곧바로 그려졌다.

‘…하지만 누가 남을지 정하는 건 어렵겠지.’

그 점괘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 해도, 누가 남고 누가 들어갈지를 결정하긴 힘들 것이다.

기사단원들 사이 흐르는 불온한 공기를 읽은 발커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모두 가겠습니다. 황자 전하의 몸에는 티끌 하나만큼의 상처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가고 누군가 남아 점괘대로 되는 그림을 만들어줄 바에야, 차라리 모두가 운명 공동체가 되어 필사적으로 황자를 지키겠다는 태도.

그걸 본 두목은 순순히 감탄했다.

“역시, 제국은 제국이군. 기사들의 충성심이 저토록 높다니.”

착각도 자유다.

*****

궁전에 향하는 건 안개가 가장 옅은 다음 날 정오.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오늘은 동굴 안에서 하루 쉬어야 했다.

다행히 거대한 종유동굴 동굴 안은 기사들이 모두 발 뻗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레온나토스 일행을 돌봐주는 건 부두목인 핀이 맡았다.

레온이 물었다.

“동굴 안에서는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그래. 들어오는 안개를, 입구의 불로 전부 날려버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핀은 여전히 복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저들로선 굳이 얼굴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레온나토스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안개라. 그렇다면 공기가 아니라 수분이 문제인 건데.”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기 위해 왕궁 도서관에 가는 것이지만, 레온나토스 역시 자기 나름대로 해답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왕궁으로 갈수록 안개의 독성이 강해진다는 건, 그 원인이 왕궁에 있다는 뜻이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아렌이 말했다

“수도가 물에 잠긴 후 생겨난 증상이고, 안개가 짙을 때 더욱 잘 일어난다는 건 무언가가 물에 녹아 스며들었고, 그게 공기 중 수분을 타고 묻어나왔다 보는게 맞을 테니까요.”

아렌은 아티스 국의 유민들을 떠올렸다.

아트레움을 향하면서 몇 명이고 지나쳤던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천으로 입을 꽁꽁 매고 있었다.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그들이 그때는 무뚝뚝하고 기이해 보였지만, 이제는 달리 보였다.

기사들에 대답해 조금이라도 더 안개를 들이마실 가능성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쨌건, 천으로 입을 막는 것만으로 증상을 막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소식입니다.”

동굴 안의 횃불을 빛 삼아, 모두 여분의 옷을 이용해 입을 가릴 수 있는 마스크를 만들고 있었다.

아티스의 왕궁에 들어서고도 여기 올 때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부두목 핀이 몰래 다가왔다.

핀은 여전히 아렌을 진짜 황자라 오해하고 있었다.

“어이, 황자. 자기 것도 스스로 만드는 거야?”

“…황자?”

“그래그래, 알았어. 연기 한번 제법이네.”

“…….”

핀은 익살스레 중얼거린 뒤 진짜 황자, 레온나토스를 흘깃 바라보고 말했다.

“사실은 저기있는 ‘황자’를 대신 보내고, 넌 안 가려던 거지?”

“아니? 나도 갈 건데?”

아렌의 말에 핀은 눈을 크게 떴다. 아마 복면 안쪽의 얼굴 역시 놀란 얼굴이겠지.

“…아니, 대체 왜?”

“이유가 필요하나? 그보다 할 말이 뭐야?”

50명의 기사가 동굴 곳곳에서 횃불에 의지한 채 입을 가릴 마스크를 만들고 있는 건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핀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기사들 모두 궁전에 들어갈 셈이야? 저 안을 너무 쉽게 보는 것 같은데. 왜 기사들 절반만 보내라고 했는지 모르겠어? 전부나 몇 명이 아니라 절반만?”

“…그러고 보니.”

안이 딱히 위험하지 않다면 많이 몰려갈 필요가 없다.

반대로, 너무 많다고 숫자를 줄이라 할 필요도 없었다.

아티스 해방 전선의 두목 파투스는 심지어, 기사단 전원이 들어간다 했을 때 감복하기까지 했었다.

“우리 두목은 말야, 저쪽이 당연히 알 거라고 여기고 넘어가는 버릇이 있다고.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두목이 말 안 하고 넘어간 게 뭐길래?”

“사실은 사기가 떨어져서 대놓고 할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핀은 주변을 둘러본 뒤, 아렌 귀에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처음엔, 아렌은 농담인 줄 알았다.

“조심해. 아홉 탑의 궁전은 망자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

하지만 복면 위 드러난 핀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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