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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6화 (26/227)

#026화

“…전쟁이라고?”

더글라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렌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농담이에요.”

“…정말? 진짜 농담한 거지?”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더글라스는 꽤 찝찝해했지만, 아렌이 입을 닫자 찝찝함을 없앨 방도가 없었다.

신설되어 아직 이름도 주어지지 않은 제8 기사단.

원래는 제4 황자 가웨인의 것이었지만, 그의 양보로 기사단은 얼결에 레온나토스에게 인계되었다.

‘…골치 아프단 말이지.’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아렌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건, 아렌에게 전혀 희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제8 기사단의 발커스 외 사십구 명, 레온나토스 브륀할트 황자 전하 앞에 도열했습니다!”

며칠 뒤.

레온나토스는 연병장 앞에 4열로 도열한 기사들을 마주했다.

모두 하급 귀족의 차남 이하로 구성된 이제 막 스물을 넘은 젊은 기사들.

황궁 직속의 기사단은 모든 기사의 꿈이다. 기사단의 실력 역시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다면 아렌도 이렇게 골치 아프지 않다.

“…기사 발커스. 목숨의 불꽃이 다 하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나?”

“맹세하겠습니다.”

검을 기사의 어깨와 이마에 가져다 대며, 한명 한명 서임 의식을 마치는 레온나토스.

마지막 기사, 그들과 또래이면서 제8 기사단의 임시단장을 맡은 발커스까지 모든 서임을 마쳤다.

다른 이변이 없는 한, 기사단의 단장은 그대로 발커스에게 맡길 터였다.

실력만 따지면 근위기사 더글라스가 몇 단계는 위겠지만, 더글라스가 있어야 할 곳은 기사단이 아니라 레온나토스의 곁이었으니까.

“그럼, 언제까지 제8 기사단이라 부를 수 없으니 새 이름을 붙여야겠지. 새 이름을 짓는데 발커스 자네도 도와주지 않겠나?”

“저흰, 주군께서 지어주신 이름에 따르겠습니다.”

“…알겠네.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언제라도 말해주게. 그럼 이제….”

“전하. 당장 임무가 없다면 저희는 훈련장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훈련이라. 좋지. 하는 김에 나도-”

거기서 발커스는 손을 들고 레온나토스의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당분간 저희끼리 훈련하겠습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굳이 훈련보다는, 새로이 하사받은 기사단과 함께 친목을 다지고 싶었던 레온나토스는 입맛을 다셨다.

레온나토스 역시 알고 있었다.

기사단의 목적이 호위가 아닌데, 핑계를 대는 것부터 이미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사실을.

‘역시 초장부터 보란 듯이 엇나가는군. 예상이야 했지만.’

첫 번째 삶에서, 제8 신설 기사단은 여러 구설수에 휘말렸다.

그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모두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패기는 있었지만, 위계질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래 제8 기사단을 얻었던 건 가웨인 황자. 그때는 가웨인이 유력한 황태자 후보인데다 휘하에 인성보다 실력 우선인 무사들이 많았기에 어찌 잘 공존해낼 수 있었다.

반면 제12 황자 레온나토스는 세력도 미약할 뿐 아니라 황권 경쟁에서도 꽤나 후순위.

대놓고 말하지만 않을 뿐 아렌을 깔보는 기색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물러난 후, 더글라스가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가서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한번 말해본다는 게, 굳이 말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든 알 것이다.

레온나토스가 만류했다.

“아니. 이 모든게 내가 부족한 탓이지. 가신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내 허물이 더 커. 스스로 믿고 따를만한 인물이 된다면 달라질 걸세.”

레온나토스의 말 역시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래선 시간이 부족하지.’

그래선 너무 늦었다.

아렌은 실금이 간 흑옥 반지를 어루만졌다.

*****

제8 신설 기사단이 모인 연병장은, 황궁에 있는 다섯 곳의 연병장 중 가장 외진 곳에 있었다. 한쪽으로만 트여있어 누가 오는지 감시하기 쉽고, 병사들의 사열 연습이라도 있지 않은 기본적으로 찾는 이 없는 뜸한 곳.

이어진 담장도 낮아 누군가 다가오는지 훤히 보인다. 성인이라면 허리를 숙여도 쉽게 보일 만큼.

하지만, 어린아이라면?

아렌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숙여 연병장으로 다가갔다.

기사단은 모두 또래였고 동기였기에 모두들 격식없이 연병장 그늘에 주루룩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도 떨어져 연병장 입구의 계단에 앉은 여덟 명의 기사.

그 중심에 제8 기사단장, 발커스도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만한 거리에서 아렌은 귀를 기울였다.

“…씨발, 운도 더럽게 없지. 하필이면 12황자 밑이라니. 출세는 물 건너 갔잖아?”

발커스의 말.

다른 기사들도 덩달아 맞받았다.

“아니, 4황자 아래로 정해진 것 아니었어? 사냥대회에 우승한 건 4황자인데, 왜 12황자가 우리 주인이냐고.”

“차기 검성 후보 거르고 뽑힌 게 열 살 꼬맹이라니.”

“바로 얼마 전까지 책상붙이였다면서? 책장 넘기는 것도 고작일 텐데 칼 들 힘이라도 있겠어?”

그들은 아렌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공공연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누가 다가오는지 확인하기 용이한 지형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렌같은 꼬맹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허리를 숙이고 다가와도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눈치챌만한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강이 해이해져서 신경이 무뎌진 것뿐.

아렌은 거의 기다시피 하며 다시 물러났다.

연병장이 시야에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이번엔 일부로 발소리를 크게 내며 연병장으로 향했다.

“…….”

기척이 다가오자 기사들의 목소리가 단번에 멎었다.

발커스가 대표로 일어섰다.

“…누구신가 했는데, 비서관님 아니십니까.”

발커스의 목소리에는 7할의 정중함과, 3할의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죠?”

아렌이 물었다. 보다시피, 그늘에 퍼질러 앉아 쉬는 걸 수련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발커스는 안색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가문 비전의 호흡법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기사마다 물려받은 적절한 호흡법이 있는지라.”

‘…되는대로 주워 뱉기는.’

“그런 걸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근위기사인 더글라스 경도 그런 걸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물론 그러시겠죠. 더글라스 경에겐 가문 비전의 호흡법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정중한 말투지만, 동시에 평민출신인 더글라스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예의 있게 차려입은 조롱은 발커스 이하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명목상 그들의 지위는 단장 발커스를 제외하곤 모두 아렌보다 아래. 하지만 아렌을 상관으로서 대우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벼락출세한 꼬마 시종이 얼마나 가소롭겠어.’

이해라면 하고도 남는다.

물론, 그렇다고 아렌이 넘어가 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서, 비서관께선 여기 무슨 일이십니까. 이 외진 곳까지 번거로우셨을 텐데.”

“제가 온 건, 긴히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제게 할 말이요? 말씀하시죠.”

“실은, 물러나시고 난 후 간단한 점괘를 봤습니다.”

“…그래서요?”

“네. 이대로면 2달 안에 제8 기사단 부대원의 절반이 죽는다고 나오더군요.”

“아… 그래요?”

코웃음을 치는 발커스.

그건 다른 대원도 마찬가지다.

물론 평소 점을 믿는 자도 있겠지만 이렇게 덜렁 내뱉은 말로는 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가 부족하다.

분위기를 잔뜩 잡은 후 카드나 좁쌀, 나무 패 등의 현란한 무언가로 이목을 집중시킨 점괘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 말씀 하러 오셨습니까?”

“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더 조심하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 그리고.”

슬쩍.

아렌은 발커스의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어깨는 왜 가리킵니까?”

“아직 아프시지 않나요?”

“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

“그럼 이만.”

아렌은 총총거리는 걸음과 함께 연병장을 벗어났다.

*****

“뭐야, 저 미친놈은.”

아렌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기사단의 주축이 되는 다른 일곱 명도 마찬가지.

“퉤. 출세하려고 죽어라 뺑이 쳤는데 개털 밑에 들어온 것도 서러운데. 이젠 애새끼 눈치까지 봐야 해?”

“황궁엔 모두 모지리밖에 없나? 저런 꼬마 헛소리를 믿어주다니.”

“12황자가 똑똑하니 뭐니 하지만 저런 놈을 임명한 걸 보면 황자도 뻔하지.”

하지만, 한 기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런데 저 비서관, 태양이 사라지는 것도 예언했다면서? 사실일까?”

“…….”

“…….”

날카로운 비난의 말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허무맹랑한 예언이었지만, 동시에 뒷맛이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대회견장에서의 사건 이후, 아렌은 황궁의 유명인이었으니까.

실제로 하급 관료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아렌에게 점을 쳐달라는 의견이 쇄도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아렌이 자신의 가신이라는 걸 방패 삼아 그 모든 요구들을 다 쳐내고 있었다.

아렌은 어디까지나 레온나토스의 가신이었고,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레온의 허락 없이 아렌에게 점을 보게 하는 건 크나큰 결례였다.

그리고, 그런 자의 입에서 나온 무심한 예언은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연기처럼 슬며시, 그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시큰.

“아.”

“왜 그래, 발커스.”

“…아냐.”

기분 탓일까.

어쩐지 신경 쓰이는 왼쪽 어깨를 누르며 발커스는 얼버무렸다.

*****

‘조만간 저쪽에서 먼저 찾아오겠지.’

첫 번째 삶에서 발커스와 아렌은 딱히 연이 없었다.

가웨인 황자 아래로 들어간 제8 기사단이 유례없는 망나니였다는 것만 알 뿐.

하지만 일단 받은 이상, 유용하게 써먹어야 했다.

사람의 심리는 오묘해서, 아무리 지나가는 말이라도 신체 한 부위를 지목당하면 그곳에 자연히 신경이 쏠린다.

그 말이 믿을만한 것일수록 의식은 더 강하게 들어가고, 아주 약간의 위화감도 더 크게 받아들인다.

그 후에는 눈덩이가 굴러가듯 걷잡을 수 없어질 뿐.

그 후 며칠이 흘렀다.

내원 시종장은 레온나토스를 호출했고, 아렌과 더글라스, 발커스도 동행해 레온의 뒤에 섰다.

간단한 일이라면 전령을 통해도 되었겠지만, 지금 내원 시종장이 하려는 말은 황궁 안에서도 기밀인 모양이었다.

“얼마 전 받은 첩보입니다. 동부 국경에 약간의 도발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국경군이 있으니 당장 문제는 아니겠지만요.”

“그렇군요. 그럼 오늘 하실 말씀은.”

“마침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신설 기사단을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국경의 작은 분쟁도 실전 경험이니,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기사단을 시험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 폐하의 뜻이십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레온나토스가 황제의 명을 받드는 동안.

기사단장 발커스의 낯은 거멓게 죽어 있었다.

“…절반이 죽는다는 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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