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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8화 (28/227)

#028화

마차 한대가 잘 다져진 도로를 내달렸다.

곳곳에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 그 주위를 50여 명의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동부 국경으로 향하는 레온나토스와 제8 기사단의 행렬이었다.

성인 열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쾌적한 마차 안. 아렌은 레온나토스와 같은 마차를 타고 있었다.

아직 어린 둘이기에 마차 안은 더욱 넓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같이 타고 있는 눈을 가린 사서.

“실은, 이렇게까지 멀리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느끼는 레밍의 목소리 톤은 조금 올라가 있었다.

“동행을 결심해 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가 전투에 휘말리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그곳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책이 있는 한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레밍의 각오.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밍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구슬리면 되겠어.’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나 다름없는 레밍의 지식은, 두고두고 힘이 되어줄 테니까.

마차는 벌써 열흘이나 쉬지 않고 달렸다.

강행군에 가까운 여정에서 말발굽과 마차 바퀴가 만드는 먼지구름이 일상이 되고, 마차의 흔들림도 자장가처럼 편안해질 때쯤.

문득 마차의 창밖을 내다본 레온나토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저것 보이나, 레밍?”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니, 내가 미안하군.”

안대를 한 레밍이 멋쩍게 웃었다.

아직은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었지만, 눈을 쓰면 쓸수록 점점 시력이 사라지는 병에 걸린 레밍이기에 남은 시력으로는 온전히 책만 읽고 싶었다.

이전엔 그 귀한 시력을 도서관 청소 따위에 써야 했지만, 지금은 레온나토스의 언질에 의해 도서관 청소 업무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창밖을 본 아렌 역시 감탄했다.

“이 정도 절경이라면 잠깐 시력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요?”

“…….”

아렌까지 거들자 레밍도 더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요. 잠깐만입니다.”

레밍이 안대를 벗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마차 바퀴 아래로 다듬어진, 조금 높은 제방을 따라 이어진 길.

그 아래로 평야를 흐르는 수십 갈래의 물줄기가, 완벽한 격자 모양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물줄기를 따라 평야를 가득 메운 푸른 농지에선 곡식이 익어갔다.

건축가가 자로 대로 그린 듯한 완벽한 관개수로에 레밍도 감탄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이 어찌나 완벽한 치수인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역시 제국 최대의 곡창지대, 만월강 이서(以西)로군.”

제국의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만월강은, 달에 한번 달이 차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범람했다.

하지만 만월강 서쪽, 제국령 아티스 지역만큼은 치수 시스템을 완벽하게 보존해 양질의 경작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선제 브륀할트 7세가 왜 만월강 동부까지 취하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황제는 만월강 동부를 버리라 강력히 명령했고, 역사가들의 그럴듯한 추측만을 남겼을 뿐.

초록색 경작지에 푸른 잉크처럼 고고히 흐르는 격자형의 물줄기를 보며, 아렌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이곳에서의 사건을 난 잘 모른다는 거야.’

두 번째 생을 살고 있어 유리한 것들이 많지만,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은 어디까지나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만이 목적.

자연히 관심사는 황족들에 무슨 말을 해야 비호받을 수 있을까, 그 정도뿐이었다.

황궁 안에 있던 아렌에게 먼 국경에서의 소요사태는 ‘가웨인 황자가 고생했구나’, 정도의 인식뿐이었다.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 만월강 유역은 아렌에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궁과도 같았다.

수려한 풍경과는 달리 아렌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나 여기서 레온이 죽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나.’

아렌은 긴장으로 식은땀이 흐른 주먹을 꽉 쥐었다.

*****

제국의 동쪽 국경, 만월강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초소가 늘어서 있다.

고고하게 흐르는 깊고 너른 강물이 사실상 가장 큰 방어선이기에 초소마다 그리 많은 인력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황자의 마차가 도착하자, 수염이 덥수룩한 국경경비대장이 황자를 맞았다.

“황자 전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시다니, 성은이 망극합니다.”

“수고가 많군, 경비대장.”

“무슨 말씀입니까! 오히려 이처럼 별것 아닌 일에 50인이나 되는 기사단이 행차하시다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전력이지요!”

“…넘친다고?”

레온나토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국경에서의 소요사태가 있다고 들었네만. 그 일은 그리 큰일이 아니란 건가?”

“특이사항이 있어 중앙에 보고드리긴 했습니다만, 그리 급박한 일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런데 저렇게 군기가 바짝 든 기사단을 보니, 역시 황궁의 무인은 명불허전이군요.”

“…….”

국경지대에 도착한 이후, 기사들은 레온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난 열흘간의 여정에서도 기사들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예상되는 위협을 차단했다.

그들이 이토록 필사적인 이유는 하나다.

기사단이 궤멸하지 않으려면 황자가 손끝 하나도 다쳐선 안 된다는 아렌의 점괘 때문이었다.

모든 기사들이 아렌의 점괘를 맹신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차피 주군의 안전을 도모하는 건 기사단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기사단장 발커스의 열성적인 독려와 맞물려, 제8 기사단은 별다른 반발심 없이 아렌의 점괘를 받아들였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그래, 그 소요사태란 무엇이지?”

“염려하실만한 건 아닙니다. 예전부터 만월강 동부에는 아직도 아티스의 유민들이 남아 있는데, 최근 초소 바로 앞까지 다가와 들여보내달라니 뭐라니 난리더군요. 점점 그 빈도가 늘더니 급기야는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넌 후, 초소에 불까지 질러 버리더군요.”

“…….”

초소 대장이 너무 태연하게 말해 레온나토스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초소에 불을 지를 만큼 다가온 걸 눈치 못챈 초병과, 초소가 불에 탔는데 ‘그것 정도야’라며 웃어넘기는 경비대장.

다만 한가지는 알 것 같았다.

‘주변의 군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알겠군.’

레온나토스가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동부 국경 경비대장에 대한 상소문을 올릴 것이다.

경비대장은 이어 말했다.

“그 외에는 무시하기 힘든 소문이 있습니다. 만월 강 동부의 여러 군벌을 합쳐 꽤 세력을 갖춘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라더라… 아티스 해방 전선? 웃긴 놈들이죠. 사라진지 30년이 넘은 망국을 해방하네 마네 말이 많습니다.”

“…네가 듣기엔 어떤가, 아렌.”

“흠, 조금 이상한데요.”

레온나토스가 아렌에게 의견을 구했고, 아렌을 단지 어린 몸종쯤이라 여겼던 경비대장은 조금 놀라 물었다.

“…전하. 이 자는?”

“내 비서관인 아렌일세.”

“비서관이요?! 이렇게 어린 분이?!”

경비대장같은 반응에는 익숙했다. 아렌은 계속했다.

“아티스 해방 전선이라니, 어째서 ‘해방’인 거죠? 만월강 동쪽은 이미 버려진 땅이잖아요. 해방이라니, 부흥운동이라면 또 모르죠.”

만월강 동부는 서부와 달리 완전히 초토화되어 제반 시설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길과 제방이 무너졌으니 상업도 불가능하고, 수로와 보가 망가져 농지조차 완전히 물에 잠겼다.

멸망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치수는 이뤄지지 않고, 도리어 오랫동안 침수되었던 땅은 돌이킬 수 없는 늪이 되어 그 구역을 점점 더 넓혀가고 있었다.

재건될 기미는커녕, 아티스 동부는 선제의 저주에라도 걸린 듯 스스로 무너지는 중이다.

경비대장은 공손하면서도, 아렌의 지적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글쎄요. 그런 놈들의 생각까지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으니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보엘 공의 장원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도착하면 꼭 방문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안내하게.”

국경군의 헤이한 군기강은, 경비대장을 질책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당장 해임한다 해서 곧바로 후임을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은 이곳의 병력으로 국경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이 지역의 주인을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경비대장이 말한 보엘 공.

아렌은 기억 속 어렴풋이 있는 정보를 떠올렸다.

‘벤팅크 가문의 보엘 벤팅크. 아티스 국의 귀족이었지만, 가장 먼저 제국에 투항했던 가문의 후손.’

*****

동심원으로 흐르는 세 줄기의 수로를 지나면, 그 안에는 푸른 지붕의 저택을 낀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물은 해자처럼 고고히 흘렀고, 군데군데 있는 다리를 부수면 장원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돌변한다.

마차는 돌다리를 지나 장원 앞에 섰고, 사람보다는 공을 연상케 하는 둥근 체구의 비만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오셨습니까!”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뚱뚱한 남자.

만월강 서쪽, 전 아티스 국 영토의 관리자인 보엘 벤팅크 후작이다.

보엘은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찍어내며 말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레온나토스 전하. 가장 최근에 뵈었던 것이 4년 전, 황궁의 만찬에서였지요.”

“그랬었나? 미안하군. 기억이 희미해.”

아무리 레온나토스가 총명해도 4살 때의 기억이 선명할 수는 없다.

보엘은 마음 놓으라는 듯 살찐 가슴을 퉁 치고 말했다.

“그때는 더 어리셨으니 당연하지요. 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곳 만월강 서부는 완벽히 저희 가문 아래에 있지요. 부디 편히 있다 가시길 바랍니다.”

“아니. 난 이곳에 편히 있다 가려고 온 게 아닐세. 여기 온 것도 잠깐 들러 인사나 하기 위해서였네. 자네의 영지에 와서 기별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오오! 그렇게 마음을 써주시다니! 그렇다면 더더욱 소인의 지붕 아래서 여독을 푸셨으면 합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물론 기사님들도 묵어가실 수 있습니다. 장원의 숙소는 넓고 마구간은 더 넓으니까요.”

“…그럼 하루만 신세 지겠네.”

거듭된 권유에 레온나토스도 마음을 굽혔다. 자신보다도, 말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기사들의 여독을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크나큰 영광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큰 만찬을 준비하지요! 꼭 맛보셨으면 합니다. 그럼 안내해드리지요!”

보엘은 직접 황자를 숙소로 안내했다.

저택과 작은 복도로 연결된 별관. 레온나토스의 방은 2층의 가장 끝 방이었다.

“전하께선 가장 안쪽 방을 사용하시지요.”

“그러지. 고맙네.”

“부디 좋은 밤 되시지요.”

보엘이 물러갔다.

다른 신하들도 저마다 숙소를 안내받았고, 레온나토스 인근의 방을 쓸 사람은 근위기사 더글라스와 비서관 아렌.

레온나토스는 먼저 자신의 방을 확인했다.

“음, 자네들, 나와 방을 바꾸지 않겠나?”

“무슨 일이십니까?”

“맨 끝의 방이 가장 넓지만, 창이 두 방향으로 나 있어 지나치게 밝군. 밤눈이 밝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네만.”

아렌은 흔쾌히 말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

*****

마차에 줄곧 실려 가는 여정이라 하더라도 피로는 쌓인다.

그동안 숙소에서 사용한 질박한 침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푹신함에, 아렌은 거의 혼절하듯 수마에 떨어졌다.

잠 눈이 예민한 듯한 레온나토스와 다르게 아렌은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토스. 레온나토스.”

“……?”

“제국의 황자 레온나토스, 맞지?”

퍼뜩. 아렌의 정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목 아래에는 푹신하고 따듯한 이불, 목 위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 피부와 맞닿아 있었다.

‘…칼.’

칼이 목에 겨눠지자, 기억하기 싫은 경험이 되살아났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어 신경과 살을 절단하는 감각.

아렌의 사고가 빨라졌다.

‘날 황자라 착각하고 있다. 내가 황자가 아니면, 날 살려둘 필요 있을까? 어린 하인 따위 쉽게 죽여버리고 진짜를 찾아가겠지. 내가 황자인지 직접 깨워 확인한다는 건, 진짜 황자를 죽일 생각은 없는 거야.’

아렌의 결정은 빨랐다.

아렌은 옆에서 익히 들었던 대로, 황족 특유의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그래, 짐이 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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