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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5화 (25/227)

#025화

어둠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해를 침식했다.

마치 거대한 용의 아가리가 해를 집어 삼키는 듯한 기이한 광경.

이윽고, 해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위가 저녁처럼 어둑해지자 좌중의 웅성거림은 곧 소란으로 변모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레온나토스가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해는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레온나토스의 말 대로였다.

어둠에 잠식당했던 해는 점차 다시 원래 모습을 이끌어 냈고, 어두워졌던 대회견장도 다시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패닉에 빠지려던 대신들은 한층 밝은 표정이 되었고, 아렌은 고드프리를 흘깃 바라봤다.

고드프리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떨궜다.

‘역시. 설마하니 고드프리도 일식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늦었다면 위험할 뻔했어.’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는 개기일식은 몇백 년에 한 번 매우 드물게 일어나고,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저마다 의견이 갈렸다.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 오늘을 먼저 겪어봤기에 일식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고드프리 역시 일식을 알고 있었던 건 의외였지만.

‘고드프리가 그냥 무작정 조사해 알아낸 것 같지는 않고. 태양교는 일식이 언제 일어나는지 아는 건가?’

확실한 건 고드프리 역시 자신의 빈약한 근거에 태양신의 현신이라는 극적 효과를 집어넣어, 주장의 강화와 포교 두 가지 효과를 누리려 했다는 점이다.

그게 성공했다면 여론은 고드프리에 확실히 유리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점술가가 신의 현신을 예측했다곤 차마 말할 수 없겠지. 그게 그토록 경멸하는 민간 미신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 때문에 아렌은 자신이 점술가라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그것도 보통 점술가가 아니라, 해가 사라졌다 나타난 것을 황제 앞에서 예측해낸 점술가.

레온나토스와는 미리 말을 맞춰뒀지만,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기에 더글라스에게는 오늘 일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

“…그 카드들이 그래서.”

아렌의 곁에서 중얼거리는 더글라스.

전에 오늘의 어전회의를 점쳤을 때는, 완전히 까맣고 하얀 두 카드가 나왔었다. 그때는 의미를 모른다며 넘어갔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오늘 일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글라스와 멜로익은 그 점괘를 눈앞에서 봤으니, 이젠 아렌의 점괘라면 진흙으로 빵을 굽는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자, 어쩔 거냐. 고드프리.’

황제의 앞에서, 하늘의 상서로운 일까지 맞춘 용한 점술가.

아렌의 말에 실린 권위가 달라졌고, 레온나토스도 그것을 적극 이용했다.

“비서관 아렌이 조사한 대로, 개를 훈련시킨 수도원을 수색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곳에서 개가 아닌 다른 짐승을 다룬 적은 없는지, 그리고 특정한 날에 황제의 숲에 다가간 적이 없는 지도 말입니다.”

“큭… 얼토당토않습니다! 고작 해가 사라졌다고 저 허튼소리에 근거가 생기는 것은 부당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드프리 전하. 아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뭐?”

“제가 부득이 끼어들기 전, 하려던 말씀이 있지 않았습니까. 신의 말에 대한 증거, 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

고드프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연유로 고드프리가 일식의 주기를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향유하는 것이 유리하기에 함구한다.

레온나토스를 공격하기 위해 그 비밀을 밝힐 수는 없겠지.

고드프리의 침묵이 이어지자 내원 시종장이 중재하고 나섰다.

“두 분 다 그쯤 하시지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이곳은 어전회견장이지 재판장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는 차후 가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

“…….”

이를 악문 고드프리와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 레온나토스.

조사가 선행되어야겠지만, 이로써 고드프리의 운신의 폭은 대폭 좁아졌다.

‘고드프리가 레온나토스를 간과했군.’

다른 황자들은 쉬이 구워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력한 황권주자인 가웨인이니 다른 황자들로서는 고꾸라지는 게 더 큰 이득이니까.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그 이득 이전에 불의를 지나치지 못한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의혹만으로 가웨인을 몰아세우거나, 하물며 진범이 고드프리 본인일 가능성이 있다면 더더욱.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올곧지만, 아렌이 흑막으로서 다루기에는 오히려 더 편하다.

‘…만에 하나 고드프리가 진범이 아니라면 그건 안됐지만.’

물론 아렌도 신은 아니다. 고드프리가 범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의혹일 뿐.

확실한 물증이 있거나 혹은 눈앞에 앉혀놓고 점을 보지 않는 이상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레온나토스는 고드프리를 발판삼아 회견장에서 충분한 존재감을 뽐냈으니까.

고드프리와 가웨인, 두 청년 황자의 팽팽한 기 싸움은 덤이다.

앞서 달리고 있는 청년 황자들끼리 다툴수록 뒤따르는 후발 주자들이 비집을 틈이 생기니까.

대회견장의 천장에서 수직으로 내리 쬐던 햇빛은 해시계의 역할도 했다.

비추는 햇빛이 기울어 바닥이 아닌 벽을 비출 때쯤, 어전회견은 자연스레 파했다.

황제에서 가까운 곳, 지위가 높은 순대로 회견장을 빠져나갈 차례.

“아, 그리고 세 분은 잠시 남으시길 바랍니다.”

가웨인과 고드프리, 그리고 레온나토스.

내원 시종장이 셋을 불러세운 사이 수백 명의 사람들은 일제히 대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은 가웨인과 그 비서관 시온, 고드프리는 두 태양교 사제와 함께였고 아렌은 아렌과 더글라스를 대동했다.

그리고, 단상 위 황좌에 앉아 있던 세 명이 가림막을 들추고 일어섰다.

셋 다 대역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아렌은 적잖이 놀랐다.

‘뭐야, 진짜가 있었어?’

각진 턱에 굳게 다문 입, 깊은 눈은 아렌의 기억에도 있는 제국의 황제, 브륀할트 8세였다.

그리고 황제와 같은 옷을 입고, 황제와 체격까지 비슷한 다른 두 명.

하지만 그 얼굴엔 금으로 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절대 가면을 벗지 않기로 맹세한, 제국에 세 명밖에 없는 황제의 직속 호위인 금면병이었다.

황제의 얼굴을 확인한 세 황자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단상 위에 있는 황제를 직시하는 것은 어느 때라도 큰 결례이기에.

피곤한 얼굴을 한 채, 음울한 눈빛을 아래로 보내는 브륀할트 8세.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고요한 회견장에서 황제의 목소리는 창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고드프리의 고발이 있었다. 가웨인은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사냥대회 때 고한 제 입장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시선을 고드프리에게 보냈다.

“고드프리. 너는 방금 한 고발을 유지할 건가?”

“…그렇습니다. 사고라고 보기엔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누군가의 범행이라면 가장 의심스러운 건 여전히 가웨인 형님입니다.”

그리고, 이젠 레온나토스의 차례였다.

“레온나토스는 고드프리의 말을 부분 부정했다. 또한 화살을 고드프리에 돌렸지. 맞나?”

“그렇습니다, 폐하.”

모두의 대답이 끝난 후 황제는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허탈함도 묻어 있었다.

“…돌멘이 죽은 일은 황궁에서도 직접 조사하고 있었다. 조만간 조사 결과가 나올 것이다.”

“…….”

“형제를 죽인다라. 정상적인 관계에선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황궁의 상식은 세간의 상식들과는 다르다.”

그 말은, 마치 친족 살인을 두둔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하긴, 황제도 형제들 사이에서 수많은 수라장을 지나왔을 테니.’

“하지만. 그게 세간의 법도를 완전히 저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였다면, 적어도 들키지 않을 각오쯤은 되었어야겠지.”

황제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이번 일에 대해 더 이상의 조사는 금한다. 차후 조처를 기다리도록 하라.”

“존명하겠습니다.”

“…….”

황제는 다른 말 없이 두 명의 금면병과 함께,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세 황자들.

그리고 남아 있던 내원 시종장이 말했다.

“고드프리 전하는 일단 물러나셔도 좋습니다.”

“…저, 다른 두 황자는….”

“…….”

내원 시종장의 온화하지만 단호한 눈빛이 고드프리를 향했고, 그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지나가며 가웨인과 레온나토스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 고드프리.

줄곧 자신에게 날을 세우던 고드프리가 물러나자, 가웨인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의심을 살 거라 생각은 했다만, 설마 어전 회견에서 지목당할 줄이야. 레온이 아니었다면 곤혹이었겠군.”

“전 누구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틀린 부분이 있어 정정했을 뿐이지요.”

“그 조사, 네 비서관이 한 건가?”

이미 한번 본 적 있지만, 그때는 아렌을 향한 시선이 이리 흥미롭지 않았다.

아렌은 허리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비서관 아렌이라 합니다.”

“다시 봐도 어리군. 그때는 더글라스만 인재인 줄 알았는데.”

“…….”

“해가 사라진다는 걸 예측하다니. 네 점술이 그리도 용한가? 이토록 앞날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만큼?”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일어날 일의 편린을 아는 정도로, 오늘 일을 예견한 건 고드프리 황자가 오늘 있을 일을 어느 정도 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 덕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확실한 예측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렌에 대한 주목이 너무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렌은 되도록 겸양을 떨었지만,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점술이라. 좋은 칼을 얻었군, 레온나토스. 잘못 쓴다면 자칫 주인의 손을 찌를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주의하고 있습니다, 형님.”

내원 시종장 브레만도 한마디 거들었다.

“점술 뿐 아니라 강단도 있더군요. 직접 불러 내 앞에 앉혔을 때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으니까.”

“흠, 그건 제법이네요. 시종장 각하의 등살이 어디 보통인가?”

“가웨인 전하의 망나니짓만 하겠습니까.”

둘은 농담처럼 가볍게 웃었지만,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행실은 불량하지만 유력한 황태자 후보와 현 황제의 오른손 역인 황족.

이미 기 싸움이 익숙한 듯 가웨인이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서도 물러가신 마당에 백부님께선 우릴 왜 왜 붙잡아두신 겁니까.”

“아마 잊으셨겠지만, 사냥대회의 포상을 아직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런 게 있었던가?”

원래라면 포상은 사냥대회 직후, 그게 안 되더라도 어전회견에서 성대하게 내려졌겠지만. 그 기회는 고드프리와 레온나토스의 공방으로 날아갔다.

“사실 이미 칼잡이야 차고 넘칠테니 무슨 의미겠냐마는, 어쩔 수 없죠. 포상은 전에 공지한 대로 신설된 제8 기사단을….”

“포상은 레온나토스에게 주시지요.”

“…가웨인?”

의아해하는 내원 시종장에게, 가웨인은 아까워하는 기색도 없이 시원하게 말했다.

“포상은 사냥대회에서 가장 활약한 자에게 주는 상 아닙니까? 그럼 레온나토스가 단연 으뜸이곘죠. 한번 돌멘을 위기에서 구해냈고, 끝내는 내게 붙을 누명까지 쳐냈으니. 지금으로서도 상을 받아 마땅하나, 만약 고드프리가 진범이라도 된다면 더 볼 것도 없죠.”

“…흠, 하긴.”

뜻밖의 말이었지만 내원 시종장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쓸만한 칼이 차고 넘치는 자에게보다, 칼이 필요한 사람 손에 쥐어지는 게 더 맞겠죠.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온 전하는 가웨인 전하의 경쟁자가 될 텐데.”

그 말에 가웨인은 피식 웃었다.

“쉽게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재미겠습니까. 황태자 경쟁도 다 재밌자고 하는 일인데. 어차피 황제는 제가 될 겁니다.”

“하긴 그 근본 없는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니면 썩 재밌긴 하겠지요.”

“…흐흐.”

내원 시종장과 가웨인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선 사이.

뜻밖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는, 수긍도 거절도 하지 못한 채 둘을 돌아봤다.

더글라스야 이게 웬 횡재냐는 표정이었지만.

‘…이런.’

겉으론 평소와 같았지만, 아렌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제8 기사단을 받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

대회견장을 빠져나오며.

안색이 보란 듯이 사색이 된 아렌에게 더글라스가 소곤거렸다.

“인마, 기사단을 받은 뒤로 표정이 볼만하다?”

아렌 역시 목소리를 낮췄다.

될 수 있는 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 했지만, 말하는 입맛이 썼다.

“…더글라스. 전쟁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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