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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7화 (27/227)

#027화

“당분간은 원정 생활이 되겠군요.”

“음. 확실히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황궁 내원을 나오며 아렌이 한 말에 레온나토스가 답했다.

“하지만 신생 8기사단을 하나로 뭉쳐줄 경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 폐하의 배려엔 솔직히 감사해야겠어.”

“네. 그와 동시에, 이건 전하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겠죠.”

얼마 전, 어전 회견에서 고드프리를 저격하며 두각을 드러냈던 레온나토스. 황제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지만, 그때 보여준 행동만으로 재평가받기엔 아직 부족했다.

“이번 사건으로 전하의 군재(軍才)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날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러니 사실, 너무 위험한 일은 아닐 거야. 사실은 조금 험한 일이라도 상관없는데 말이지.”

“전하의 안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더글라스가 목숨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

발커스는 아렌과 레온, 더글라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침묵만 지켰다.

부자연스러움을 모두가 눈치챘다. 모두의 시선이 발커스로 모였다.

“왜 그러나, 발커스.”

“아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요, 발커스 경. 어디 다치기라도 했습니까?”

툭. 가볍게 발커스의 왼쪽 어깨를 두드린 더글라스.

“윽!”

그리고 발커스는 지금까지 본적 없던 속도로 풀쩍 뛰어올라 뒤로 향했다.

급히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건 덤이다.

“…뭐야, 정말 다친 겁니까?”

“괜, 괜찮습니다. 더글라스 경. 단지 어제 잠을 잘못 잤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나 아픔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런 거 참으면 병 생깁니다.”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일단은 그렇다니 넘어가는 더글라스.

아렌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 자리에선 안 믿는 척하더니, 꽤나 거하게 걸려들었잖아?’

처음부터 강한 믿음을 가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믿음은 점점 약해진다.

오히려 처음엔 믿지 않았다가 뒤늦게 믿게 하면, 그 인식의 변화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아렌이 한 점괘, 그리고 발커스가 느끼는 왼쪽 어깨의 통증 역시 그랬다.

사실 발커스가 느끼는 왼쪽 어깨의 통증은 별것 아닐 것이다.

매일 훈련을 반복하고 갑옷을 걸치는 기사가, 근육통도 없이 멀쩡한 경우는 오히려 드물 터.

처음엔 아렌의 말을 무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가 신경 쓰이고, 어깨를 의식하면 할수록 작은 아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렌이 한 마디 툭 내뱉은 말은 의심의 싹이 되어,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발커스의 어깨를 좀먹고 있었다.

‘어차피 동료들에겐 센 척 했을 테니, 조만간 몰래 찾아오겠지?’

아렌의 예상은 적중했다.

물론, 그 시기는 예상보다도 좀 더 일렀지만.

*****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밤늦게 아렌의 방문을 두드린, 후드를 눌러쓴 발커스를 맞이한 아렌은 당황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오는 와중에도 발커스는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늦은 밤 무슨 일이십니까, 발커스 경.”

“…그, 비서관 님-”

“편히 아렌이라 부르시죠.”

“…아렌 공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사실이라뇨?”

발커스는 묻기도 민망하다는 듯 손을 쥐었다 폈다.

“아… 기사단의 절반이 죽는다는 거랑 제….”

“아, 어깨요.”

“…….”

“그야, 전에도 말씀드렸듯 점을 봤다고 했잖아요?”

연병장에 만났을 때와는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이제 아쉬운 쪽은 발커스가 되었다.

점술로 주도권을 쥐는 방법은 익숙했다.

말로 상대의 약점이 될만한 곳을 찌른 후, 그 점괘에 약간의 신빙성만 더하면 그 후엔 상대가 알아서 더욱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첫번째 삶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황자의 비위만 맞췄기에, 귀찮게 하는 몇몇 귀족에게만 썼던 방법이다.

“저, 제발 한 번 더 점괘를 자세히 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아니, 어째서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게 점괘를 부탁하는 것은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엄중히 금하셨습니다. 제게 부탁을 하시려면 먼저 레온나토스 전하께 허락을 먼저 맡으시지요.”

“…그건.”

아무리 속으론 레온나토스를 무시한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발커스의 주군. 가신으로서 주군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건 황궁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한번 밀었으니, 이쯤 슬쩍 당길 때도 되었지.’

“물론, 기사님의 요구가 아니라 제가 자발적으로 점을 본다면 또 모르지만요.”

“그렇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소리가 높아지려던 발커스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보십시오. 그때는 단지 제 호의였을 뿐입니다만, 한번 말씀드리니 이처럼 당연하게 여기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런 대가 없이 점을 봐준다고 여기저기 소문이 난다면, 같은 부탁 역시 여기저기서 오곘죠. 그때 들어주지 않으면 저만 나쁜 사람이 될 테고요.”

“물론 이 부탁은 영영 함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점술가가 같은 점괘를 연달아 보는 것은 금기니까요.”

여기서, 아렌은 상대가 기꺼이 붙잡을 동아줄을 늘어뜨렸다.

“물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심했던 발커스는 아렌의 동아줄을 덥석 붙잡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와 제 전우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란 말입니다!”

기사단의 절반이 죽을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점괘는, 갑작스러운 출병 소식으로 신빙성을 얻었다.

거기에 원인 모를 어깨의 통증까지.

마음 같아선 조금 더 마음 졸이게 하고 싶었지만, 발커스의 인내심은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좋습니다. 점을 봐 드리죠.”

“저, 정말입니까!”

화색이 된 발커스.

하지만 거기서 아렌은 슬그머니 웃었다.

“…다만, 기사님께 몇 가지 조건이 붙을 겁니다. 물론 상관없으시겠죠?”

*****

‘…간단하군.’

낚싯바늘을 조금 까딱였을 뿐인데 덥석 달려드는 발커스를 보고, 아렌은 속으로 시익 웃었다.

‘한번 엿본 미래를 다시 엿보는 것은 술자에게나 피술자에게나 모두 위험한 일.’이라는 핑계를 대며 발커스에게 내건 조건은 셋이었다.

하나. 들은 점괘를 절대 의심하려 하지 말며,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

둘. 점괘의 주의사항이 있다면 성실히 이행하며, 점술가를 해코지하지 않을 것.

셋. 같은 미래를 한 번 더 엿본 점술가에게 앞으로 45일간은 점술을 요구하지 않을 것.

‘운명은 자신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는 걸 한번은 용서합니다. 하지만 두 번은 탐욕이라 여기고 저주를 내리지요. 위에 세 금기를 지키지 않았을 때는, 기사님에게도 저에게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의 불운이 따라다닐 겁니다.’

세 가지 대원칙을 완전히 숙지시킨 후에야 아렌은 발커스를 되돌려보냈다.

우선은 어깨의 통증에 대한 해결부터 먼저.

잘 때 왼쪽 어깨 아래에 수건을 받치고, 수건 안에 밤이슬을 묻힌 도라지꽃을 넣고 자라는 간단한 처방이었다.

후드를 눌러쓴 발커스는 만족하고 다시 몰래 방을 빠져나갔고, 아렌의 방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거, 효과 있는 거야?”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라면.

벽과 커튼이 만든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멜로익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쩐지 있을 것 같았기에 아렌은 놀라지 않았다.

“아, 멜로익. 음, 글쎄? 평범하게 효과 있지 않을까?”

실제로는 신경성일 뿐일 테고, 아렌이 한 말도 적당한 처방일 뿐이다. 어깨 아래 천을 받치는 건 놀란 근육을 진정시키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뿐.

물론 도라지꽃 운운한 건 별 효력 없이, 단지 좀 더 주술적인 의식으로 보이기 위함일 뿐이다.

“언제부터 숨어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황자님은 안 지켜도 돼?”

“뭐가 걱정이야? 전하 곁에는 더글라스 경이 있고, 더글라스 경을 견제할 다른 암살시종도 있는데. 그보다 난 네 호위를 더 중점으로 하기로 했어. 폐하의 중요 가신이기도 하고, 내 정체를 아는 몇몇 중 하나이니까.”

“…이거 황송한데?”

너스레도 잠시. 멜로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너, 열 살 아닌 것 아냐?”

“웃기시네.”

순간 뜨끔했지만, 그런 말을 한 멜로익도 열두셋 정도 나이다.

아렌이 둘러댔다.

“모르지? 어쩌면 황궁엔 애늙은이가 되는 기운이라도 흐르고 있을지?”

“흐음.”

“그런데, 왜 날 지키는 거지? 중요인물도 아닌데.”

“중요인물이 아니라고? 발커스 경을 완전히 휘어잡았는데?”

“…….”

혹여나 발커스와 불온한 대화를 나눴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렌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물론 호위인 동시에 감시인 것도 맞아. 레온나토스 전하를 황권으로 인도해준 건 감사해야겠지만, 만약 레온나토스 전하를 배신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그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8 기사단을 제 기능하게 해야 했다.

그건 레온나토스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아렌을 위해서기도 하다.

권력을 얻기 전에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장이었다.

동부 국경만 생각하면 한숨이 새어 나오는 아렌이었다.

‘…전쟁이라. 솔직히 직접 겪고 싶지는 않았는데.’

*****

제국의 동부 국경 부근은 손에 꼽히는 곡창지지만, 국경선인 만월강 너머에는 늪과 진창뿐인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그 일대엔 어엿한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엔 바다, 서쪽으로 제국과 국경을 맞대었던 아티스 국.

국토 중앙을 관통한 만월강과 수많은 지류를 수원으로 국토 대부분이 비옥한 농토였고, 대대로 내려오던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수십 갈래의 수로로 치수를 완벽하게 해 주변국 중에선 손에 꼽히는 부국이었다.

하지만 30년 전, 선제 브륀할트 7세의 동진으로 국가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제국은 아티스 국토의 절반인 만월강 서쪽만을 취했다.

만월강 동쪽은 버려져, 그곳의 유민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파괴된 운하 때문에 국토 곳곳이 침수되어 농업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만월강이 매월 범람해 치수를 재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곳이니 오히려 경계가 느슨하단 말이지.’

나라를 세울 정도로 힘을 갖추지 못하니, 위협이 될 리도 없다.

황궁에서 판단한 것도 단순한 국경의 소요사태일 뿐.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황자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아렌은 알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던 가웨인 황자는, 기사단과 휘하 병력을 동원해 수개월이나 격전해야 했던 것을.

‘그 가웨인 조차도 동쪽 국경에서 꽤나 고생했으니까.’

물론, 돌아온 가웨인 황자는 그만큼 자신의 입지를 더 공고히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에겐 가웨인 황자만큼의 무력도, 양질의 무사들도 없었다.

공을 세우기 위해선 가웨인 황자와는 전혀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 어서 오게. 레밍.”

호출되어 불려 나온 맹인 사서 레밍은, 어딘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물론 부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불러주신 것은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전 아직 황자전하 아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미안하네. 하지만 명색이 황궁 밖 내 첫 임무인데, 걱정되어서 말이야.”

“대강의 설명은 들었습니다. 국경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고요. 하지만 눈을 가린 사서 하나가 동행하여 무슨 도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야 충분하지. 자세한 설명은 아렌에게 듣게. 이건 아렌의 제안이기도 했으니.”

레밍의 안대로 가린 눈이 아렌 쪽을 향했다.

크흠, 아렌은 목을 가다듬었다.

“동부 국경에 도착한 후 어떻게 될지 모르나, 상황에 따라 만월강 동쪽, 옛 아티스 국의 수도에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아직 장엄한 왕궁 대도서관이 남아 있다고 하죠. 거기 있는 수많은 책들을 들고 오는 건 무리일지 모릅니다. 같은 책을 가져와봤자 의미 없고요.”

“…….”

도서관이라는 대목에서 레밍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비록 보이진 않았지만.

“그 책들의 경중을 가려낼 만한 사서가 있으면 이송이 더 수월하겠죠. 이송 도중 소실될 위험도 있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책이라면 한번 보는 것만으로 모든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 사서도 있고 말입니다.”

“…그건 확실히 제게 혹하는 제안입니다만. 이번 임무는 도서관이 아니라 국경 소요사태의 해결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전술가 요린이 쓴 ‘전장의 예술’에서 선공의 득과 실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내용이었죠?”

아렌이 툭 던진 질문. 레밍은 거의 반사적으로, 신이 나서 대답했다.

“선공의 득이라 함은 전장의 장소와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며, 실이라 함은 방어자가 미리 선점한 지형과 지물에 의해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는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수자보다 통상 세 배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건 이러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가볍게 쿡 찌른 것만으로 책의 내용을 술술 뱉어내는 레밍을 보며,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도움으론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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