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향하도록 하지. 어차피 국경의 소요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강을 건너야 해. 위험하다고 몸을 사릴 것이었다면 폐하의 명을 받지도 않았어.”
황자의 결정. 거기에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
만월강 유역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강 주변의 안개가 조금 걷혔다.
국경기지 앞, 경비대가 관리하는 몇 없는 석조다리를 지나 황자와 기사단은 만월강을 건넜다.
만월강 동쪽을 조금 달리자마자 느낀 것은, 강과 땅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만월강에서 흘러나온 지류는 수십 갈래로 나뉘어 어지러이 땅 위를 흘러다녔고, 물러진 땅은 말의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었다.
“…저기 고지대로 올라가지.”
레온의 명에 따라 예전에 있던 제방의 흔적에 올라선 기사단.
상대적으로 고지대라 땅은 단단했지만, 그곳 역시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아 곳곳이 무너져있어 길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제방 아래, 평야는 지나오면서 봤던 만월강 서쪽 유역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잘 정돈된 곡창지대였을 그 땅은 수십 년간 범람에 노출되어 늪처럼 질척였고, 마치 태고부터 그런 땅이었던 듯 사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월강 서쪽보다도 더욱 짙어진 안개와 더불어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레온나토스는 탄식했다.
“…만월강의 동과 서가 이렇게나 다르다니.”
하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주변의 정보를 모으며 기사단은 아티스의 수도였던 아트레움으로 향했다.
50여 기의 기사가 험하고 좁은 제방 위만 달리려니 꽤 발이 꼬였지만, 그렇다고 늪을 달릴 순 없는 일.
“마차를 놓고 오기 잘했군.”
마차를 가져왔다면 진작에 발이 묶여버렸을 것이다.
레온나토스는 마차를 몰던 자신의 말에, 맹인이나 다름없는 레밍은 아렌과 함께 말을 타고 있었다.
레밍 몫까지 말을 모는 건 바로 아렌이었다.
“그런데 아렌. 말을 탈 수 있었나?”
내심 아렌이 다른 기사의 말을 나눠 탈 줄 알았던 레온이 새삼 물었다.
“네. 전 유랑족 출신이니까요.”
“…유랑족은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걸 먼저 배운다더니만.”
옆에서 더글라스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길이 너무 좁고 험합니다. 이런 지형에서는 기마병의 우위를 살리기 힘듭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기사단장 발커스가 간언했다.
그의 말이 충성심의 발로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레온나토스의 안위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아렌이 대충 둘러댄, 별것 아닌 점괘로 인해.
“아니. 50인의 기사단은 큰 전력이야. 이런 질척이는 땅이라면 보병은 더더욱 움직이기 힘들겠지. 50기의 기사를 위협할 전력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어.”
“…알겠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옥체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염려 고맙네, 발커스 경.”
그 뒤 묵묵히 동쪽을 향한 여정이 이어졌다.
좁은 길과 험한 지면상태 때문에 기사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드문드문 아티스 서쪽의 유민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
“…….”
그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천으로 꽁꽁 입을 싸맨 채 초점 흐린 눈으로, 그들은 묻는 어느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대답을 종용했지만 말 없는 유민을 다섯 명째 만났을 무렵부턴 오히려 기사들이 그들을 피했을 정도.
다행히 꺼림칙한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아,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기사단은 옛 아티스 국의 수도, 아트레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월강의 지류 제방을 따라 반나절. 길이 성했다면 더 빨리 도착했을 것이다.
하늘 높이 떴던 해는 어느새 지평선 부근에 걸려 있었고, 날이 점점 저물어가자 새벽과 같이 다시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더글라스는 눈가를 찌푸렸다.
“…여러모로 기분 나쁜 땅이군요.”
더글라스의 중얼거림. 반면 레온나토스는 저 멀리 보이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네만, 저 광경은 아름답군.”
동쪽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든 서쪽과 달리 동쪽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흐린 시야 너머 동쪽, 저 멀리 아직도 꼿꼿하게 서 있는 아홉 개의 탑이 희미하게 보였다.
흰색의 벽돌에 푸른색 지붕.
아홉 개의 탑은 여전히 수려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물속에 반쯤 잠겨 있지만.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점점 짙어지는 안개는 언덕 아래의 풍경을 점점 지워버리고 있었다.
예전엔 한 나라의 수도였던 아트레움은, 지금은 태반이 물에 잠겨 버려진 땅에 불과하다니.
레온나토스가 중얼거렸다.
“저것이 물의 도시 아트레움, 그리고 아홉개의 탑인가.”
도시를 겹겹이 둘러싼 수로와 아홉 개의 탑으로 유명했던 아트레움.
하지만 ‘물의 도시’라는 별명은,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름답군요.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더글라스가 피곤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눈이 침침한 것이, 아무래도 빨리 야영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꽤나 강행군이었으니. 그런데…”
레온나토스의 말이 점점 잦아들었다.
말 위에 있던 아렌은 고개를 돌렸다.
“…전하?”
방금 전까지 바로 곁에 있었던 레온나토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아있는 건 몇 걸음 앞도 분간하기 힘든 갑자기 자욱해진 안개.
물론 아무리 안개가 짙어도 바로 곁에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아렌은 자신의 말안장 뒤에 앉은 레밍에게 말했다.
“레밍? 뭔가 이상해요.”
“…….”
“…레밍?”
뒤돌아본 아렌.
그곳에는 잘린 목의 단면이 선명한, 익숙한 죄수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
그건 바로, 첫 번째 삶에서 목이 잘렸던 아렌의 몸뚱이였다.
‘환각이다.’
결코 기억하기 싫은,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끈덕지게 남아있는 기억.
목이 잘릴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 몸서리쳐졌지만, 오히려 아렌은 그렇기에 정신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나 감촉으로 느끼나, 너무 진짜 같잖아.’
뒤에 앉아있는 자신의 시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환각에서 어떻게 풀려나는지는 모른다.
아렌이 당황하는 찰나.
화악!
억센 무언가가 아렌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부붑!”
억센 팔이 아렌을 말 아래로 끌어 내렸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낙하감이 아렌을 다시 현실로 되돌려놨다.
“이봐.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왜 아무 대비도 안 한 거지?”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얼굴 전체를 가리지 않고 얼굴의 절반만 가리고 있어 뒤로 묶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그대로 보였다.
“…당신은?”
“뭐야, 황자. 간밤에 했던 얘기는 다 까먹은 거야?”
“…아아, 어제 그 사람이야? 알아봐 주길 원했다면 복면에 이름이라도 써놓지 그랬어?”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와중에도 아렌은 쏘아붙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렌을 끌어내린 침입자 말고도, 그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서른 명 가까이 있었다.
기사들은 물론 황자까지 끌어내릴 수 있을 만큼 접근했지만, 모두들 어딘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었다.
“자, 이제부턴 알아서 천으로 입을 막아. 너희들은 외지인이니 그것만으로 곧바로 효과가 있을 거야.”
그의 말대로 말에서 끌어내려진 기사들은 입을 막은 것만으로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자네들은 누구지?”
이제 막 깨어나 약간의 두통을 느끼면서도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복면인은, 레온을 물그러미 바라봤다.
“…그러는 당신은?”
“감사 인사가 늦었군. 난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다. 자네들의 도움에 깊이 감사한다.”
“…어?”
누가 봐도 일행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주변에 보호되고 있었지만, 복면인은 간밤에 만났던 아이가 진짜 황자라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신이 황자라고?”
“그렇다만.”
“…아항.”
레온나토스와 아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복면인은 슬며시 웃었다.
‘아군 하나 없는 타지에서, 진짜 황자는 정체를 숨기고, 가짜를 앞에 내세우시겠다?’
복면인은 기꺼이 어울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황자님. 잠깐 동행해주실까요?”
레온나토스에 말하면서, 뒤로 비켜 서 있는 아렌을 돌아보며 슬며시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복면인.
아렌도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떡한다? 알려줘야 하나?’
하지만 저쪽이 멋대로 하는 착각, 어딘가 익살스레 느껴지기도 했기에 아렌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뭐야, 저 여자. 느끼하게 왜 저래?”
“…….”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더글라스만 두 눈을 껌뻑일 뿐.
*****
자신들을 ‘아티스 해방 전선’이라 칭한 자들은 기사들을 고지대의 동굴까지 안내했다.
아트레움에서 한층 떨어졌고, 더 어두워질수록 주변의 안개도 더 짙어지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엔 큰 모닥불을 몇 개씩이나 피워놓아,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습기를 모두 날려버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동굴에 들어가고 나서야 입을 가리고 있던 천을 뗐다.
후작의 저택에 침입했던 복면인, 해방전선의 부두목 핀이 말했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너희를 죽일 거였다면 안개 속에서 얼빠진 채 있을 때 모두 죽였을 테니까.”
핀이 먼저 앞서 걸었다.
내부는 거대한 종유 동굴이었다. 비록 안쪽은 구불구불했지만, 동굴의 면적만 따진다면 황궁의 여느 건물 못지않은 넓이였다.
횃불의 빛이 닿지 않아 안쪽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흔 명은 족히 넘는 숫자.
기사들은 레온나토스를 완전히 감싸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두목. 제국의 황자가 왔습니다.”
그 말에 동굴의 가장 안쪽. 위쪽으로 거대하게 자란 석순을 깎아 만든 의자에 앉아있던 거구가 몸을 일으켰다.
보기에는 산적 두목이나 다름없는 행색.
사실 하는 것도 산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레온나토스는 타지에서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우선 그대들의 도움에 감사하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안개 속에서 떠돌고 있었을지도 모르니.”
“…감사 인사는 이쪽의 입장이 정해진 뒤에 하시지. 아직 그쪽을 살릴지 죽일지 정하지 않았으니까.”
아티스 해방 전선의 두목, 파투스는 마냥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레온나토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세월이 지났다지만, 자신들의 왕국을 멸망시킨 자들의 후손이었다. 반감을 가진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지. 그 대신 하나 물어도 될까?”
“…뭔데 그래.”
“대체 바깥의 안개는 뭐지?”
“뭐야. 제국 녀석들은 모르나? 만월강 동쪽에 대해?”
“……?”
“어쩐지. 마스크도 안 하고 기웃거리고 있다 들었을 때 얼빠진 놈들이라 생각은 했지만. 너희들, 까먹지 말고 꼭 기억해라.”
레온나토스의 갸웃거림에 두목 파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트레움 주변의 안개는, 사람을 홀린다고.”
“사람을, 홀려?”
“그래. 왕국이 망하고 수도가 물에 잠긴 후부터, 어른이든 꼬마든, 황족이든 노예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안개를 너무 깊이 들이마시면 다신 이쪽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그래서 입을 가리는 건가?’
단지 천을 입에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안개를 구성하는 습기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안개에 무슨 성분이 섞여 있어야 사람들을 그리 강력하게 홀릴 수 있는지, 아렌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 몰랐던 거냐?”
파투스는 영 못 믿는 눈치였다.
“너희 옛 황제도, 그걸 알았으니 만월강의 서쪽만 취한 게 아닌가?”
“…….”
그럴듯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