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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4화 (24/227)

#024화

황궁 내원으로부터 서쪽, 사방이 붉은 장미 정원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다.

건축물의 내부는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원통형의 건물은 워낙 높이 치솟아 있어 마치 탑을 연상케 했다.

돔으로 된 천장엔 군데군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어, 햇빛이 그대로 아래까지 내려왔다.

마치 중간중간 구멍이 뚫린 거대한 지하 동공에 있는 듯한 풍경.

그곳에, 수백 명이나 되는 대소신료들이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네 번 있는, 황제를 향해 직접 나라의 대소사를 고할 수 있는 어전회견.

회견장 중앙에는 높이 올라간 단상과 그 위 나란히 놓인 황좌 세 개가 있었다.

세 의자에는 똑같은 황제의 복식을 한 사람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가림막이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 암살 기도를 막기 위함이었다.

‘…저러니 실제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낭설이 돌지.’

레온나토스의 가신으로서 따라온 아렌이 허리를 숙인 채 생각했다.

얼마 전 맹인 사서 레밍을 레온나토스에게 소개시켜줬지만, 아직 레밍은 레온의 세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되는 순간 사서직을 그만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밍과 황자의 마음이 맞는 이상 영입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레밍을 영입하면 그쪽으로 더욱 이목이 쏠리겠지.’

경력이 부족한 맹인 사서와, 그를 가신으로 들인 레온나토스에 이목이 쏠리는 만큼 아렌을 향한 시선은 더 줄어들 것이다.

‘내 대신 힘 좀 내 달라고, 레밍.’

아렌이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래 줘야만 했다.

*****

아침부터 시작된 어전회견은 정오 무렵이 될 때까지 계속됐고, 그럼에도 회견은 끝날 줄을 몰랐다.

“서쪽 국경의 자유국 연합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셰일 곡창지에 최근 큰 가뭄이 들어….”

“최근 곡물의 가격이 전년 대비 1할 6푼이 올랐습니다. 반면….”

수많은 안건이 차례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가운데. 아렌으로선 조금 의외였다.

황자 레온나토스가 살해당할 뻔했고, 황자 돌멘은 실제로 죽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에 대한 언급이 나올 줄 알았지만, 신료들은 독성 있는 상처라도 대하듯 정성껏 그 의제를 피해 가는 것으로 보였다.

“…….”

그리고, 장막 안쪽의 황제 역시 목석처럼 미동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지? 자기 아들이잖아. 슬프지 않을 리 없을 텐데.’

특히 아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레온나토스가 죽은 후 끌려간 처형장에서 본, 황제가 짓던 침통한 표정을.

돌멘이 살해당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레온나토스를 노린 암살기도가 있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 사실조차 거론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이미 황권 경쟁이 시작된 이상,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으시다?’

아렌이 기억하는 20년 후의 황실은 차기 황권 경쟁이 일단락된 후였다.

그때는 황제도 지금보다 얼굴을 자주 보였고, 의사 표명도 자주 했다.

반면 지금은 황권 경쟁이 한창인 시기. 이제 막 황권을 천명한 어린 황자부터, 천명할 나이도 채 지나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적어도 황제가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황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겠지. 황궁이란 그런 곳이니까.’

대소신료의 정례 보고가 끝났다.

어전회견을 진행하던 내원시종장 브레만이 말했다.

“이후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은 없으십니까.”

자유발언 시간이 되자 곳곳에서 손이 올라왔다.

물론 그중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어전에서 가까운 순, 황궁 내 직책이 높은 순서대로 상소를 받는다.

가장 가까운 곳의 손은, 제5 황자 고드프리였다.

“고드프리 전하. 말씀하시지요.”

고드프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의 복식답게 고급비단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옷의 형태는 곳곳에 보라색으로 염색한 태양교의 사제복을 본 딴 모습이었다.

고드프리는 한번 쉼호흡을 한 후, 곳곳에 자신의 목소리가 스며들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전, 제13 황자 돌멘 브륀할트의 살해범으로 제4 황자 가웨인 브륀할트를 지목하고자 합니다!”

“…….”

직후, 조용한 웅성거림이 회견장 앞부터 파문처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고드프리의 말에도 황좌에 앉은 세 명도 묵묵부답은 마찬가지.

내원 시종장은 황제를 대신해 물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우선….”

고드프리의 장황한 말들이 이어졌다.

온갖 미사여구와 추측, 단정들이 한데 뒤섞여 뭉친 듯한 말들.

이전 아렌과 레온나토스에게 들려줬던 말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은 말들이었다.

“늑대에 물린 상처 역시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로 간단히 위장할 수 있습니다.”

“돌멘 황자의 호위들을 전부 죽인 것도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가웨인 황자는 자신의 가신들을 몇 번이고 죽였습니다. 그런 자가 시신을 우연히도 처음 발견했다? 우연이 너무 겹칩니다.”

듣고 있던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할 텐데, 고드프리?’

그 정도 가지곤 의심만이 가능할 뿐. 확언할 수는 없다.

대회견장 안의 여론 역시 둘로 나뉜 듯했다.

결국 추측뿐이지 않으냐. 하지만 가웨인이라면 그럴듯하지 않나, 등으로.

“…….”

지목된 당사자인 가웨인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고, 오히려 그 주변의 가신들이 더 흉흉한 눈빛을 빛냈다.

듣고 있던 내원 시종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고드프리 전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방금 들은 건 모두 의혹일 뿐,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시종장 각하. 하지만 전 신을 믿고, 신이 곧 제 말의 증인입니다.”

아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걸 할 건가?’

또 시작이냐는 듯, 조금 질린 표정의 내원 시종장.

고드프리는 이어 말했다.

“위대하신 태양신께서 제 말을 보증하실 것입니다. 오늘 한 말에 아무 이상이 없다면 말입니다. 가령-”

고드프리의 시선이 위로 향하려는 찰나.

‘지금이야, 레온 전하.’

아렌은 무엄하게도 옆에 있는 레온나토스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윽!”

바로 옆에까지만 들릴 만큼의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레온나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드프리 전하의 말씀에 대해 첨언해도 되겠습니까?”

“레온나토스? 하지만 지금은 제 발언 차례입니다. 내 말이 끝난 후에….”

다급히 제지하는 고드프리. 하지만 내원 시종장이 허락했다.

“아닙니다. 고드프리 전하의 말과 관계있는 듯하니, 레온나토스 전하의 발언을 허락도록 하지요.”

신을 믿지 않는 내원 시종장에게, 고드프리의 태양신 타령은 언제나 듣기 거북한 것이었다.

아렌이 말한 대로 발언권을 얻자, 레온나토스는 신통해 하면서도 준비한 말을 이어갔다.

“돌멘 황자가 변을 당한 후, 전 한동안 제 방에만 칩거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 비서관이던 아렌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허.”

이 대목에서 조용히 쓴웃음을 지은 시종장.

“우선, 고드프리 전하의 말처럼 돌멘 황자의 물린 상처는 사냥개로 만들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사냥개는 이빨이 모두 뭉툭하게 갈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요? 어차피 상처를 꾸며내는 방법은 많지요.”

“모르실 수 있습니다. 고드프리 전하는 사냥대회에 불참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사냥개의 이빨이 뭉툭하다는 건 모르셨으면서, 사냥개가 난폭하다는 사실은 잘 아시더군요. 특히나 황자를 향한 공격성이 두드러진다는 것 또한 말입니다.”

“…….”

고요했던 대회견장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가 하사받았던 사냥개는 아마, 황제 폐하께서 저희 형제들의 역량을 시험해 보는 잣대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황자를 향한 공격성도, 날카로운 이빨을 전부 갈아낸 것도 전부 설명이 되지요. 그런데 그 엽견들을 훈련한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그걸 제가 알아야 합니까?”

“모르신다니, 이상하군요. 아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황궁이 준비한 엽견은, 태양교의 수도원에서 훈련되었다던데 말입니다.”

“…….”

수도원에는 항상 많은 부가 축적되고, 항상 약탈과 절도에 대비해야 했다.

약탈을 막기 위해 수도자들이 따로 무장하기도 하고, 도둑을 막기 위해 경비견을 기르는 것도 그 대비의 일환.

개의 훈련이 수도회의 업무 중 하나가 되자 자연히 훈련의 수준도 높아졌다.

종국엔 훈련된 경비견, 엽견을 파는 것도 수도원의 수입 중 하나가 되었다.

“…태양교의 수도원에서 훈련시켰습니까? 몰랐군요. 물론, 일개 신도인 제가 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야 없는 일이죠.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죠? 설마 우리 태양교를, 혹은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지, 하사받은 엽견으로는 물린 상처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니 돌멘의 사인은 늑대에 의해서가 맞을 거라는 점입니다. 사냥 도중에도 돌멘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도 돌멘은 늑대에게 집요하게 노려지고 있었으니까요.”

“…….”

그리고, 황자에 대한 집요한 공격성은 사냥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늑대 역시 사냥개처럼 훈련으로 공격성을 띄었다면, 돌멘의 체취를 기억한 늑대는 훌륭한 살해 도구가 된다.

‘돌멘이 지지했던 황자가 고드프리였다면, 돌멘의 체취를 구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

“…그럴 수도 있죠. 방금 아우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그동안 레온 아우는 방안에 칩거해 있었죠. 고작 열 살짜리 시종의 조사를 대체 얼마만큼 믿을 작정입니까.”

“물론 필요한 만큼 믿어야지요. 하지만.”

그 말을 한 뒤, 레온나토스는 곁에 있는 아렌을 흘깃 바라본 후 말했다.

“제 가신 아렌에겐 한가지 특기가 있습니다. 미래의 편린을 아주 잠깐 엿볼 수 있는 점술이 바로 그것이지요.”

“…점술?”

좌중의 누군가가 중얼거렸고, 고드프리는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유일신인 태양신만을 섬기기에 민간의 미신을 극도로 거부하는 고드프리는 물론, 대회견장에 앉은 다른 이들의 심정도 고드프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비서관의 특기가 주산이나 율법, 약학도 아닌 한낱 점술이라니.

점술은 아무리 용해도 믿지 않는 사람에겐 그저 허울만 좋은 말일 뿐이다. 설령 점술을 믿는 사람조차도 모든 일을 점괘대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점술은 기술도 마술도 아닌, 경계선의 오묘한 영역일 뿐.

‘…그 인식이 사실이긴 하지.’

아렌은 그 경계선을 넘기 위해 항상 극적인 장치들을 적극 활용했다.

레온나토스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아렌이 예견한 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칫!”

비록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렌에겐 고드프리가 혀를 찬 소리가 똑똑히 들린 것만 같았다.

레온나토스의 손가락에 이끌린 듯, 모두의 시선이 구멍 뚫린 돔형 천장으로 향했다.

“…해가 사라진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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