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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9화 (29/227)

#029화

복면인이 아렌을 향해 겨눈 칼.

검에서 흐른 차가운 물이 아렌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엔 누군가의 피인가 싶었지만, 온도와 점도를 보면 저택을 둘러싼 해자를 지나며 젖은 물인 듯했다.

‘일단 내부 사람은 아니란 건가.’

저택 안의 사람이라면 굳이 차가운 해자를 건너올 필요는 없다.

칼이 겨눠진 긴박한 상황임에도 아렌은 흘깃 방구석을 바라봤다.

황궁에서는 마법처럼 등장하던 멜로익은, 지금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시녀와 하인들은 대부분 따라오지 않았으니.’

황족의 비밀호위인 암살 시종은 일반 궁인으로 위장한 채 정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이런 원정지까지는 궁인 대부분이 따라오기 힘들다.

레온나토스의 호위는 근위기사인 더글라스와 기사단이 도맡아야 하는 상황.

일개 가신인 아렌마저 신경쓸 겨를은 없는 것이다.

“이봐, 황자. 어딜 눈을 굴리는 거야.”

남자보다 가느다란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검날이 아렌의 목을 지그시 내리눌렀고, 날의 감촉을 목의 피부로 느끼면서도 아렌은 말했다.

“그냥. 네 동료가 또 있나 해서 말야.”

위협이 있었지만 아렌은 동요하지 않았다.

결코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는 침입자이지만, 만약 황자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깨어나기도 전에 아렌은 죽은 목숨일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여긴 후작의 장원인데. 내가 묵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

“…호오.”

복면인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호랑이는 개를 낳지 않는다, 이건가? 칼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군. 황족은 황족이다, 이건가?”

“…….”

‘완전 잘못 짚었다, 이놈아.’

물론, 여기의 아렌이 정말 레온나토스였어도 비슷한 반응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자 레온나토스는 명석한 반면, 너무 강직한 면도 있었다. 눈앞의 복면인에게 겁을 먹지는 않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소리질러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지도 모를 일.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마침 방을 바꾼 것은 복면인과 황자, 둘 모두에게 도움되는 일이었다.

“날 죽일 거면 진작 죽였겠지. 목적이 뭐지?”

“담력 한번 대단하군. 허튼 생각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교섭 재료로 쓰여야겠다.”

“…교섭? 누구와? 무슨 목적으로?”

“굳이 말해줘야 하나? 네가 황자인 걸 알았으면 됐다. 얌전히 기절해 있어.”

복면인이 칼을 거뒀다. 동시에 검의 손잡이로 아렌을 내려치기 직전.

“잠깐만. 날 업고 도망가려고? 여긴 2층인데? 그냥 얌전히 따라갈게.”

“시끄럽다고-”

복면인이 검 손잡이로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땡땡땡땡땡!

저택 바깥에서부터 경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외침.

“침입자! 침입자다!”

잠들었던 저택 안이 단숨에 소란스러워졌고,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아렌이 태연하게 말했다.

“어라? 이러면 짐까지 둘러업고 도망가긴 그른 것 아닌가?”

“…젠장! 벌써 들킬 줄은!”

야음을 틈타 조용히 물러간다면 모를까, 아무리 어린애라도 사람을 들고 뛰기엔 버겁다.

다다다다!

점점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벌컥, 방문이 열렸다.

복면인은 피할 겨를도 없이 아까 아렌이 노려봤던 방 구석의 어둠으로 숨어들었다.

숨었다고 해도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뿐. 한번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 금방 들키고 말 것이다.

“레온나토스 전하! 무사하십니까!”

문을 연 것은 이 저택의 사병이었다.

사병의 눈에 비친 건, 달빛으로 어슴푸레한 방 안 침대에 앉아있는 어린아이.

어린 아렌의 몸은 황자의 모습과 거의 같았다.

사병이 옆으로 잠깐만 시선을 돌리면, 방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복면인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 이상 없네.”

“다행입니다! 침입자를 잡을 때까지 경비를 더욱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럼!”

사병은 달려왔던 기세 그대로 방을 나갔다.

방의 어둠 속에서,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하던 복면인은 조금 얼떨떨하게 물었다.

“…왜 날 숨긴 거지? 방금 말했다면 날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의문이 생겼어. 목숨을 걸면서까지 후작의 장원에 침입한 이유가 말야. 하지만 지금은 느긋히 말할 때가 아닌 것 같군.”

아렌은 문득 생각난 듯 복면인이 든 칼을 보며 말했다.

“물론, 네가 날 죽인다면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없겠지만.”

어둠 속에서도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린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렌은 복면인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꿰뚫어 봤다.

칼을 거둔 뒤, 소리 내지 않고 바깥의 동향을 살피며 창문을 연 복면인.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궁금하다면 만월강 건너, 아티스 국의 옛 수도로 와라.”

“이거 함정을 대놓고 파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야.”

복면인은 창을 조심스레 연 다음 훌쩍 뛰어넘어갔다.

‘…후우.’

내심 속을 졸이던 아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자를 납치할 수 없다면, 자포자기해 죽이려 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은 복면인의 눈에서 그러지 않을 기색을 읽고 모험을 걸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복면인이 창문을 훌쩍 뛰어넘은 것과, 더글라스가 아렌을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건 거의 동시였다.

“아렌! 무사하냐!”

“네. 전 괜찮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들킬 뻔했군.’

더글라스는 소란이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황자의 방으로 가 레온의 곁을 지켰다.

그 후에야 아렌을 확인하러 온 것.

후작의 사병이 조금만 늦게 왔거나, 더글라스가 조금만 일찍 왔거나. 어느 쪽이든 아렌이 황자가 아닌 것을 들킬 뒤험이 있었다.

‘얼결에 위장 대역처럼 되어버렸네.’

마치, 황제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이 행동하던 금면병처럼 말이다.

아렌으로서도 레온나토스는 무사해야만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렌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은 시늉만으로도 충분했다.

더글라스가 호위하게 쉽게, 아렌도 레온나토스의 방으로 향했다.

*****

“전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잠시 후, 보엘 후작이 풍만한 배를 출렁거리며 레온나토스의 방으로 왔다.

자신이 배정한 방과 다른 방이었지만, 경황없는 와중이라 보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레온이 물었다.

“저택에 침입자가 있었다고?”

“면목 없습니다. 해자를 따라 경비를 서던 병사 셋이 나란히 기절해 있었습니다. 곧바로 저택으로 향한 흔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침입하기도 전에 다시 물러난 것 같습니다. 지금 쫓고 있습니다.”

“…침입자를 놓쳤다고?”

“송구스럽습니다.”

보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장원 한복판까지 걸어왔다가 유유히 빠져나간 자.

장원의 주인으로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고, 굳이 오늘 일이 일어났다면 침입자의 목적이 투명하게 보인다.

그 목적은 누가 뭐래도, 오늘 저택에 묵었던 제국의 제 12황자 레온나토스.

물론 아렌은 밤에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괜히 내가 와서 장원을 어수선하게 한 것 같군.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만찬은 뒤로 미뤄야겠어.”

“…부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그러지.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초소기지로 향하겠네.”

레온이 말하기도 전에 이미 기사들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레온나토스의 몸에 상처라도 나는 날이면 자신들도 반절이 죽는다는 점괘.

한 달 전이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레온나토스에게 닥친 위험이 실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 완전히 무장한 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레온나토스는 초소기지로 향했다.

*****

어둑했던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이른 아침이 되어서 레온나토스는 만월강 유역에 도착했다. 국경기지는 저택에서 일어났던 소란을 모르는지 태평했다.

황자는 기지 안의 회의실을 빌렸고, 더글라스는 그동안 참아왔던 물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침입자는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을까요.”

“글쎄. 하지만 침입자의 목적이 나였다면, 날 노릴만한 자들 중 당장 생각나는 건 하나인데.”

“…만월강 동쪽 말씀이십니까?”

“물론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하다는 말이지, 확실한 건 아니야.”

레온나토스의 말. 물론 아렌은 답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대규모의 병력이라면 도하하는 게 큰 걸림돌이겠지만, 야음을 틈타 한둘이 경계를 넘는 거라면 오히려 평야보다 강이 유리할지도.’

침입자는 말했다. 옛 아티스 국의 수도, 아홉 탑의 도시로 오라고.

굳이 그 말이 없어도, 어차피 레온나토스는 소요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강 건너를 정찰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그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건데.’

성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느 정도 해답이 보이겠지만, 여기서 일어났던 일들은 아렌이 까마득히 모르는 일.

아렌은 어둠 속에서 느낀 복면인의 눈빛을 믿기로 했다.

품 속에서 카드를 꺼낸 아렌.

“잠시 점을 보겠습니다.”

슥슥슥.

아렌이 카드를 섞었다.

갑자기 카드 섞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가린 레밍이 의아해했다.

“…아렌?”

“아, 사서 양반은 처음인가? 아렌은 보기엔 저렇게 어려도 영험한 점술가야.”

더글라스의 말에 레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럼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군요!”

‘…소문들?’

아렌은 황궁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잠깐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카드를 빠르게 섞던 아렌은 맨 위의 카드를 뽑는 척하며 중간의, 미리 정해둔 카드를 뽑았다.

“‘무너진 탑’. 그리고 ‘흘러넘친 물’이군요.”

“무슨 의미지, 아렌?”

“무너진 탑은 드높은 이상과 좌절, 옛것에 대한 향수를 의미합니다. 흘러넘친 물은 지나침, 탐욕에 대한 대가, 재난 혹은 실패를 의미하죠. 카드의 의미만 봤을 땐 과욕으로 인한 실패, 그리고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지만, 방금은 저희가 앞으로 할 거취를 점친 것이니 그림 자체에 의미가 있겠죠.”

“무너진 탑과 흘러넘친 물이라… 설마, 아트레움을 말하는 건가?”

“아마 전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아트레움. 아홉개의 탑으로 유명했던 아티스 왕국의 수몰된 수도였다.

아렌은 한마디 더 거들었다.

“하지만, 카드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전하. 사실은 간밤에-”

아렌은 후작의 저택에서 새벽에 있었던 일을 황자에게 고했다.

방을 뒤바꾼 일과, 누군가 침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장소에 대해.

“그런 일이… 어째서 곧바로 말해주지 않았나!”

“왜냐면 후작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도착한 직후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건 꽤나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침입자는 외부에서 들어왔겠지만, 내부의 공범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특히 원래 황자가 자고 있을 방을 특정해 들어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방이 다른 방보다 조금 더 좋긴 했지만, 황자가 어느 방에 묵는지 아는 건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 뿐이다.

“저로선 폐하 대신 위험에 처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렌!”

아렌의 마음에도 없는 말에 레온이 펄쩍 뛰었고, 근위대장 더글라스는 꽤 흥미롭다는 듯 아렌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렌 녀석, 전하와 체격의 거의 같군요. 커서도 그럴지는 모릅니다만. 때로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 내 가신을 방패로 내세우고 싶진 않네!”

“뭐, 저도 꼭 그러시라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만.”

그게 달갑지 않은 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글라스의 말대로, 언젠가는 써먹을 구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머리 한 켠에 고이 넣어둔 채, 아렌은 채근하듯 물었다.

“전하. 아트레움에 들르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한 후, 레온나토스는 말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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